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할 수 있는 드라마? 그런 게 있었어?

[리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

등록 2007.06.01 17:53수정 2007.06.05 11:33
0
원고료로 응원
a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 홈페이지. ⓒ KBS

어쩌면 인간들이 하나같이 지긋지긋하게 꼴불견인지 모르겠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 말이다.

결혼 못 한 게 아니라 절대 안 한 거라고 주장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모두 못 한 것이라고 믿을 것이 분명한 싸가지 없는 노처녀,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돈과 여자와 남자다움에 대해서는 만용을 부리다 뭉개지는 시시껄렁한 날라리, 마누라는 짐 싸서 나가고 친구들한테서는 잘난 척 하지 말라며 주먹질을 당한 뒤 애먼 개한테 화풀이하는 좀스러운 만년 부장.

그들의 인생은 질척거리고 실패하며 불완전하고 외로운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들이 행복한 미소를 짓는 세상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불공평한 일일 것 같다. 스크루지 영감도 잘못을 반성한 다음에 행복을 깨달았지 않은가.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을 할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데 아니라고 하기도 싫다. 행복을 말하는데 뭔가 복잡한 심경이 개입된다. 문제는 행복해지고 싶은데 방법을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소중한 것들은 나중에 알아차리고 사랑한 사람은 지난 후에 안타깝고, 젊음은 힘겹고 늙어가는 것은 서럽고, 어리석음과 후회로 점철된 시간들이 미련만 남기는 내 인생은 행복을 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공기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서 떠나왔건만 예전에 살던 곳의 집값이 훌쩍 뛰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가 이사 온 곳의 신선한 공기의 가치는 사라지고 손에 쥐지 못하고 모래알처럼 흘려버린 돈의 가치가 머리를 메운다. 그것이 내가 행복하지 못한 큰 이유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보자. 대답하기 어려운 "행복합니까"라는 질문 대신 나는 왜 외롭지, 혹은 나는 원래 용이 아닐까, 사랑을 얻지는 못해도 사랑에 관한 고민을 얘기할 가족이 있는 건 행복이 아닌가 하는, 대답도 빨라지고 깨달음도 선명해지는 그런 질문들로 말이다.

명분만이 아닌, 구체적 사례 보여준 드라마

a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 출연자. ⓒ KBS

KBS가 80주년을 맞아 특별한 드라마를 내놨다. "공익성, 유익성, 재미와 환원적 의미까지 담은 드라마를 만든다"는 취지 아래 12명의 작가와 3명의 연출가가 6개월을 준비했고,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한 신 출연을 마다하지 않은 주조연급 연기자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하다.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옴니버스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5월 30일·31일 밤 9시 55분 방송)은 국내 최초의 도네이션(기부) 드라마라는 의미를 안고 태어났다.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개런티를 모두 국제 NGO에 기부해 국제 기아문맹질병 퇴치 및 북한 아동 돕기를 위해 쓸 것이라고 한다.

얼마 전 MBC <고맙습니다>에서 에이즈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환자 및 보균자에 대한 편견을 인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드라마의 내용 일부가 공공의 이익을 위해 기획되는 경우도 사실 많지는 않다. 그런데 드라마의 기획과 진행 과정, 그리고 내용 전부가 공익성을 실현하기 위한 것은 처음이다.

이제껏 드라마는 사회적 부정의와 비윤리가 공공연하게 재현되곤 하던 장르였고 드라마에서 공익적 요소를 찾으려는 시도는, 불가능하다면 슬프지만, 무모해 보였다. 그런데 대중문화로서 방송 드라마가 사회적 공익을 추구하면서 시청자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발휘하려는 것이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은 명분만 공익성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개런티를 기부함으로써 구체적인 행동의 사례를 보여주었다.

간혹 샤론 스톤이나 리처드 기어 같은 할리우드 배우들이 국제 명사들이 모이는 어떤 자리에서 몇 억 혹은 몇 십 억 기부금을 모금했다는 외신을 듣는다. 또 미국 남부 카트리나 태풍 피해자들을 돕기 위해 오프라 윈프리가 나서서 할리우드 셀러브리티(명사)들을 추동하여 기금을 조성하는 활동 소식을 듣는다. 유명인의 이름값이란 이런 것이다.

패리스 힐튼은 클럽에 가서 춤추며 놀 때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돈을 받는다고 한다. 힐튼이 노는 곳이라는 명성을 위해 클럽에서 돈을 주고 오게 하는 것이다.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는 이름값을 이렇게 쓴다. 그러나 샤론 스톤과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이름값을 개인의 명예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

돈을 받는다면 끝까지 할 수 있었을까?

a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 홈페이지. ⓒ KBS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홈페이지에는 출연을 희망한 배우들의 이름도 기재되어 있다. 이것은 드라마의 가치를 올리려는 얄팍한 홍보가 아니라 이 의미를 지지하고 동참하려는 배우들의 이름값을 전부 모아서 큰 힘을 발휘하게 하고 싶은 바람이다.

에피소드 6개 중에서 4개를 책임 집필한 노희경 작가는 지난 5월 23일 시사회 후 기자회견에서 "돈을 받고 하는 일이었다면 끝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소감을 밝혔다.

'돈도 안 받는데 끝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아니라 '돈을 받는다면 끝까지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니, 얼핏 앞뒤가 안 맞는 것 같다. 이것은 행복에 관한 질문과 마찬가지로 들린다.

노희경 작가는 또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출연료보다 더 중요하게 출연을 결정하는 요인이 있고,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꼴불견인 인물들도 친근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도, 조금만 시각을 바꾸면 선정적인 요소가 없어도 심심하고 착한 주제를 다루는 드라마에 푹 빠져 달뜬 흥분을 느낄 수 있다.

드라마를 통해 얻은 나의 수확, 배우 이한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얻은 수확은 배우 이한이다. 드라마 전체에서 젊은 배우로는 유일하게 비중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젊은 배우들은 배우로서 연기력이나 독자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기보다는 맡은 배역에 따라 이미지나 호감도가 좌우되기 마련인데, 이한은 이전 배역들에 비추어보았을 때 그리 호감 가는 배우는 아니었다.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는 '이리도 음침할 데가…'하는 느낌, 영화 <후회하지 않아>에서는 '질질 짜는 나약한 부잣집 아들 같으니…'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대책 없고 속없고 머리에 든 것도 없어 보이는 철부지 싸가지 청년을 이리도 딱 떨어지게 연기하는 것 보니 이전의 배역의 부정적인 이미지도 그의 출중한 연기력의 일환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고, 급격히 호감 배우로 바뀌었다. 앞으로 이한이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에는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 같다. 이것은 나의 수확만이 아니라 이한의 수확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3명의 작가들이 나누어 집필한 옴니버스다. 전체적인 짜임새보다는 각 에피소드의 아이디어와 완결성이 중요하다. 그런데 노희경 작가가 4편의 에피소드를 담당하고 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공통되기 때문에 다른 에피소드들이 번외편처럼 보여서 균형이 깨어진 것이 조금 아쉽다.

특히 선재(류승수)가 통영에 간 '자존심'편은 전체 속에서 꽤 엉뚱해 보인다. 그러나 드라마의 기본적인 목적에 비춰보았을 때 그 아쉬움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선재가 던진 질문 "나는 원래 용이었던 것이 아닐까?"의 울림이 반감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청자에게도 기부 드라마에 참여하는 기쁨을 달라!

a

출연 또는 기부 의사를 밝혀온 연기자 명단. ⓒ KBS

이 드라마의 존재는 앞으로 긍정적인 사례로 남을 것이다. 한 명이 아니라 12명의 작가가 참여해서 의미 있는 드라마, 1명이 아니라 3명의 연출자가 참여해서 의미 있는 드라마, 수십 명의 배우들이 앞 다투어 출연하고 싶어 해서 의미 있는 드라마였지만 이에서 한 발 나가기를 바라면서, 시청자들에게도 기부 드라마에 참여하는 기쁨을 주면 좋겠다.

예를 들어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 중에 ARS 모금을 하는 건 어땠을까? 마음이 따뜻함으로 차분히 가라앉을 때마다 혹은 가슴이 행복한 느낌으로 벅차게 차오를 때마다 한 번씩 전화를 걸어 시청자들이 기부할 수 있게 했다면 드라마가 끝나고도 한참은 더 기부의 의미가 폭넓게 확산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가 끝나고 살짝 허전한 차에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이것은 단지 하나의 아이디어가 아니라 기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고리가 되었다. 방송 프로그램 중에는 ARS를 통해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성금을 모으는 것이 있다.

해마다 태풍 등의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모금도 방송 ARS가 큰 몫을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구체적인 사례를 눈으로 보면서 그 느낌에 기부를 하는 것이 불편해질 때가 있다. 돈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관계가 불쌍한 사람과 불쌍히 여기는 사람으로 확연히 나뉘기 때문이다. 마치 아프리카의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의 사진을 자꾸 보여주며 가난의 참상을 재현하는 방식에 불쾌해지듯이 말이다.

현재 우리 사회에는 불쌍하고 비참한 현장을 보고 기부하는 방식이 훨씬 압도적인 것 같다. 이 드라마가 기부라는 행위가 얼마든지 자연스럽게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주었다면, 다음에 이와 유사한 취지로 기획되는 프로그램은 기부 방식에 대한 고민도 넓혀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불쌍하고 비참한 대상에게 하는 기부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조건 없이 나누는 것으로서 기부를 고민하면서, 시청자들에게 그런 의미의 기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덧붙이는 글 |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현정 기자는 티뷰기자단입니다.
#방송 #드라마 #기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아니, 소파가 왜 강가에... 섬진강 갔다 놀랐습니다
  2. 2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3. 3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4. 4 두 번의 기회 날린 윤 대통령, 독일 총리는 정반대로 했다
  5. 5 '김건희 비선' 의혹, 왜 자꾸 나오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