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살자 테러리스트, 사랑과 죽음의 소설을 쓰다

[배문성의 책이야기] 보리스 싸빈꼬프 지음 <창백한 말>

등록 2007.07.24 17:31수정 2007.07.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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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집으로 배달되는 <국제신보>라는 지방 한 도시의 신문에 난 살인사건을 보면서 아버지께 물었던 적이 있다. "풀도 죽고 개도 죽고 고양이도 죽고 다 죽는데 왜 사람 죽은 것만 이렇게 중요하게 다루느냐"고. 아버지는 자못 어이없어하는 듯한 시선을 던지면서 "사람 목숨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란 요지의 설명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의문은 계속 남았다. 왜 사람이 가장 중요해야 하지. 사실 지금도 그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매일 무엇인가가 죽고 나고 사는 와중에 사람의 죽음만이 특별히 중요해야 할 이유는 지금도 잘 설명하기 어렵다.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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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표지 ⓒ 뿔

지난 19일은 몽양 여운형(1886~1947)이 한 테러리스트에 의해 암살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같은 날 몽양 서거 60주기를 맞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학술대회 '몽양 여운형과 평화통일'에서는 몽양이 모두 13번의 테러를 당했다는 연구논문이 발표되기도 했다.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는 몽양이 광복 후 암살될 때까지 2년 동안 무려 13번 테러를 당했으며 테러는 좌우측 양측에서 공히 시도됐다는 요지의 논문을 발표했다.

몽양이 당한 13번의 테러는 종류도 다양해서, 머리를 난타 당한 것은 그 중 가장 가벼운 것이고, 수류탄 투척, 권총 테러범에 의한 납치, 폭탄 설치, 총격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의 테러가 시도됐다. 한국의 해방공간은 가히 테러리스트의 시대였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지금도 논리적으로 설명이 잘 안되듯이, 사람 죽이는 일 또한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테러리즘의 내면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불과 2년 동안 무려 13번이나 테러를 시도한, 테러리스트들의 내면은 잘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내면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그들은 왜 13번이나 몽양을 죽이려했을까.

암살자 테러리스트의 고백

여기 한 테러리스트의 고백이 있다. 스스로 수많은 목숨을 빼앗은 경험이 있는 암살자였으며, 소설가였고, 정치적 허무주의자였으며, 무정부주의자였던 자가 쓴 소설이 있다.

'창백한 말(1909)'(뿔 펴냄). 짝을 이루는 소설 '검은 말(1923)'과 함께 혁명기 러시아를 다룬 중요한 작품이다. 그간 한국에서도 이병주 등에 의해 이 소설에 대한 명성이 간간이 소개되기도 했는데, 이번에 슬라브 문학을 전공한 전문학자에 의해 제대로 번역돼 나왔다. 번역자 정보라씨는 미국 예일대 지역학과에서 석사를 마치고 인디애나 대학교 슬라브어문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작가 보리스 빅또로비치 싸빈꼬프(1879~1925)는 실제 암살자로 활약한 테러리스트다. 초기에는 소비에트 혁명에 가담하여 제정 러시아 요인 암살에 참여했으며, 공산혁명 성공 후에는 국방차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 후 정치적 마찰 등으로 중앙위원회에 의해 제명된 후 도리어 볼셰비키 정부에 대항하는 백군에 참여해 테러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소설 '창백한 말'은 싸빈꼬프가 1905년 일으켰던 모스크바 시장 쎄르게이 알렉싼드로비치 대공 암살 사건을 다룬 소설이다. 싸빈코프는 1924년 폴란드에서 소비에트에서 다시 잠입하려다 체포되었고 이듬해 감옥에서 사망했다. 감옥 계단에서 넘어져 사망했다는 게 공식발표인데, 이를 둘러싸고 살해설 등이 떠돌기도 했다.

이런 작가의 이력을 놓고 보면, 소설 '창백한 말'은 이른바 테러리스트의 내면을 알아차리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 쓰는 테러리스트가 어디 있단 말인가. 테러하는 소설가도 물론 없다. 거기다 삶이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니, 작가에게 스스로의 삶은 바로 소설의 토대이고, 그의 저작 전부는 자신의 행적을 소설화시킨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사람 죽이는 일'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과연 '사람 죽이는 일'을 설명하는 일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무슨 논리로 '사람 죽이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독서는 당연히 이런 질문을 가지고 시작됐다.

사랑은 모두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며...

'창백한 말'은 소설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일기체 수기에 가깝다. 주인공은 조지 오브라이언. 가명으로 러시아에 잠입했다. 그의 동료는 세 명이다. 바냐. 조지의 정신적 의지처이자 이론가, 기독교도다. 에르나. 폭탄 제조책이다. 여성이며 한없이 조지를 사랑한다. 하인리히. 운반책, 마차를 몬다. 이 자는 에르나를 남몰래 한없이 연모한다.

조지의 내면은 부재 그 자체다. 미래 없음, 사랑 없음. 미래가 본디 없는 자에겐 절망도 없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자가 미래 없음을 본다는 것은 고통 그 자체다. 부재에 대한 고통은 조지의 내면을 다 지워버린다. 마음속에 아무 것도 없는 듯한 조지는 담백하고 '쿨'하다. 서늘 그 자체다. 자신이 암살을 하다가 붙잡힐 때를 예상하며 그는 "2분이면 돼"라고 짧게 정리한다. 사형 당하는 데 2분만 견디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지상에서 매달리는 것은 한 여성에 대한 사랑이다. 옐레나. 그러나 옐레나는 유부녀다. 그가 유일하게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랑조차 이뤄질 수 없다는 점에서 조지에게 삶은 부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다.

애석하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랑은 맺지 못하는 것뿐이다. 조지를 사랑하는 여성은 에르나지만 조지가 사랑하는 여성은 옐레나다. 그러나 옐레나는 자신의 남편도 똑같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은 또 있다. 운반책 하인리히는 조지만을 사랑하는 에르나를 또 한없이 연모한다.

사랑은 모두 미완성이고 불완전하며 가망 없다. 이 불완전한 세계는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내일 없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런 세계 속에서 이들은 상부의 지시만 떨어지면 그 대상을 제거한다. 이들의 불완전한 사랑은 에르나의 다음과 같은 애원조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사랑부재의 세계는 테러리즘의 세계

에르나는 끊임없이 조지로부터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조지는 에르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확인시켜준다. 급기야 에르나는 그렇다면 "우리는 같이 죽을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을 조지로부터 확인받는다. 그렇다. 이들은 같이 사랑을 나누진 못하지만 적어도 같이 죽을 순 있다. 지상에서 같이 할 수 유일한 것은 죽는 것뿐이다. 에르나의 독백은 아프고 서늘하다.

"조지, 내 사랑…… 우리는 함께 죽을 거죠? 조지?"

암살의 이유는 바냐의 토로에서 더 잘 드러난다.

"우리는 칼을 들지. 자신의 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약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칼을 드는 거야"

소설은 죽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읽히는 것은 사랑없음의 세계다. 사랑없음은 애초에 사랑이 부재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맺지 못할 사랑에 매달리기 때문에 생긴다. 맺지 못해서 사랑이고 이뤄지지 못해서 사랑한다. 에르나는 조지를… 조지는 옐레나를… 하인리히는 에르나를… 이것으로 세 테러리스트들은 사랑 부재의 세계를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며 완성해낸다. 사랑없음의 세계, 죽음의 세계이며 테러리즘의 세계다.

조지와 바냐의 다음 대화는 사랑부재의 세계를 잘 요약한다.

"사람들 말이 내가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멀리 있는 이들만 사랑하고 있다고 하더군… 다른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거, 사람들에게 자기 죽음을 준다는 건 쉬워, 삶을 주는 쪽이 더 어렵지… 조지. 자네 말해보게. 사랑 없이 살 수 있나."
"물론 있지."
"어떻게 산단 말인가? 어떻게?"
"세상에 침을 뱉어야지."

덧붙이는 글 | 창백한 말 / 보리스 싸빈코프 지음 / 정보라 옮김 / 뿔 펴냄 / 2007. 7. 15

덧붙이는 글 창백한 말 / 보리스 싸빈코프 지음 / 정보라 옮김 / 뿔 펴냄 / 2007. 7. 15

창백한 말 세트 - 전3권 - Season 1

추혜연 글.그림,
재미주의, 2016


#창백한 말 #보리스 싸빈코프 #암살자 #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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