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유토피아' 과연 어디가 이상향일까

독재 국가와 전쟁 옹호한 ‘유토피아’, 현대 미국과 통해

등록 2007.06.29 10:19수정 2007.07.01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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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우리가 마음의 양식으로 삼아온 로마의 전통 신들을 그대로 두십시오. 많은 사람의 마음의 양식이 하나의 신에 대한 신앙에만 집약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별 아래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은 하늘의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같은 우주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밑에서 살아가는 개개인이 의지하는 지주가 달라도,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겠습니까. 그렇게 큰 삶의 비밀을 풀어주는 길이 단 하나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승리의 여신상을 철거했을 때, 수도장관인 심마쿠스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많은 부분에서 감동을 받았지만, 14권에 나오는 심마쿠스의 글을 읽을 때는 코끝이 시큰했다. '관용'의 정신으로 살아오던 로마인들이 종교적인 폐쇄성으로 무장하고 종말을 향해 가는 것이 안타깝고 괴로웠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떠올렸다. 로마가 멸망하고(서로마제국을 기준으로) 천년 후, 영국에서 살았던 토마스 모어가 꿈 꾼 이상 사회와 실제로 존재했던 과거의 로마 사회를 비교하는 게 재미있었다.

토마스 모어의 머릿 속 국가와 실제 로마의 차이

실제의 로마는 제국이고, 가상의 유토피아는 작은 섬에 불과한 나라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는 유사하다. 두 나라 모두 선거로 대표자를 뽑고 지방자치를 인정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농업에 기반을 둔 국가였다는 점도 그렇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은 농업에 종사했다. 그러나 제1차 포에니 전쟁 후, 속주가 된 시칠리아에서 들어온 다량의 밀이 소규모 자작농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기사 계급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토지에 투자하여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다.

유토피아에서는 사유재산이 없기 때문에 대토지 소유는 불가능하다. 또한 모든 주민이 공동으로 적절한 시간동안 노동에 종사하고, 균등하게 물자가 배분되기 때문에 거지나 빈곤층이 없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애초부터 사유재산을 금지한 것이 바람직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국가이고, 로마는 실제로 존재했다.

로마와 유토피아의 차이는 전쟁이나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전쟁은 원로원 계급으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힘을 합쳐 스스로 해냈다. 처음에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 후에는 방위선을 굳건히 하여 주변의 속주와 동맹국을 지키는 제국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그러나 유토피아인들은 전쟁에서 자국민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돈을 주고 주변국에서 용병을 산다.

로마와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도 자신들의 우방을 침략하는 경우에는 전쟁을 한다. 유토피아에서는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독재 국가와의 전쟁을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는 전제군주정인 페르시아와의 전쟁도 필요한 경우에만 수행했다. 로마도 공화정을 거쳐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 되었지만, 군주가 절대 권력을 가진 동방의 국가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로마 황제들은 늘 원로원이나 군단병, 그리고 시민들의 여론을 살펴야 했다. 로마는 자신들의 통치 방식을 다른 국가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후, 자신들을 변호한 항목 중 하나가 '독재자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독재국가는 바람직하지 않으므로 자신들이 개입해서라도 바꾸어야 한다는 유토피아의 논리와 통한다. 그런데 과연, 억압받는 민중을 구하고 산뜻하게 물러나며 자신들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그런 멋진 나라가 있을까? 아니, 인간의 본성이나 정치권력의 속성으로 볼 때 그것이 가능할까?

물론 '이 세상에 없는 나라'인 유토피아는 독재로부터 한 국가를 구해주어도 자신들의 이익은 전혀 챙기지 않는다. 현대의 미국과는 달리, 그들이 싸운 이유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로마처럼, 자신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조선을 보호하고 근대화한다는 명목으로 36년 동안 자신들의 방식대로 지배한 일본도, 이런저런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도, 과거의 로마 제국보다 훨씬 '야만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로마가 망한 이유는 '관용'의 정신 잃었기 때문

유토피아의 헌법에서 가장 오래된 원칙은 종교적 관용이다. 유토피아를 세운 유토포스가 유토피아를 정복한 후, 신앙의 자유를 보장했다. 합리적인 토론은 인정했지만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했다. 상당히 많은 유토피아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해서 '현명한 견해'인 기독교를 믿고 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에서는 신앙의 문제로 처벌을 받는 일은 없다.

로마도 그랬다.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부터 밀라노 칙령이 내려진 313년까지는. 물론 네로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처럼 기독교도들을 박해한 황제들도 있었지만, 다신교인 로마인들은 타인의 종교를 그대로 인정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의 기독교인들과는 달리 로마의 기독교인들은 다신교를 인정도 하지 않았고, 용납도 하지 않았다. 권력이 자신들의 편이 되자 다신교를 억압하고 몰아냈다. 토마스 모어는 중세 이후의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이미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권에서 기득권으로 바꾸어 버린 것과 문관과 무관이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 것을 로마의 군사력이 쇠퇴한 이유로 들었다.

로마는 멸망했다. 물론 군사력이 쇠퇴하여 '대이동'하는 야만족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로마가 멸망한 근본적인 이유는, 가장 로마인다운 미덕인 '관용'의 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자리를 '신앙'이라는 이름의 배타와 독선에 내주어버렸기 때문이다. 다양성을 파괴하고 하나만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의 공존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의 로마인들, 작가가 '진정한 로마인'이라고 누누이 강조한 그 로마인들이 가졌던 '관용(clementia)'은 나 자신도 인간으로서 꼭 지니고 싶은 미덕이다. '신에게 자신들의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로마인들은, 타인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신도 판단했다. 그래서 공정했고, 자신을 포용하듯 타인도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역할을 신에게 맡겨버린 후,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는 정신을 버렸다. 판단이 필요 없어진 이상, 합리적으로 사고할 필요도 없어진 것이다. '관용'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종교적 판단에 의한 독선과, 이해와 배려가 없는 비판의 세계이다. 이것이 중세로 이어진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 유머와 재치가 큰 미덕

<로마인 이야기>의 매력은 역시 멋진 인물이 수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그라쿠스 형제, 코르넬리아, 티베리우스 황제 등 많은 로마인을 흠모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최후의 로마인'이라고 불린 스틸리코 장군에게선 이순신 장군을 떠올렸다. 뛰어난 능력과 사고의 깊이가 있었지만, '군주'라는 이름의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인물과 권력층의 암투와 시기를 견뎌야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아주 비슷하다.

자신이 거느린 군사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을 따르며, 조국의 위기 앞에서는 명예도 버릴 수 있는 충신이었지만, 정작 주군으로 받들고 있는 인물들은 그들을 이용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것도 똑같다. 이런 인물들을 접할 때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너무나 소박한, 얕은 인간으로서의 질문이 탄성처럼 흘러나온다.

'왜, 그렇게 고생하며 충성하는 데도 몰라주는 걸까? 그런데도 왜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걸까? 차라리 조금만 덜 고상하고, 조금만 덜 고지식하지!'

이제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이 책의 미덕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나는 이 책의 미덕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로마인 이야기>의 가장 큰 미덕은 '생생함'이다. 내 머릿속의 로마 황제나 원로원 귀족들, 호민관이나 장군들은 그야말로 동상처럼 굳어있고 죽어버린, 이름뿐인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들은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작가의 손에 의해, 죽은 사람들이 로마의 땅과 함께 살아난 것이다.

두 번째는, 1권에서 15권까지 종종 밑줄을 긋게 만들었던, 인간 품성이나 상황에 관한 흥미로운 정의들이다. 때로는 동의하며 때로는 의구심을 품고 읽는 동안, 인간에 대한-특히 로마인에 대한-작가의 관심과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구절이 있지만, 몇 구절만 예를 들어 보겠다.

"고령자라서 완고한 것은 아니다. 성공자이기 때문에 완고한 사람은 변혁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되어도, 성공으로 얻은 자신감 때문에 다른 길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진다."(2권. 298쪽)>

"졸속을 싫어한다는 것은 서두르는 것이 적절치 않을 때 아예 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런 시기에도 걸음은 착실히 내딛는다는 뜻이다."(13권. 253쪽)

"음모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살아가려면 뜻밖에도 교활하게 굴기보다 당당하게 정면 돌파하는 편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14권. 129쪽)


세 번째 미덕은 흥미진진한 전개 방식이다. 물론 연대기 순으로 사실을 나열해갔지만, 앞으로 있을 사건을 슬쩍 내비치는 한 줄의 글 때문에 바싹 긴장하며 읽게 되는 것이 큰 재미였다. 더불어, 깔깔거리게 만드는 유머와 재치가 담긴 표현들도 이 책이 가진 큰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역시 작가의 화려한 글 솜씨 덕분이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심각하게 읽던 15권에서조차도 깔깔 웃었던 부분이 있다.

"다음 황제는 곧 정해졌다. 리비우스 세베루스라는 남자인데, 궁정관료의 좌장격이었던 리키메르의 꼭두각시여서 4년의 치세 동안 무엇을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아마 아무 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 웃었는지 모르지만, 난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올 때마다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제국주의 인정, 민중 이야기 제외 등 아쉬워

깊은 감동을 받으며 <로마인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래도 나로서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글 전체의 분위기가 제국주의에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7권에서 마키아벨리를 인용하며, '인류의 역사는 곧 침략의 역사이기 때문에 침략은 무조건 나쁘다는 식의 이상주의를 배제'하고, '이것이 현실이라면, 악행에 따른 폐해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인간의 지혜를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표현했다. 작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문제는 '침략'을 '현실'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은 로마 제국의 이야기이다. 제국주의의 속성이 '침략'이니까 그것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15권 전체를 읽으면서,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제국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언급이 없었던 걸 보면, 작가가 그 부분에 별로 저항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방식은 다르지만 '침략'은 과거에도 지금도 '현실'이다. 하지만 현실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전쟁이나 침략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할 수 없는 인류의 악행일 뿐이다.

둘째는, 분명 '로마 사람들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로마 민중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작가가 안내하는 로마 제국에는, 로마 시내의 중요한 건물들과 여기저기로 뻗어있는 로마 가도를 비롯한 사회 간접자본들이 즐비하다. 황제들과 원로원 귀족들, 제국 변방에서는 수많은 군단병들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농사짓는 농부가 없다. 거래하는 상인도 없고, 군단병을 유혹하는 여인도 없다. 목욕탕은 그리도 자주 등장하는데, 목욕탕에서 하루의 때를 미는 로마의 서민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작가가 이들의 삶이 사소하다고 단정하고 제외시킨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글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의 큰 흐름을 통치자와 정치가, 입법자 등 상류계급으로 잡았다 해도, 군데군데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 좁은 소견이지만, 내 생각에는 이들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인 듯하다.

로마인의 삶을 따라가며 읽는 동안, 이 책은 큰 기쁨과 깨달음을 주었다. 책 속에서 감동 깊게 읽었던 부분을 적으며 마무리를 해야겠다. 9권에 나오는, 플리니우스가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 중 한 구절이다.

"후세인들은 과연 우리를 기억해줄까요. 기억될 만한 가치가 우리한테도 조금은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의 천분 때문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오만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부지런함, 우리의 열성, 우리의 명예심 때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이런 덕목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게 인생이지만, 그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들은 빛나는 명성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다수 사람도 최소한 무명이나 망각에서 구원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떨까요."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지음, 나종일 옮김,
서해문집, 2005


#로마인 이야기 #유토피아 #시오노 나나미 #토마스 모어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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