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김굿처럼, 아픈 역사를 보듬다

[인터뷰] 만화가 박건웅

등록 2007.07.26 13:36수정 2007.07.26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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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웅의 <꽃>은 화사하게 만개했다가 잎이 지는, 그런 비극성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 물론 꽃이 갖는 즉물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아마도 그가 그리고자 했던 '꽃'은 한시적 생명력을 극복하고 사계를 통해 다시 개화하는 윤회의 꽃이었으리라." - 만화가 김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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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꽃>. 대학 때 민중미술을 했던 박건웅 특유의, 마치 목판화에 새겨 찍은 듯한 그림체가 인상적이다 ⓒ 박건웅

<꽃>과 <노근리 이야기>(1부 그 여름날의 기억, 프랑스판 제목 : <노근리 다리의 학살>) 등 만화가 박건웅의 장편 두 편이 최근 프랑스 한 만화비평상 후보에 올랐다. 프랑스 ACBD(Association des Critique et Journaliste de Bande Dessinee, 프랑스 만화비평가 기자협회)가 제정한 'ACBD 아시아 만화상' 5개 후보작에 선정된 것. 비록 수상에까지 이어지진 못했지만 박건웅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개인적으로 영광일 뿐 아니라 다행스럽기도 하죠. '많이 보라'고 만들었으니까요. 솔직히 (제 만화가) 일반적이지 않고, 한편으론 무겁게 다가올 수 있고, 그래서 부담스럽지만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소재이니까요. 음식으로 치자면 많이 먹지 않는 것을 만드는 일이죠.(웃음) 그렇지만 누군가는 맛있게 먹어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지난달 22일 만난 그는 스스로 자신도 분명 '요즘 맛'이 아닌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섭섭하지는 않다. 조금 덜 팔리더라도 하고 싶은 얘길 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자유롭지 않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는 만화가가 되었다.

핏빛 우리역사를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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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박건웅 ⓒ 홍지연

박건웅의 이야기는 모두 우리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다. <꽃>(새만화책)은 비전향 장기수를 주인공으로 일제강점기에서 한국전쟁까지 얼룩진 근현대사를 그린 작품. 일일이 목판화에 새겨 찍어낸 듯한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다. 박건웅은 이 작품으로 2002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신인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제목 그대로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노근리 사건'을 다룬 <노근리 이야기>(새만화책)는 정은용의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토대로 하고 있다. 잔잔한 수묵화에 더해진 증언의 힘은 짙은 호소력을 입었다.

성완경 인하대 교수는 "이제까지 어떤 작가도 이보다 더 생생하게 전쟁 중 민간인 학살이라는 주제의 거대 벽화를 그려낸 적이 없다"면서 "증언의 힘과 예술의 힘이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나를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라고 극찬했다.

중·고등학교 때부터 역사에 대해, 특히 학살이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관심이 많았었고, 학생운동을 하면서는 더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결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그리는 사람이 됐다. "우리가 무심코 넘겼던 부분들에 대해,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부분을 만화로써 보여주고 싶은" 생각에서다. 남들이 잘 이야기하지 않는, 뒤틀리고 왜곡돼 있는 것을 바로잡고 싶은 생각도 컸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또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역사는 통째로 없어진 것 같아요. '퉁' 하고 한 공간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그런데 거기에서야말로 할 얘기가 참 많죠."

"결국엔 만화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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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묵화를 닮은 그림체가 일품. 장편 <노근리 이야기>다. ⓒ 박건웅

하고 싶은 이야기가 분명해졌으니 무엇으로 보여줄지도 정해야 했다. 대학에서 미술을(홍익대 서양화과) 전공하던 때만 해도 당연히 화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회화'로는 자신의 이야기를 충분히 전할 수가 없다는 한계를 깨달을 즈음 만화를 발견했다.

글과 그림, 연출이 어우러진 가운데 독자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 것. 그것이 박건웅이 말하는 만화의 매력이다. 군생활 동안 틈틈이 그려넣은 스토리보드와 콘티는 곧 그의 처녀작 <꽃>(1부)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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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출간된 <꽃>(왼쪽)과 <노근리 이야기>. 두 작품은 현재 프랑스 뿐 아니라 이탈리아에도 출간됐으며 스페인, 독일 쪽에도 출간에 대한 러브콜이 이어지고 있다 ⓒ 박건웅(새만화책)

사실 만화는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이야기 도구였다. 거칠게 목판화로 찍어낸 듯한 <꽃>, 부드러운 먹선과 번짐을 활용, 한편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노근리 이야기>, 제주 화강암의 느낌을 그대로 가져온 단편 <홍이 이야기>처럼 그는 각각의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방식을 찾는다.

컷 안에서의 '실험'도 쉬지 않는다. 실제로 장면 하나에 그가 내보이는 그림과 연출법은 매우 독특하다는 평이다. 회화와 만화의 성격을 적절히 활용, 효과적인 이야기 전달에 성공하고 있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대사 한 마디 없이 그려진 <꽃> 1권에 대해 "과거와 현재, 사실과 진실, 희망과 절망의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평한 바 있다.

변화무쌍하게 얼굴을 바꾸는 만화의 매력. 그는 "굳이 만화가 아니어도 됐지만 끝내 만화가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슬퍼할 겨를이 없다

대중적이지 않으니 시류에 대한 강박이나 거센 유행에도 한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가끔 '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선·후배, 동료 만화가들로부터 부러운 시선을 받을 때면 그저 부끄럽기만 하다. 마음 한편으로는 우리 근현대사가 '박건웅만의 것'이 될까 두렵기도 하다.

"많은 작가들이 현대사 안에서 이야기를 다뤄줬으면 해요. 저도 같이 경쟁하고 싶고요. 아마 차츰차츰 나타나겠죠. 더욱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끼지만 큰 부담보다는 제가 가진 것만큼만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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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꽃> ⓒ 박건웅


두 편의 장편 모두 3~4년은 기본. <꽃>은 만 5년간 1150페이지에 걸쳐 완성됐다. 사실 무척 급한 성격에 끈기있게 뭔가를 해내는 편도 아니지만 유독 만화만큼은 ‘끈덕지게’ 하고 있단다. 뚝심있는 그 호흡은 처음부터 정해놓은 전법은 아니었고, 다만 하다보니 대하극이 체질에 맞아서일 뿐이다. 연재를 하지 않고 마치 다 찍은 영화를 한데 모아 편집하듯 묶어 책으로 내는 것도 그가 고집하는 방식.

좋은 글이란, 읽고 나면 불편해지는 글이라 했던가. 박건웅의 만화에도 그런 ‘불편함’이 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답답함, 펑펑 울어도 풀리지 않는 채무감이 뜨끈하게, 때론 묵직하게 들러붙는다. 아마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무언가가 그 안에 담겼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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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지연

그런데 보는이에게 불편함과 어찌할 도리 없는 슬픔을 안겨주는 이 작품들의 ‘작업과정’은 대체 어떨까. 매일 소주깨나 들이부어야 가능할 것도 같지만, 사실은 즐겁기만 하다. 손에 익은 가장 진실한 무기 ‘만화’를 들고 마치 시체를 닦듯, 그 영혼을 달래듯 만화를 그린다.

“즐거워요, 굉장히. 즐겁지 않았다면 시작하지 않았겠죠.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 억울한 죽음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작업인데 얼마나 즐거워요? 슬퍼할 겨를이 없는 것 같아요. 사실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할 겨를은 없어요. 오히려 그것을 뛰어넘는 감정이 있어야 하죠.”

최근 <노근리 이야기>를 마무리지은 박건웅은 요즘 제주 4·3 항쟁에 대한 새 이야기로 고민중이다. 내년이면 60주년을 맞는 제주 4·3 항쟁을 3가지 에피소드로 엮어 단행본(<섬>)으로 출간할 계획이다. 그 다음은 무엇이 될까. 미국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을 전우주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SF가 될지도. 명쾌하고, 거침없는 그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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