토론 프로그램이 지겨우세요?

<주부, 세상을 말하자>에서 본 남다른 토론의 가능성

등록 2007.04.07 12:59수정 2007.04.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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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방송은 왜 피곤하고 졸린 늦은 밤시간에 하나요?"
"늦은 밤에 하면 보다가 잠들 수 있기 때문이죠. 결국, 쓸데없는 토론은 보지 말고 디비 자라 이 말입니다. ㅋㅋㅋ"


네이버 지식인에 오른 질문과 대답이다. '보느니 디비 자겠다', 이것이 토론 프로그램에 대한 이미지의 현실이다.

토론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멍청하거나 패널들이 바보라서 이렇게 됐을까? 아니다. 토론 프로그램에서 토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대면해 앉지 않아도 가능하다. 마주보고 앉는 형식은 각자의 대립하는 주장에서 더 나아간 지점에 도달해 보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최대한 이상적인 지점은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고 적어도 서로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없는지, 자신의 주장이 그 오해에 근거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불필요한 대립이 지속하는 것은 아닌지, 서로 입장의 거리를 좁혀 나갈 가능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검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년간 극히 낮은 시청률에도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이런 태도를 볼 수 없었다. 주장의 단순 반복, 반대를 위한 공격, 자신의 취약점을 숨기기 위한 대답 회피, 엉뚱한 대답을 해서 웃음을 살지언정 절대로 상대방의 주장에 동요할 수 없다는 많은 패널들의 태도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느니 디비 자겠다'는 냉소적인 시청자들을 만들어냈다.

단지 양측의 주장을 파악하는 일은 서로 마주앉은 자리가 아니어도 가능한 것이다. 토론은 그 다음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걸 모르고 있으니 (물론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이겠지만) 진전된 토론 문화를 보고 싶은 기대가 무색해진다. 그럴 바엔 차라리 출연자의 약점을 사정없이 공격하는 강호동의 '무릎팍 도사'를 보겠다. 거긴 최소한 질문하고 대답하는 양자의 관계가 서로 반대하기 위해 기를 쓰고 반대를 하는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토론 프로그램에 대해 이렇게 불신이 가득한 내가 어느 아침에 본 토론의 장면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열린 토론의 마인드 보여준 <주부, 세상을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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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지난 2일 월요일 아침 KBS1 <주부, 세상을 말하자>는 '황혼의 성 - 표현할수록 아름답다'는 주제로 토론을 했다. <주부, 세상을 말하자>는 주부들을 가정 내의 존재로만 보지 않고 사회 전반의 시사적인 문제 등으로 시야를 넓혀 나가는 존재로 위치시키며 여타 주부 대상 프로그램들과 차별성을 두었다.

'황혼의 성'이란 주부들에게 부모를 모시는 데 있어서 현실이며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가까운 미래이다. 노인의 성에 대한 토론의 쌍방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찬성하는 노인 세대와 반대하는 자식 세대로 나누고자 한다면, 그런 구분부터 상당히 (신선하지 않고 오래된 것이라는 의미에서) '후진' 사고에 기인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몇 년 전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로 노인의 성이 단박에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을 때 언론은 대개 "우리도 몸을 가진 인간이다"라는 극히 적은 노인들의 발언과,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아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젊은이들의 반응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서는 찬반의 패널을 구성하는데 수년 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4대 4의 양측 배열로 앉은 자리에는 노인의 성에 대한 전문가, 40대 주부, 50대 주부, 그리고 70대 노인들이 나와 뒤섞여 앉아 있었다. 이런 문제에 대한 찬성과 반대는 세대 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직 노인이라 불리기는 이르지만 곧 노인이 될 시기의 40, 50대 주부들의 경우는 개인적인 사고방식의 차이라고 한다면,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노인들 중에서 할아버지는 찬성 측에, 할머니는 반대 측에 있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노인의 성에 대한 관점도 성별 대립을 보이는 것일까?

찬성하는 할아버지는 일 년 전 "그 나이에 여자가 그리우냐?"는 자식들의 비아냥을 무릅쓰고 동거를 시작했다고 하셨다. 또 "늙어서 혼자 있으면 마음만 외로운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라며 남녀가 몸을 부대끼며 만나야 할 필요를 설명했고, 자식들이 반대하는 이유는 재산 문제가 개입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에 관한 문제들을 논할 때 흔히 "남자들은 다 그래"라는 식으로 일반화하기 쉽다. 많은 남성들이 그런 논리로 일관하고, 특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개인의 경험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모면하려는 것을 쉽게 보곤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개인적인 경험을 담담히 밝히시는 태도는 남달라 보였고, 주부들로 구성된 이 토론단에서도 할아버지의 존재가 권위적이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노인들이 육체적인 기쁨을 위해 서로 만남을 도모하는 것에 반대하는 할머니의 의견은 이랬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도 참고 아이들을 돌봤고 자녀들을 위해 희생함으로써 존경받는 엄마가 되어야 하는데, 지금 와서 그게 무너질까 봐" 외롭더라도 자신을 위해 할아버지를 만날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바로 여기에서 다시 노인의 성에 대한 새로운 논쟁의 지점이 생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자신의 행복을 위해 늘그막에 성을 즐기려는 것은 다소 민망하고 재산 분배가 걱정될 뿐이지만, 어머니가 그러는 것은 평화롭고 가치 있는 어머니상에 크게 훼손이 가는 것이다. 여성 노인들이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사랑과 성을 추구하는 것에 소극적이 된 큰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 할머니는 결국 "나를 위해 즐겁게 살 권리가 있다"는 말에 크게 동의하며 토론 도중 눈물을 보이셨다. 자식들의 반대에도 "그냥 저질러 버렸어요"라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말에는 참석자 모두 손뼉을 쳤다. 희생으로 존경받는 어머니로 남고 싶다던 할머니 이외에도,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은 반대하지 않지만 몸으로 사랑하는 것은 좀 자제했으면 한다던 40, 50대 반대 측 주부들도 다 함께 손뼉을 쳤다.

바로 이 장면이 여느 토론 프로그램들과 달랐던 순간이다.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다 보면 남녀가 만나고 때론 같이 살고 또 어쩌면 헤어질 수도 있는 과정은 노인이라도 특별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찬성이든 반대든 다르지 않았다.

반대 의견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치사한 태도로 나오지 않은 참석자들

그런데 희생적인 모성애라는 담론이 노인의 성에 대한 대립 구도를 세대가 아닌 성별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자식을 보험으로 삼아 노후를 의탁하려는 것이 크게 안심이 되지 않는 시대적 상황을 반추하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결론에 양측이 같이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반대 측 참석자들이 노인도 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말에 머리로는 수긍을 해도 완전히 찬성을 하기에는 껄적지근한 상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토론 프로그램에서 상대방의 견해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동의를 보내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열린 토론의 마인드였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토론자라면 찬성의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에도 크게 구애됨이 없을 것이다.

만일 그 할아버지가 "남자는 늙어도 육체적으로 여자가 필요하다"는 식의 논리로 나왔다면 어땠을까? 어머니의 희생 운운하는 할머니에 대해 여자들을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어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할머니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나를 위해 즐겁게 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 경험을 들려주며 열심히 설득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눈물로, 다른 참석자들은 박수로 그 견해를 지지했다. 토론에서 성별 대립을 부각하기 위한 소재로 '노인의 성'을 활용하지 않은 제작진의 관점, 여성의 의견에 반대하는 남성의 입장에서 주장을 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태도, 그리고 반대 의견에 절대 넘어가지 않겠다는 치사한 태도로 토론에 나오지 않은 모든 참석자들의 열린 마인드가 합쳐져서 토론의 빛나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참 산뜻했다.

덧붙이는 글 | 티뷰기자단

덧붙이는 글 티뷰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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