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차 교사, 명찰달고 학교 다닙니다

태반 학생이 수업 받는 교사 이름 몰라... 어떻게 생각하세요?

등록 2007.06.08 17:15수정 2007.06.0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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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만에 명찰을 달아보니 새로운 마음이 싹틉니다. ⓒ 박병춘

"어? 샘도 명찰 달았다!"
"샘~ 멋져요~!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요! 하하하!"

고등학교 선생 19년째입니다. 20년 전 교생실습 때를 빼면 학생들 앞에서 명찰을 다는 게 공식적으론 처음 있는 일이네요. 복도나 교정에서 부닥치는 학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제 명찰을 봅니다. 물론 일부 동료 교사들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제자에게 명찰 빌린 까닭

저는 한 인문계 고등학교 1학년 담임입니다.

제가 근무하는 학교는 올해부터 교복에 명찰을 꿰매 붙박이용으로 다는 게 아니라 옷핀으로 떼고 달 수 있게 아크릴 명찰을 만들었지요. 그래서 얼마 전 하복에 착용할 명찰을 개인별로 두 개씩 공동구매를 했답니다.

희한하게도 저희 반에 저와 이름이 비슷한 '박병준'이란 학생이 있는데, 이 학생의 별명이 제 이름인 '박병춘'이랍니다. 그래서 이 친구 동복 명찰엔 획 하나가 그어 있어서 담임 이름처럼 불리고 있지요.

아무튼 하복에 착용할 명찰이 도착한 날, 저는 '박병준' 군의 명찰에 획 하나를 더해 '박병춘'을 만들어서 제 옷에 달고 다닙니다. 잠시 빌린 셈인데, 곧 제대로 된 명찰을 하나 장만할 생각입니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으니까요.

"박병춘 선생님이 어떤 분이세요?"

교무실에 심부름을 온 듯한 학생 한 명이 저를 찾습니다.

"응, 난데 왜 그래?"
"어떤 선생님께서 이 서류 주시던데요?"


이 대화를 놓고 저는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아무리 제가 직접 가르치는 학생이 아니라 해도 제 이름과 얼굴 정도는 알고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 아무리 12개 학급 가운데 4개 학급만 수업에 임한다 해도 지난 3월, 1학년 전체 수련회 때 교사별 소개가 있었고, 3개월 이상 같은 학교에서 생활했으므로 제 신상 정도는 알고 있으려니 판단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심부름을 보낸 교사의 이름마저 학생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그 학생은 송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심부름을 했던 것이지요.

명찰 달고보니, 교생으로 돌아간 새 마음

그래서 명찰을 달게 되었는데 막상 달고 나니 의외의 성과가 눈에 띕니다.

묘한 일입니다. 명찰을 달고부터 생활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명찰을 달고 교실에 들어서던 첫째 날, 학생들이 명찰을 단 선생을 보고 무척이나 신기해하고 술렁거렸습니다. 그러면서 '왜 명찰을 달았느냐'고 물어서 그냥 쉽게 대답했습니다.

"교생 실습하는 기분으로 새롭게 출발하려고 그래~!"
"캬캬캬, 엊그제 교감 선생님이 오늘은 교생이 되셨네요!"


넉살 좋은 녀석들이 너스레를 떱니다. 얼마 전에 반백발을 까맣게 염색한 데다 명찰까지 달았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뭐야, 이 넘아! 내가 그렇게 나이가 들어보였단 말여?"
"헤헤헤, 아무튼 선생님! 신선하네요~!"


신기합니다. 명찰 달기 열흘째, 아침에 출근하여 명찰을 달 때마다 경건해집니다. 이름 석자를 걸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새롭게 다짐하며 짧은 시간이지만 엄숙해집니다.

5년 전 일입니다. 두 명의 제자가 학교에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 두 명은 선후배 사이였는데 함께 작곡하는 일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저와 그 중 한 명은 평소에도 교류가 있어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은 졸업하고 나서 몇 년이 흘러 아주 어렴풋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그 제자가 대뜸 묻는 말이 '선생님, 혹시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였습니다. 순간 당황한 저는 오감을 총동원해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그리곤 운이 좋게도(?) 정확하게 이름을 알아맞혔습니다.

이후 스승의 날을 맞아 아주 근사한 화분 하나를 배달 받았는데, 그 화분 안에 쪽지가 한 통 들어 있었습니다. 그 요지는 '학창시절에 이름을 기억해준 선생님을 딱 한 분 만났습니다, 감사합니다'였습니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승이 되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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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병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전문


존재하는 것에 이름을 붙여 의미가 있듯이 우리 사람들에게도 제각각 이름이 있어 의미가 있겠지요.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이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도 서로의 이름을 모른 채 생활한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저는 수업 중에 학생의 이름을 많이 부를수록 좋은 수업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명찰이 없는 학생은 당연히 수업 참여에 소홀하게 됩니다. 물론 생활 규정에 따라 잔소리를 들어야 하겠지요. 물론 우리 교사들이 좀 어렵더라도 학생의 이름을 외워야 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지만 말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교사들을 만나 생활한 지 3개월이 지난 고1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기! 현재 여러분 교실에 들어와 수업하는 선생님 가운데 어느 한 분의 성함이라도 정확하게 기억 못하고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결과가 어땠을까요? 3분의 2 이상이나 되는 학생들이 손을 듭니다. 결국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른 채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우리 교사들이 새로운 학생들을 만날 때 그 첫 시간은 반드시 이름을 소개하고 강의 계획 등을 말하게 되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일부 교사의 이름도 모른 채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선생님들도 명찰을 달았으면 좋겠어요!"

설문을 끝낸 제게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제안합니다. 꼭 교실에 들어오는 교과 담당 교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교사들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학생들의 욕구가 넘칩니다. '홈페이지 교직원 소개란을 참고하면 될 것이다'라는 제안에 그래도 명찰이 있으면 훨씬 낫다는 게 학생들의 바람입니다.

제 이름 걸고 제자들 가르칩니다

과연 다른 학교도 그럴까요? 인근 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두 분 교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학생들이 자신의 학급 수업에 임하는 교사 이름을 모두 알고 있는지 표집 조사를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개 학교도 마찬가지 결과였습니다. 고학년일수록 교사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 고교 1학년의 경우 10명 정도의 학생들만 다 기억한다고 답변했습니다. 조사를 마친 교사 자신도 무척 놀랐다고 합니다.

S여고의 한 교사는 "학생들에게 교무실에 있는 내 자리를 반드시 알게 하고, 교사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게 반복 훈련을 한다"고 말합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게 하더라도 입시 준비에 몰두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망각하는 건 아닌지 떨떠름합니다.

그러니 한 울타리 안에서 생활하면서 수업에 들어가지 않는 교사의 이름을 학생들이 기억한다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 됩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름을 꼭 기억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공간인 교육 현장에서조차 학생이 교사의 이름을 모르고 지나친다는 것은 결코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졸업한 지 여러 해가 지나 동창회다, 반창회다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이름으로 기억하는 선생님도 많지만 이름을 몰라 별명으로 대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름이나 별명도 몰라 어렵사리 인상착의로 대화하는 경우도 많지요. 나를 가르친 선생님 이름과 내가 가르친 제자 이름을 단단히 기억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사제지간 정을 돈돈히 하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우리 교단에서 교사의 명찰 달기는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사 #학생 #명찰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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