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문기옹, 이대로 보낼건가

부민관 폭파사건 주역... 최근 노환으로 쓰러져

등록 2007.06.29 11:26수정 2007.06.29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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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삼일절에 서재에서 필자와 함께한 독립운동가 조문기 옹과 평생의 반려이자 동지인 자영심 여사님. 투병중인 조문기 옹을 간병하고 있는 장영심 여사님은 현재 만성 당뇨병에 시달리고 있다. ⓒ 홍원식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새싹을 냄과 같이, 내가 암살되어 나와 같은 애국자들을 많이 낼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30여 년간의 목숨을 건 독립운동의 여정을 끝내고 환국한 백범이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를 제보 받을 때마다 남겼던 유언이다. 백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측이라도 한 듯 이 유언을 남기고 1949년 6월 26일 정오에 안두희가 쏜 흉탄을 맞고 하늘로 돌아갔다.

한반도가 생긴 이래 처음이라는 애도의 인파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을 파고처럼 물결쳤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증언. 백범은 암살되기 하루 전, 공군 장교였던 아들 신이 찾아와 암살 위험과 피신을 간청 받고도 "군인이 사사로운 정에 매여 임지를 비운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호통을 쳐서 보낸 뒤 장렬하게 예고된 사선을 향해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

백범을 국내 반민족세력과 결탁한 안두희가 미 CIA 정식 요원으로 '백범 제거 작전'에 투입되었음은 후일 공개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자료에 의하여 확인되었다. 백범의 유언들은 적중하였다. 민족 분단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1948년 4월 김규식 박사와 함께 '남북연석회의' 장도에 오르면서도 백범은 유언을 했었다.

"외세와 결탁한 세력이 원하는 대로 하나인 이 조국을 두 동강나게 방치하면 필연적으로 부모형제가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발발하게 된 것이다. 천추의 한이 될 이런 비극만은 막아야 한다. 어떠한 사상이나 이념도 이보다 우선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범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남북은 별개의 단독 정부를 수립했고, 결사보국(決死報國)의 자세로 암살을 자원한 그가 소천한 지 딱 1년 후 동족상잔이 발발하였던 것. 하지만 백범의 유언은 비극적 현실화에서보다는 희망차고 역동적인 모습으로 강산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났다.

백범이 유언한 대로 자신을 닮은 애국자들이 사철 조국 강산에서 꽃처럼 피어난 것이다. 편집 방향이 상이한 유수한 언론들이 여론조사를 통해 '20세기 가장 존경할 만한 민족지도자'를 선정함은 물론, 분단시대 북한의 주민들마저도 백범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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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4년 1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성금 5억달성 기념 행사에서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남소연

그러한 가운데 평생을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투신해 온 분들이 있다. 자신은 물론 가족의 안위를 초개처럼 던지고 조국과 민족이 바로 서는 날을 위해 또 다른 백범이 되어 바람처럼 살아 온 '원로 백범맨'들…. 다행히 삶터가 어느 정도 안정된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일생이 눈물겹게 안쓰러운 분들이 있다.

국사 교과서에까지 실린 바 있는 일제 말엽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이었던 조문기 옹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현재 서울시 의회 건물 자리인 '부민관'에서 일본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행사장에 동지들과 함께 폭약을 터트린 것이다. 약관의 청년 조문기를 백범을 위시한 민족지도자들이 총애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 보장된 부귀영화와 출세가도를 버리고 산속 깊은 곳으로 은거하여 청년의 날들을 보냈다.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제2의 부민관 폭파 사건'을 도모하다 모진 고초를 겪은 뒤 그는 다시 경기도 화성의 고향으로 돌아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초근목피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독립운동가'로 등록만 했더라도 최악의 생활을 면했을 것이건만, 그는 그때까지도 이를 거부했다. "조국이 실질적으로 독립된 것도 아닌데 독립운동가 대우를 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 그의 거부 이유였다.

보다 못한 무남독녀 내외가 보훈처에 이 사실을 알렸고 그는 뒤늦게야 생존 최고의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노발대발했던 조문기 옹은 주위의 간곡한 청에 이끌려 세상으로 다시 나와 '새로운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70이 넘은 고령에 맡은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직이 그것. 천하를 뒤덮은 것 같은 기세로 출범한 열린우리당 수뇌부가 15평 남짓한 조문기 옹의 누거로 직접 찾아와 집안을 가득 메웠던 일화는 그의 위상을 엿보게 하는 한 단면이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 했던가. 북풍한설에도 끄덕없는 노송처럼 정정했던 조문기 옹이 쓰러졌다. 그날에 문전성시를 이루며 찾아 들었던 열린우리당 수뇌부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고 소수의 지인들만이 그를 찾아 문병을 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더욱이 안타까운 일은 평생을 동지처럼 조문기 옹 곁을 지켜온 장영심 여사가 만성당뇨병에 시달리며 노구를 이끌고 그를 돌봐야 하는 참담함이다. 아직 의식이 남아 있던 어느 날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며 노부부는 밤새워 울었다 한다.

지난 26일은 백범이 우리 곁을 떠난 지 58주년이 되는 날. 평생을 백범정신 실천을 위해 바람처럼 달려온 '원로 백범맨' 조문기 옹을 이대로 방치한다면, 통치권이든 지도자들이든 민족재단에서 '양심의 화염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향신문 6월 29일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경향신문 6월 29일자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문기 #장영심 #독립운동가 #부민관 #홍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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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법(통일헌법) 박사학위 소지자로서의 전문성 활용 * 남북회담(민족평화축전, 민주평통 업무 등)차 10 여 차례 방북 경험과 학자적 전문성을 결합한 민족문제 현안파악과 대안제시 * 관심분야(박사학위 전공 활용분야) - 사회통합, 민족통합, 통일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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