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지역 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20년전의 역사적 흔적들을 기록과 사진으로 정리하고 평가한다

등록 2007.06.10 19:50수정 2007.06.11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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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군포·의왕지역 87년 6월 항쟁 기념사진전 중에서 ⓒ 기념사업추진위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전국적으로 역사정리 작업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경기도 안양권(안양·군포·의왕)에서도 당시의 활동을 정리하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지난 1월 10일 안양 전진상복지관에서의 1차 좌담회를 시작으로 증언과 인터뷰를 통해 구체적인 역사 정리가 시도 중이다.

6월 민주화항쟁 20주년 안양·군포·의왕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이하 안양권 기념사업추진위)는 안양권 87년 6월 항쟁 20년을 준비하면서 87년 이전의 상황과 활동을 비롯해 6월 항쟁기간의 시위과정, 6월 항쟁의 성과 등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계획으로 그동안 사진과 기록물 등 관련 자료 수집에 나서왔다.

이를 위해 오는 26일 오후 7시 6월 항쟁 역사의 현장 (구)안양경찰서에서 '6월 민주항쟁 기념 토론회'를 개최해 안양권에서의 민주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의 기록들을 발표하고 이를 토대로 지역에서의 역사 흔적들을 평가하고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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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안양시 도심 중앙로 거리를 점거한 시위 ⓒ 기념사업추진위

안양권 기념사업추진위는 안양권에서 사회운동이 시작된 시점을 1985년 중반 이후로 정의되고 있다. 당시는 전두환 독재체제를 타도를 위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던 시기였다.

안양권은 1980년 초반 안양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에서의 JOC(가톨릭노동청년회) 교육과 노동상담 및 교육, 공간대여를 통한 일부 합법적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1984년 말∼1985년 이후 사업장 중심 노동활동가들에 의해 단위 사업장에서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

1985년부터 노동상담소와 민중교회(한무리·돌샘교회)가 공개적인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으며, 사업장에서 적발돼 해고당하기 시작한 활동가들은 대부분 보안유지를 위해 써클 형태로 또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운동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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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근로자회관(현 전진상복지관) 강당에서의 노조 결성식. ⓒ 기념사업추진위

안양지역에서의 87년 6월 항쟁

안양에서는 6월 항쟁 기간 6월 19일, 6월 23일, 6월 26일 모두 세 차례의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6월 19일과 6월 26일 집회는 안양권역의 노동운동 그룹이 공동으로 준비하여 개최된 집회였고, 6월 23일 시위는 경기대와 한신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되었다.

6월 항쟁 당시 초기 안양에서는 이렇다 할 집회와 시위가 없어 경찰 병력이 전부 서울로 차출되던 상황이었는데, 이는 집회 성공의 주요 요인이다. 시민의 호응이 좋아 집회는 활기가 있었는데 안양의 경우 다른 지역과 달리 시민들의 자발적인 투쟁분위기가 주도해 갔었다.

안양에서의 첫 대중 집회인 6월 19일 집회에 대해 시사월간지 <말>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9시 30분경, 1만여 명의 시민들이 도로에 앉아 대중 집회가 시작됐다. … 약 2시간 가까이 집회가 계속된 후 시위 초기에 잡혀간 사람들을 구출하자는 주장이 터져 나왔고 마침내 전경대에 달려들어 투구와 방패를 빼앗는 등 몸싸움이 벌어졌다." - 198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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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안양지역에 뿌려졌던 각종 유인물들 ⓒ 최병렬

6월 23일 집회는 조직적이었다. 안양 중앙시장을 돌면서 동참자를 모으고 시위가 시작되자 학생들이 한 줄로 서서 중앙로에서 한신대 경기대 학생 2백여 명과 시민 1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 집회는 약 3시간가량 계속됐으며, 밤 10시경 경찰의 최루탄 발사로 해산됐다.

6월 26일 집회는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6·26 민주헌법 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 맞물려 무려 2만 명의 시민들이 안양 1번가에서 우체국에 이르는 거리를 가득 메웠고, 만안구청을 지나 (구)안양경찰서 앞까지 행진하면서 모든 차량이 끊긴 일종의 '해방의 거리'로 만들었다.

당시 전국적인 집회가 열리면서 안양 경찰 병력이 서울과 수원으로 출동하면서 안양에는 최소한의 경찰 병력만 남은 상태였다. 밤 9시경 현 삼원극장 앞 중앙로에 소수의 시위대가 들어서자 인도에 있던 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이를 환영하며 집회가 본격화되기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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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제지 노조 결성 등 노동자 대투쟁의 분출 ⓒ 기념사업추진위

밤 10시 30분경 시민들이 전투경찰을 무장해제시키자며 전경대열에 돌격을 감행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으나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놀란 전경들은 도망을 쳤고, 성난 시위군중들은 "민정당사로 가자"고 외치면서 행진으로 바뀌었다.

투석과 화염병 세례에 안양시 안양4동 중앙로 옆에 자리했던 민정당 안양지구당사가 불타고 맞은편의 경찰 초소가 불길에 휩싸였다. 미국계 은행인 한미은행에 돌이 날아갔으며, "시청으로 가자"는 함성과 함께 거대한 인파는 서안양우체국을 거쳐 안양8동으로 이어졌다.

시위대는 삽시간에 안양시청(현 만안구청)을 에워쌌다. 당시 시청 마당에는 공무원들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철문을 굳게 잠그고 있는 상태로 시위대 일부가 철문을 흔들고 돌멩이도 던졌다. 그러나 일부 시민들이 "여기는 시청이다. 안양경찰서 가자"는 외침과 함께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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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당시 노동자 투쟁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유인물 ⓒ 기념사업추진위

안양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노동부 안양출장소를 향해 화염병을 던져 불태워졌으며 밤 11시 20분경 시위대는 안양경찰서에 육박하면서 경찰과의 본격적인 대치와 충돌이 발생하면서 다수 부상자도 속출했다. 그러나 경찰서 벽돌담을 넘어뜨리고 경찰서 관내에 있던 관사가 불탔다.

당시 시간은 새벽 2시경으로 안양경찰서가 함락될 상황에 다급해진 경찰은 각지에서 지원병력을 급파하고 나섰다.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며 시위대는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새벽 2시 30분경 이들 시위대는 안양세무서 뒷길과 만안로를 우회하여 다시 안양역으로 재차 집결했다.

이들은 경찰의 저지를 뚫고 역전파출소를 불태웠으며 옆 상가로 불길이 번지려 하자 소화기를 찾아 진화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대다수의 시민들이 귀가했음에도 200∼300명의 시민은 중앙시장으로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며 새벽 4시까지 산발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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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점거하고 장기 농성에 들어간 안양전자 노동조합 ⓒ 기념사업추진위

노동자 대투쟁과 다양한 공개 사회운동 확산

안양권에서의 87년 6월 항쟁은 곧바로 사업장에서의 노조설립과 근무조건 개선을 위한 파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7·8·9 노동자대투쟁과 연계되어 한 묶음으로 진행되고, 다양한 문화운동을 꽃피우면서 안양지역의 사회운동이 만개하는 시기가 열리는 촉진제였다.

87년 7월 27일 한국제지를 시작으로 봇물 터지듯 분출되기 시작한 노조결성과 어용노조민주화 투쟁은 만도기계, 태광산업, 삼덕제지, 대우중공업, 경원제지, 유신중전기, 금성전선, (주)농심, 안양전자, 다우전자 등 안양권역 거의 모든 사업장으로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근로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 "흩어지면 노예되고 뭉치면 인간된다", "8시간 노동으로 생계비 보장받자" 등의 공통된 플래카드가 각 사업장마다 내걸리고 난생처음 해보는 파업은 훌륭한 민주주의의 학교로 자주적 인간으로 당당한 역사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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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사랑동우회 '우리그림'의 걸개그림 ⓒ 기념사업추진위

현장에서의 노동운동이 노조설립 등으로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현장활동가들은 안양지역노동자회를 결성하게 되었다. 안양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출범하였고 안양노동자회가 결성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민민운동) 단체들이 조직, 결성되고 확대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와 함께 1987년 하반기부터 안양독서회, 안양민요연구회, 우리그림 등의 문화단체가 창립되어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면서 1988년에는 이들이 연대체로 결성하여 안양문화운동연합으로 발전하면서 안양권에서의 문화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꽃피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교회권도 경서EYC 경서목정평을 중심의 활동이 대통령선거 시기에 민주쟁취 경서지역 기독교공대위를 통해 공정선거감시운동으로 발전하고, 박달교회, 살림교회, 우리교회 등 민중교회가 창립되면서 1988년에는 '안양지역민중교회협의회'라는 연대기구체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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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웧 민주항쟁 지역운동 사료 정리를 위한 모임 ⓒ 최병렬

한편 안양권 기념사업추진위는 "그날의 함성은 끝나지 않았다"며 "우리는 20년 전 6월의 그 뜨거웠던 함성이 과거의 함성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안양·군포·의왕 시민 여러분과 함께하는 끝나지 않은 노래이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사료 정리에 나선 안양권 기념사업추진위의 이대수 공동대표는 "평소 민주화의 구심점이 없어 잠들어 있던 안양시민들은 한번 불이 당겨지자 폭발적인 호응으로 어느 곳보다 뜨거운 것이었다"며 "시민들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었는가를 보여준 시위며 집회였다"고 평가했다.

또 이 공동대표는 "정리한 사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보내 책으로 출판될 예정으로 본의 아니게 사실을 왜곡할 수 있어 조심스럽다"며 "잠들어 있는 자료들을 앞으로 더 찾아야 하고 안양권 기념사업추진위가 행사만이 아니라 지속적인 기념사업을 전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역에서 전개된 6월 항쟁 및 노동자 대투쟁 사진 자료를 정리해 사진전을 기획한 박찬응 집행위원(아침 미디어 대표)은 "이시정, 권태인, 최봉식, 전순철, 이영희, 사춘식, 이억배, 이대수, 최병렬 등 그나마 귀한 자료를 보관했던 이들이 있어 전시가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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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사업추진위가 6월 항쟁 20년을 맞아 시민에게 배포한 유인물 ⓒ 최병렬

덧붙이는 글 | 최병렬 기자는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최병렬 기자는 안양지역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안양 #군포 #아침미디어 #6월 민주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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