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하, 그야말로 거침없이 하이킥하라

<거침없이 하이킥>의 아쉬움

등록 2007.07.20 18:30수정 2007.07.20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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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에서 백수이며 백조인 등장인물들이 드라마를 누비고 다닌 것은 꽤 되었다. 얼마 전 끝난 MBC의 <메리대구공방전>의 두 주인공인 메리와 대구도 동네 구멍가게와 헐렁한 '추리닝'이 잘 어울리는 백수, 백조였다. 그런데 그들은 20대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을 둔 가장이며 중년 백수인 <거침없이 하이킥(이하 '하이킥')>의 이준하는 드문 경우였다.

시트콤으로서 두고두고 자랑스러울 만한 성적과 평가를 남긴 MBC의 <거침없이 하이킥>이 9개월간의 숨찬 행보를 마쳤다. 그동안 수많은 화제를 만들었고 정일우를 단박에 초스타급 연기자로 올려놓았으며 이순재와 박해미 등 중견 연기자들을 재발견하는 쏠쏠한 재미도 선사해주었다. 매회 놓치지 않고 보는 열혈 시청자는 아니었지만, 케이블 방송의 재방에서 본 몇 개의 재미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하이킥>의 제작진과 출연진의 대성공을 축하해줄 용의는 충분히 있었다.

문희-준하 모자의 가슴 찡한 '방귀보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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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중년 백수를 연기한 정준하 ⓒ MBC

그런데 지난 월요일, <하이킥>이 공식적으로 종영한 바로 다음 월요일에 특집 편성된 '클로즈업 스페셜'에서 이준하 역의 정준하를 보는 순간 나는 <하이킥>이 가져다준 아쉬움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이킥>은 누가 뭐래도 가족시트콤이다. 그러나 정성스레 배치된 가족 구성원의 각자 캐릭터는 갈수록 배경이 되어버렸다. 가족시트콤이 멜로시트콤으로 변하면서 가장 큰 수혜자는 멜로 라인의 중심에 있던 민정(서민정 분)과 윤호(정일우 분)이고 가장 큰 피해자는 준하(정준하 분)이다.

사실 준하처럼 피해자로 분류될 뻔했던 그의 아내 해미(박해미 분)는 시부모를 휘어잡는 독특한 캐릭터 설정에 힘입어 비교적 성공했다. 그러나 역시 가족 내 최고 권력자인 시트콤 속의 캐릭터대로 남편을 뒷받침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남편의 상황이 어떤지 공감하고 싶지도 않은 무심한 아내였다.

준하의 어머니인 나문희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에피소드는 "방귀보감"이었다. <대장금>의 장금이가 약을 얻기 위해 갖은 실험과 연구를 하던 부분을 패러디해서 아들 준하의 악취 방귀를 고쳐주려는 어머니의 일지를 바탕으로 전개된다.

악취 방귀나 뀌어대는 식신이며,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권위가 설 만한 어떤 지위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아버지 혹은 남편의 지위로 권위를 가지려는 남자는 우습고, 그 관계가 역전된 채 주눅 든 남자는 사실 불쌍하다.

준하는 까칠한 민용의 어린 시절과 달리 매우 착하고 효성스러운 아들이었다. 그리고 아내에게도 지극정성 헌신한다. 그러나 푹 퍼진 식욕에 푹 퍼진 외모에 푹 퍼진 심성은 남들이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할 빌미를 준다. 아버지 순재가 그랬고 아내 해미가 그랬다. 그러나 어머니 문희는 그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본 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준하를 챙겨주고 보살피고 "저렇게 착한 아들이 또 어디 있냐"며 인정해주는 역할은 언제나 나문희였다.

준하의 방귀가 맑은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오던 순간, 나문희 여사는 밀가루가 눈처럼 날리는 광경 속에서 세상을 구한 듯한 미소를 보여줬다. 까르륵 웃다가 마음이 찡했다. 방귀 때문에 펄펄 날리는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어이없는 장면에서도 저렇게 감동적인 표정을 보여줄 수 있는 나문희 여사는 역시 베테랑 연기자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이킥>이 주고 싶었던 재미와 감동은 인기의 중심이 된 멜로 라인이 아니라 뒤로 밀려난 중년 백수의 방귀 치료 스토리에서 더 절묘한 결합을 이루며 성취되었다.

중년백수 준하의 거침없는 하이킥을 보고 싶다

사실 <하이킥>의 대성공의 주춧돌인 멜로 라인에 퍽이나 냉소적인 나로서는, 까칠한 민용씨가 그리 멋쩍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점을 빼면, 후반부로 갈수록 멜로시트콤으로 쏠리는 것이 불만이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불만이란 결국 제작진이 애초의 기획의도에서 다소 벗어나 중년 백수 이준하의 삶에 기울여야 할 관심을 거두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된 것이다.

실업문제의 심각성은 이제 시기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구조화되었다. 청년실업의 시대라고 떠들지만 청년들만 실업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4, 50대 중년 실업은 청년실업보다 실존적으로 더 심각한 문제다. 청년들은 우리들의 실업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고 사회에 요구할 수 있지만 중년들은 사회에서 밀려난 자기 자신이 서럽고 쪽 팔려서 뒤로 숨어버리기 때문에 조용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서른이 넘어도 독립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는 심정과 아내와 아이들 보기 면목이 없어진 아버지를 보는 심정은 같지 않을 것이다. 심성은 착한데 능력이 없다는 것은 현대사회에 가장 치명적인 품성인데 대가족 내의 외톨이 이준하가 딱 그 꼴이다. 도리어 아빠는 뒤에 잠자코 있으셔. 우리가 돈도 벌고 연애도 하고 중요한 일은 다 할 테니까, 하면서 소외시키는 것은 착한 준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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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하이킥> 가족 ⓒ MBC 제공


이준하는 시트콤의 마지막에 주식 투자에 대박을 터뜨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어차피 시트콤인데 그 정도 비현실적인 비약이 뭐가 문제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하이킥>의 여정에서 중년 백수 이준하의 삶이 그리 애정 있게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결말에 맥이 빠진다. 역시나 마지막에도 적당히 처리하는군, 하는 생각이지, 성공한 것으로 끝낸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는다.

<하이킥> 가족에서 가장 거침없이 하이킥 하는 것을 보고 싶은 캐릭터는 권력자 해미도 아니고 야동순재도 아니고 누나들의 로망 윤호도 아니다. 힘없이 무시당하면서도 악한 마음을 품지 못하는, 천상 낙오자가 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 준하이다. 그리고 제멋대로 소리 지르는 남편한테 질리고, 지 잘났다고 자의식 없이 자길 깔보는 며느리한테 한 맺혔으며, 소외된 아들을 유일하게 인정해주면서 엄호하는 나문희 여사이다.
#방송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중년 백수 #정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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