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 줘 봐, 내가 해줄 게"

등록 2007.07.18 21:02수정 2007.07.18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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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절. 딸아이는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를 찾아 꽂는다. 눈을 비비면서도 태극기를 다는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한다. 딸아이보다 일찍 일어난 난 태극기 달 생각은커녕 컴퓨터 먼저 켰다. 딸아이의 의식 속엔 잠자리에 들기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고, 나에겐 그런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아내는 일어나자마자 염색약을 찾더니 머리 염색을 한다. 그것도 혼자. 그런 모습을 본 딸아이가 자신이 해주겠다며 엄마의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딸아이의 모습이 서툴러 까만 약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래도 아내는 내게 부탁을 하지 않는다. 뭔가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이리 줘 봐. 내가 해줄게.”

딸아이에게 머리빗과 약병을 달래 아내의 머리를 헤집으며 약칠을 했다. 아내의 흰머리가 더 많이 늘었다. 나이 40도 안 된 나이에 허연 백발이 된 아내. 그 아내는 염색하고 2주만 지나면 흰머리가 보여 창피하다며 모자를 쓰고 나간다.

사실 아내의 머리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흰 머리가 많다. 머리를 들춰보면 온 머리가 흰색이다. 봄날의 잡초처럼 흰 머리가 희뜩희뜩 웃으며 살을 비집고 기어 나온다. 처음엔 성글게 나던 흰 머리가 어느새 빼곡하게 나기 시작했다. 겉 머리가 있기에 망정이지 속 머리만 있었으면….

며칠 전엔 한의원에서 허리 치료하면서 아내의 한약을 지어왔다. 내 약을 지으면서 아내 것도 함께 지은 것이다.

결혼 후 난 그래도 몇 번 한약을 먹었지만 아내는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생리 양이 급격히 줄었다고 걱정하면서도 약을 먹으라 하면 ‘괜찮아’만 되뇌었다. 그러면 난 은근히 모른 척 넘어갔다.

그런데 요 며칠 아내는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웠다. 조금만 눈에 거슬려도 톡톡 튀어 올랐다. 아이들에게도 평상시완 다르게 대했다. 그런데 이번에 약을 지으면서 그 원인이 조금은 밝혀졌다. 억지로 진맥을 받게 하는데 그 한의사 말이 무슨 점쟁이 같다.

“요즘 신경이 날카롭지요.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안 그래요?”
“맞아요. 요즘 많이 예민해진 것 같아요.”

아내의 대답이 아니라 내 대답이다. 아내는 그저 피식 웃기만 하고 내가 옆에서 의사의 말에 대꾸를 했다.

“얼굴이 자주 화끈거리고 생리 양도 거의 없고 틈만 기운이 없어 잠만 자고 안 그러나요?”“네, 자주 그래요. 잠을 아무리 자도 피곤하고 그래요.”

이번엔 아내가 대답한다.

“그래도 남편보다는 낫네요. 남편은 일 년 365일 구름이 잔뜩 끼었는데… 그래도 지금 약 먹어줘야 늙어서 고생 덜해요. 아니면 10년 후부턴 관절염도 생기고 고생길로 접어들어요.”

의사의 이런저런 말에 아내는 꼼짝없이 약을 짓게 됐다. 그런 의사가 그리 고마울 수가 없다. 진맥을 잘해서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틈을 주었으면 이런저런 핑계로 분명 약을 짓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약 좀 먹으라 하면 자신은 건강 체질이니까 약 먹을 필요 없다며 당신이나 지어 먹어, 하곤 했다.

그렇게 아내의 약까지 지어주었는데 아내는 전날 밤 또 사소한 것에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잠시 다툼이 일었다. 그러면 아내는 내가 말을 걸기 전까진 침묵이다. 늘 그랬다. 그것이 머리 염색을 하면서도 해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평소 같으면 온갖 아양 떨면서 해 달라 했을 텐데 말이다.

그런 아내에게 ‘낭군이 해주니 좋지?’ 하니 ‘꼼꼼히 잘이나 해요’ 하며 피식 웃는다.

가끔 부부관계에서 자존심을 내세워 상대방이 양보하길 바라는 경우가 있다. 저 사람이 먼저 하겠지 기다리고 있는데 상대가 화해를 신청해오지 않으면 오기가 생기고 사소한 싸움이 오래가게 된다. 그러다 그것이 큰 갈등의 씨앗이 되어 먼 길을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말은 허언이 되어버린다.

살다 보면 다툼이 없을 수 없는 것. 그러나 그 다툼이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면 곤란하다. 만약 자존심이 동하면 바로 던져버려야 한다. 부부관계에서 자존심을 조금만 버리면 이내 웃음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부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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