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고무 키우는 콩고엔 고무신발이 없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 30] 아직 끝나지 않은 콩고의 비극

등록 2007.06.08 15:20수정 2007.06.0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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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고릴라가 있는 비룽가 산맥에 사는 콩고 어린이들. ⓒ 김성호


마운틴고릴라와 헤어져 정글을 헤치며 내려오는데 산 주위의 밭에는 아낙네들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움막처럼 생긴 집들도 한두 채씩 띄엄띄엄 보였다. 산속에 사는 어린이들은 외국 여행객인 우리가 신기한 듯 "잠보(안녕)"하고 인사하고 사진찍기를 좋아했다. 마운틴고릴라처럼 온순하고 순수한 어린이들이었다.

마운틴고릴라 경비초소까지 내려오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때가 오후 1시쯤. 우리는 경비초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밀림 속을 내려오느라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비초소에는 순식간에 주변 움막집에 사는 어린이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15명이나 되었다.

이탈리아 부인 사르비아가 프랑스어로 동요를 부르자 아이들도 흥겨워했다. 내가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자신들의 얼굴 모습을 카메라 모니터 화면을 통해 바로 보여주자 너무나 신기해했다.

우리가 마운틴고릴라를 보러 가기 위해 오전에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접경에서 지프차를 타고 국경 마을 입구에 나타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차를 타고 마을 한가운데 도로를 지나가자 한 아이가 맨발로 마당에서 뛰어나와 손을 흔들며 "잠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아이들도 "잠보"라고 인사하면서 지프차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잠보", 저기서도 "잠보", 온 마을에 "잠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린이도 "잠보", 어른들도 "잠보",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흙으로 지은 초가집에서 쉬고 있던 사람들도 그렇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던 젊은이도 "잠보"를 외쳤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잠보" 소리를 많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콩고는 '잠보'의 나라였다.

사람이 그리운 콩고 어린이들의 "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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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고릴라가 있는 비룽가 산맥의 밭에서 손을 흔드는 콩고 어린이들. ⓒ 로렌스 스미스

외국 여행객에게 먼저 손을 흔들면서 "잠보"라고 인사하는 것은 그만큼 순수하고 사람이 그립다는 다른 표현이다. 이 곳의 정글 마을은 정말로 외국인이건 콩고인이건 마운틴고릴라 트레킹이 아니라면 사람들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두메산골 중의 두메이다. 마운틴고릴라보다 사람 구경하기가 더 어려운 안갯속의 밀림지대이다.

수도인 킨샤사하고도 수천㎞ 떨어진 동부의 외딴 열대우림 지역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1960년 독립이후 계속된 내전의 중심지여서 그동안 철저히 고립되어 있던 곳이다. 더구나 여행객 납치살해 사건으로 2004년에야 겨우 마운틴고릴라 트레킹이 다시 시작될 정도였으니 주민들이 여행객들을 반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마운틴고릴라가 사는 비룽가 산맥의 이곳 좀바 마을에는 신발을 신은 사람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에티오피아의 시골마을과 같았다. 여인네도 아이들도 모두 맨발로 걷는다. 케냐와 우간다에서는 시골에서도 맨발로 걷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집들도 흙으로 대충 짓거나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풀로 지붕을 이은 초라한 움막집 형태가 대부분이다. 전기가 없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처럼 콩고는 에티오피아와 함께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도 가장 못사는 나라이다.

세계 제1의 공업용 다이아몬드 생산량을 자랑하고 금과 구리, 주석, 우라늄광, 코발트 등의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고무와 커피를 생산하는 콩고민주공화국. 이처럼 천연자원의 혜택을 받고 태어난 콩고가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서구 제국주의의 약탈 때문이다.

콩고의 아픔은 아프리카의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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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고릴라가 있는 비룽가 산맥의 콩고 어린이들. ⓒ 김성호

콩고의 역사는 아프리카의 슬픈 역사의 백과사전이다.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국가를 멋대로 분할한 1885년 독일의 베를린 회의는 바로 벨기에의 콩고 점유문제를 다루기 위한 '콩고회의'였다. 콩고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아프리카 분할은 20여 년 만에 제국주의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졌다.

유럽의 작은 나라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자신의 나라 면적보다 80배나 큰 콩고를 식민지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탐험가인 헨리 스탠리의 콩고 탐사 결과 때문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어용탐험가로 전락한 헨리 스탠리에게 재정적 지원을 하며 콩고를 탐험하도록 한 뒤 1883년 갑자기 콩고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학술적 탐험을 가장했던 스탠리의 콩고 탐사는 벨기에 식민지 건설을 위한 정복탐험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선두로 독일과 스페인·포르투갈·벨기에 등 유럽 제국주의는 '아프리카는 임자 없는 땅'이라고 우기며 마구 삼켜버렸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아프리카 대륙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오직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서로 먼저 차지하려다 보니 강이나 산맥, 인종적인 특성에 따른 국경분할이 아니라 지도 위에다 자를 대고 멋대로 자르는 식이었다. 오늘날 아프리카 국경선이 수천㎞ 이상 곧게 뻗은 직선이 많고, 독립 이후에도 인종 간 갈등 등 내전이 끊이지 않는 중요한 원인이다. 제국주의의 엉터리 아프리카 분할이 국민통합과 국가 정체성 확립, 나아가 전체 아프리카 통합의 걸림돌로 지금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 식민지국가 중에서도 벨기에의 콩고 통치는 악명을 떨쳤다. 천연고무와 상아 등을 착취하는 데 혈안이 된 벨기에는 자신들의 가혹한 통치에 저항하는 콩고 주민들의 손을 자르고 사형에 처했다. 아프리카 반군들이 "선거에서 다른 후보에게 표를 찍었다"며 주민들의 손을 자르는 것은 벨기에 제국주의에서 배운 버릇이다.

벨기에의 가혹한 통치기간 동안 2000만명이던 콩고의 인구는 900만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1000만명 이상이 죽었으니 가히 인종청소라고 해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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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고릴라가 사는 비룽가 산맥에 사는 콩고 가족. ⓒ 로렌스 스미스

폴란드 출신 영국작가인 조셉 콘래드는 벨기에의 콩고 식민정책을 비판한 소설 <어둠의 속(2004. 문예출판사)>에서 제국주의의 실체를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있다. "(유럽국가의) 세계 제패란 대개 피부색이 다르거나 우리보다 좀 코가 납작한 사람들에게서 땅을 빼앗는 것을 의미"한다고.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쓴 <야만의 역사>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이 처음 접촉하면서 '거칠고 짐승 같다' '난폭한 짐승들 같다' '자신들이 사냥하는 짐승들보다 더 야수 같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짐승들이라고 불렸다"고 말했다.

다시 <어둠의 속>에서는 "검은 사하라 사막의 모래알 하나만도 못한 야만인"이라고 아프리카인을 규정한 뒤 "모든 야만인을 절멸시켜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알제리 혁명가인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에서 "서구 제국주의에는 백인을 우등인종으로 흑인을 열등 인종으로 2분법적으로 차별하는 인종주의가 깔려 있다"고 신랄히 비판했다.

다윈이 통곡할 진화론의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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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고릴라 경비초소에 모인 콩고 어린이들과 이탈리아 부인. ⓒ 김성호

이처럼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보면 침략의 전 단계로 자신들을 '문명'으로 규정하고, 다른 식민지국가들은 '야만'으로 낙인찍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에스에서 가장 진화한 것은 백인뿐이라는 오만은 다윈의 진화론을 멋대로 해석한 당연한 결과였다.

다윈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창조론에 입각한 신본주의가 아니라 진화론에 의한 인간 우선의 인본주의(휴머니즘)를 실현하기는커녕,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 자신의 진화론을 제일 먼저 이용했으니.

'문명화'라는 그럴듯한 명분과 함께 당시 제국주의가 휘둘렀던 두 번째 무기는 바로 '자유주의'였다. 이 멋진 '자유주의'라는 말 아래 '자유무역'이라는 음흉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는가.

'자유무역'이란 말이 좋아 그렇지, 실체는 당시 경제적 강자가 된 서구 제국주의가 자기네 경제에 식민지국가를 종속적으로 편입하기 위한 구실로 내세운 미명이었다. '자유무역'은 공정무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명화'와 '자유무역'이란 이름 아래 콩고의 다이아몬드와 금·구리·상아와 고무·커피 등이 소설 <어둠의 속>에 나오는, 콩고 강을 따라 왕래하는 주인공 커츠의 증기선과 바콩고에서 카탕가 지역을 잇는 '구리철도'를 통해 유럽으로 실려 나갔다. 콩고에 남은 것은 중노동과 기아뿐이었다.

우리는 최근 아프리카를 고질적 기아로 몰아넣은 '자유무역'이란 제국주의의 망령을 다시 보고 있다. 이번에는 '신자유주의'라는 그럴 듯한 이름으로 포장하고 나타났다. 이제는 아예 경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시스템까지 자신들의 틀 속에 종속적으로 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총칼 등 무기를 들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100여 년 전에 써먹었던 제국주의의 또 다른 가면놀이이다.

소설 <어둠의 속>에서 아프리카인의 목숨보다 상아를 더 귀하게 여기며 제국주의의 악령이 되었던 주인공 커츠가 현실 속에서는 아직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듯이' 제국주의는 역사에서 늘 멋있는 이름과 가면을 쓰고 나타났다. '문명화'니 '자유무역'이니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콩고 인구 감소를 가져온 공기 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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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룽가 산맥 근처의 콩고 농촌 가옥과 밭. ⓒ 김성호

비룽가 산맥에서 맨발로 살고 있는 콩고주민들을 보면서 고무신발 이야기가 생각났다. 야생고무를 생산하는 콩고가 정작 자신들은 신발이 없어 맨발로 사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아이러니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한 문명의 이기조차도 콩고에서는 고통으로 되돌아왔다는 역사이다.

1839년 미국의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가 생고무에 유황을 넣어 가공하는 가황고무의 발견으로 고무신발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1888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존 던롭(John B. Dunlop)이 발명한 고무 공기 타이어가 자전거 타이어에 이어 자동차 타이어에까지 사용이 확대되면서 고무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현재 굿이어 타이어와 타이어 및 골프용품 회사로 유명한 던롭은 이들 굿이어와 던롭의 이름을 딴 것이다.

고무 수요의 증가는 콩고 강 유역에서 야생고무를 생산하던 콩고 주민들에게는 가혹한 지배로 불똥이 튀었다. 당시 콩고를 사실상 사유지로 소유했던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는 강제로 할당된 고무 채집량을 채우지 못하는 콩고 주민들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등 야만적인 방법을 동원했다. 말 그대로 고무가 사람을 죽였던 시절이었다.

미국과 유럽의 어린이가 고무신발과 고무 공기 타이어를 끼운 자전거를 타고 놀 때 콩고에서는 어른 어린이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물론 고무의 발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이기조차도 제국주의 정책은 다른 사람에게 흉기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콩고는 바로 아프리카의 비극이 시작된 곳이자 비극의 종착역이었다. 과거에는 상아와 고무를 위해 사람이 죽어가야 했으며 끝내는 사람 자체가 노예라는 상품으로 팔려나갔던 곳이다.

독립 이후에는 제국주의 잔재와 냉전시대의 희생양으로 끊임없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고, 반군들의 자금줄인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피묻은 다이아몬드)'로 400만 명 이상이 또다시 죽어가야 했다. 해마다 20억 달러 상당의 다이아몬드를 생산해내는 콩고에서는 6000만 인구의 90%가량이 아직도 절대빈곤에 허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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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룽가 산맥 근처의 콩고 농촌마을의 전통가옥. ⓒ 김성호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체 게바라 #좀바 #마운틴고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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