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고인들 얼굴에서 만난 체 게바라

[내가 만난 아프리카 31] 아프리카 곳곳에 살아 있는 게바라의 모습

등록 2007.06.09 21:41수정 2007.06.09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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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밭으로 개간된 비룽가 산맥의 산. ⓒ 김성호

인류 역사상 최악의 약탈과 착취가 행해지던 콩고에 체 게바라가 나타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모든 인간 해방을 위한 혁명가가 되고자 했던 체 게바라. 그는 1965년 3월 쿠바의 장관직을 버리고 카키색 군복을 입고 콩고민주공화국에 홀연 나타났다. 쿠바의 흑인병사 100여 명과 함께.

게바라는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라며 아프리카 대륙으로 날아온 것이다. "우리는 이론을 만들지 말아야 하며,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행동"이라는 그의 말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체 게바라가 콩고에 나타난 이유는

게바라가 콩고에 첫발을 디뎌 게릴라 활동을 한 곳 역시 바로 마운틴고릴라가 있는 비룽가 국립공원에서 남쪽으로 수백㎞ 떨어진 같은 키부주의 유비라.

유비라는 탕가니카 호수의 최북단 부룬디와의 국경지대에 있는 지역이다. 쿠바에서 출발한 게바라의 혁명군은 비행기를 타고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한 뒤 탕가니카 호수 근처의 키고마를 거쳐 호수를 건너 유비라에 도착했다.

게바라가 쿠바에 이어 콩고를 제2의 혁명기지로 생각한 것은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우던 콩고의 독립영웅인 초대 총리 파트리스 루뭄바가 1961년 1월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콩고를 '아프리카의 베트남'으로 만들고자 투쟁했던 루뭄바는 모이세 촘베, 조제프 모부투 등 우익 군부세력이 일으킨 쿠데타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 쿠데타는 벨기에와 영국·미국의 지원을 받았다.

루뭄바의 고문으로 아프리카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프란츠 파농도 "식민주의가 살인을 주저한 적은 결코 없었다"며 루뭄바의 죽음에 대해 아프리카의 저항을 촉구했다.

같은 의사로서 인간해방과 아프리카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프란츠 파농은 '아프리카의 게바라'로 불린다. 프란츠 파농이 루뭄바가 살해된 그해 12월 백혈병으로 죽지 않았다면 아마도 게바라와 함께 콩고 혁명을 위해 함께 싸웠을지도 모른다. 파농 역시 36세의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귀여운 아기'라는 말을 듣고싶었던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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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밀림에서 단파 수신기를 듣고 있는 체 게바라(맨오른쪽) ⓒ 위키피디아

게바라의 혁명군에는 수천 명의 콩고인과 르완다인이 함께 했으나 결국 혁명을 완수하지 못하고 1년여 만인 1966년 3월 게바라는 아프리카를 떠나야 했다. 가장 사랑하던 어머니마저 콩고에 머물던 1965년 8월 잃은 그였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던 게바라는 콩고의 정글 속에서 가벼운 탱고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게바라는 어린이로 돌아갔다. 게바라는 콩고의 밀림에서 자신의 노트에 쓴 <돌>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어머니가 나타나서 그녀의 앙상한 무릎 위에 나를 쉬게 해주고, 그 인자한 목소리로 '내 귀여운 아기'라고 부르면…… 나는 기분이 좋아지고, 아이가 된 것 같고, 그리고 강해진 것처럼 느껴질 것"이라고 썼다.

어머니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내 귀여운 아기"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게바라도 우리와 똑같은 어머니의 아들이자 인간이었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다. 게바라에게도, 평범한 우리에게도 똑같이 위대한 존재는 바로 어머니이다. 살아가면서 어머니를 잃는 것만큼 큰 고독은 없다.

여든이 다 된 나의 어머니도 자정이 되어 늦게 돌아온 나를 보면 늘 이름을 부르고는 "배고픈데 라면 끓여줄까"라고 말한다. 어머니에게 나는 아직도 라면을 허겁지겁 먹고는 마치 세상의 행복을 다 가진 듯 만족해하던 어린아이일 뿐이다.

게바라는 콩고의 밀림 속에서도 쿠바의 산악에서도 볼리비아의 정글 속에서도 늘 책을 곁에 끼고 다니던 지독한 독서광이자 자신의 노트에 매일 매일의 삶과 생각을 기록한 기록광이었다. 1967년 10월 게바라가 볼리비아 산악에서 총살당해 죽을 때 그의 짐 꾸러미에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송가(Ode)>와 노트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사랑이 없는 혁명은 잔혹한 폭력일 뿐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휴머니스트였다. 총을 든 게바라에게서 잔혹함 보다는 따뜻한 인간미가 느껴지는 것은 시를 사랑하고 독서를 통한 수양과 자신의 삶에 대한 매일 매일의 기록을 통한 성찰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현대사를 통해 혁명가를 자처했던 수많은 권력자들에게서는 왠지 폭력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게바라의 혁명은 '타잔놀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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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밀림에서 콩고혁명군에게 게릴라 전술을 강의하는 체 게바라(가운데) ⓒ 위키피디아

게바라가 콩고의 혁명진지를 구축한 탕가니카 호의 유비라에서 키부 산맥과 키부호, 비룽가 산맥에 이르는 지역은 모두 키부주에 속하는 산악지대로 마운틴고릴라가 살 정도로 험한 산과 짙은 안개로 게릴라전의 최적지로 꼽힌다. 최근까지도 콩고의 반군과 주변 르완다 및 우간다의 반군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게바라는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을 성공시켰던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의 추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산맥이라고 해서 중남미와 아프리카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게바라의 콩고 혁명은 아프리카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이상적인 국제 혁명주의의 맹신이 초래한 오류였다. 콩고의 반군지도자들의 분열과 다양한 부족 간의 갈등, 언어와 문화의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은 모험이었다.

1965년 2월 이집트 나세르 대통령은 카이로를 방문한 게바라에게 "흑인들 사이에서 흑인들을 지도하고 보호하는 백인이 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는 타잔놀이에 불과하다"며 우려했다.

콩고를 떠난 게바라는 그해 12월 볼리비아로 다시 혁명 여행을 떠났고,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에서 최후를 마쳤다.

아프리카 곳곳에 살아 있는 게바라의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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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고 국경 입구의 부나가나 마을의 어린이들 ⓒ 김성호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막론하고 새로운 전장에서 민중의 혁명정신을 늘 간직할 것"이라던 그의 꿈은 32년 만에 이뤄지게 된다. 1997년 5월 콩고의 독재자 모부투를 몰아낸 반군지도자 로랑 카빌라가 게바라 혁명군과 함께 싸웠던 인물이다.

1963년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의 인종차별 정책 반대 연설에 감명받았던 게바라는 콩고 혁명에 몰두하고 있던 1965년 8월 탕가니카 호수 탄자니아 쪽에서 당시 만델라의 부인이었던 위니 만델라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를 감옥에 있던 넬슨 만델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면서 연대의사를 밝혔다. 게바라는 남아공의 흑백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도 저항했다.

현실 사회주의 국가는 이미 망했고, 게바라가 죽은 지 올해로 40년이 되었지만 게바라는 여전히 세계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그의 삶에는 이념을 뛰어넘고 권력을 탐하지 않는 인간해방과 자유를 갈구하는 순수함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23살의 젊은 나이에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여행을 하면서 가졌던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혁명가가 되겠다'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게바라의 남미 여행을 '세상을 바꾼 여행'이라고 한다. 여행은 한 인간의 삶뿐 아니라 세계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 혁명을 꿈꾸지 않는 자는 젊은이가 아니듯이 여행을 하지 않는 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는 법. 여행을 하지 않고서는 인류의 모순과 세상 민중의 삶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바라의 모습은 아프리카 곳곳에 살아 있었다. 내전과 기아 속에서도 마운틴고릴라와 함께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비룽가 산맥의 콩고인들의 얼굴에서 나는 결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게바라의 모습을 보았다.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의 젊은이들의 티셔츠에 그려진 검은 베레모의 게바라의 사진에서는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살아있는 모습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카리브 식당의 홍보물에 등장한 게바라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최고의 살아 있는 광고였다.

게바라는 죽어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인간이다. "억압하는 모든 것에 저항하라"는 그의 마지막 지령은 아프리카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지상명령이었다.

여자들이 주로 일하는 바트와 피그미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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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두라는 이름의 나무로 만든 콩고의 수레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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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룽가 산맥 중턱에 있는 마운틴고릴라 경비초소. ⓒ 로렌스 스미스

오후 1시 30분 우리는 경비초소를 내려왔다. 차 안에서 미리 준비해간 햄버거와 삶은 계란 등 도시락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니 도로를 제외하고는 온통 밭으로 개간이 되어 있었다. 계곡에서 시작된 계단식 밭은 정말 산 정상까지 타고 올라갔다.

식량이 부족하다 보니 푸른 나무로 뒤덮여야 할 산이 온통 옥수수와 기장 등을 심는 밭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인간의 영역이 넓어지면 그만큼 마운틴고릴라의 살 공간은 줄어든다. 마운틴고릴라는 산림훼손과 내전, 밀렵으로 점점 살아가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주로 키가 작은 바트와(Batwa) 피그미이다. 바트와는 앨버트 호수 북동부에 사는 음부티(Mbuti)와 함께 대표적인 콩고의 피그미족이다. 아프리카 피그미는 주로 콩고와 우간다 국경지역에 살고 있다.

피그미족에게는 여자가 남자보다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전통이 있다. 실제 밭에서 일하는 주민들은 주로 여자들이었고, 남자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옛날 남자들은 주로 사냥을 했는데, 지금은 동물보호 정책에 의해 수렵이 금지되다 보니 남자들의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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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룽가 근처의 콩고 전통가옥에 몰려든 주민들(가운테 키 작은 남자가 부족장) ⓒ 김성호

산길에서 내려온 뒤 평지에 도착해 전형적인 농촌마을의 전통가옥을 방문했다. 콩고의 진짜 농촌 모습을 보고 싶었다. 도로에서 2㎞ 정도 안으로 들어가자 전통가옥들이 있었다. 길옆의 도로 팻말에는 '좀바 관광지(Site Touriste de Jomba)'라는 프랑스어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전통가옥 마을에 도착하자 어른과 어린이 등 마을주민 20여 명이 몰려들었다. 마을의 최고 어른으로 키가 작은, 나이 든 추장격의 부족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 노인은 마을의 이름을 "세뤼방자(Serubanza) 지역의 샹쥬(Chanzu) 마을"이라고 설명했다.

집이라고 해야 나무로 대강 기둥을 세운 뒤에 갈대 잎을 얹어 지붕을 이은 둥그런 형태인데, 소나 양들의 가축우리라고 해야 할 정도로 초라한 집이다. 전통가옥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 나무기둥으로 3곳의 공간을 만들어 부부방, 어린이방으로 구별하고 옆에는 별도로 음식과 곡식을 놓는 창고를 따로 만들어 놓았다.

전통가옥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느낌이다. 조금 전 '호기심 반 환영 반' 우리를 반기는 표정이었던 마을 주민들의 얼굴도 불쾌한 표정을 넘어 험악한 인상으로 변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미 이탈리아인 사르비아 부부를 빙 둘러싸고 뭔 일을 낼 듯 위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항상 유쾌하던 부인 사르비아의 얼굴 표정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됐나보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마을 주민들이 전통가옥의 사진을 찍었다고 트집을 잡아 돈을 더 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우리는 마을의 부족장과 합의해 전통가옥 입장료로 모두 2200 우간다실링(1100원)을 주었다. 우리 차량의 운전자가 마을 부족장과 잘 타협해 약간의 웃돈을 주고 간신히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웃돈을 달라는 억지는 상습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길거리에는 나무로 만든 두 바퀴의 수레가 놓여 있었다. 지프차 운전사는 앞뒤에 하나씩 바퀴가 달린 수레를 "키쿠두"라고 말했다. 흙길인데다 오르막이 많은 험한 길이다 보니 나무로 만든 수레가 교통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가난한 주민들은 키쿠두에 곡식과 물건을 가득 싣고 앞뒤에서 끌고 밀어가고 있었다.

"콩고 국기, 함부로 찍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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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국기를 찍었다고 국경수비대원들이 문제삼았던 콩고 국기. ⓒ 김성호

콩고 국경 사무소에 도착해서도 사진 때문에 또 다른 곡절이 있었다. 이번에는 나와 같이 간 뉴질랜드 여행객 로렌스가 곤욕을 치러야 했다. 출국 수속을 받던 중 로렌스가 도로 한가운데 국기 게양대에 걸려 있는 콩고 국기를 카메라로 찍은 것이 문제가 된 것.

내가 먼저 국기를 찍을 때는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던 콩고 국경수비대원들이 로렌스가 사진을 찍자 수비대초소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수비대 책임자는 화가 난 표정으로 프랑스어로 위압적으로 말하며 로렌스의 디지털 카메라를 빼앗아 일일이 확인했다.

20여 분 실랑이를 벌이다 로렌스는 풀려났다. 길거리에 높이 올려진 국기를 찍는 것이 군사기밀도 아니고 무슨 잘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탈리아 부부와 뉴질랜드 여행객에 대한 현지인들의 태도를 보면서 백인을 나타내는 음중구(Mzungu)에 대한 적대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출국 수속을 거의 마칠 무렵 갑자기 스콜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화산지대인데다 열대우림의 정글이다 보니 수시로 굵은 빗줄기가 내린다. 우리는 소나기를 피해 급히 큰 나무 밑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소나기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콩고민주공화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외국인에 대한 주민들의 순수함과 군인들의 적대감, 마운틴고릴라의 평화와 사회적 불안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 #체 게바라 #좀바 #마운틴고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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