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의 고국 나들이 어떻게 보낼까

두 딸의 보람있는 여름방학 보내기 프로젝트

등록 2007.08.09 14:06수정 2007.08.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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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석을 끊었는데 비즈니스석을 차지하는 횡재(?)를 누리며 한국에 왔다. ⓒ 한나영

2년 만에 가게 되는 고국 나들이에 고등학생인 두 딸들은 흥분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아이들뿐 아니라 감성이 무디어진 중년 아줌마도 두고 온 가족과 모든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설레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고등학교는 대체로 6월 초, 중순 경에 방학을 하는데 아이들의 설렘은 한국행 비행기표를 알아보려고 들썩이던 4월 중순부터 시작되었다.

"이번에 한국 가면 친구들도 만나고 선생님도 만나고…."
"이번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할 것이 …."
"이번에 가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 …."
"이번에 가면 잊지 말고 사와야 할 것이 …."


아이들이 만나고 싶은 사람은 한 둘이 아니었고, 먹고 싶고, 가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출국 날짜가 나온 뒤 이를 달력에 표시해두고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아이들의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얘들아, 친구들은 보충수업이며 야간자율학습이며 학원 등으로 바쁠 텐데 너희들도 생산적으로 방학을 보내야지 온통 소비적인 생각만 하고 있구나."
"엄마,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해요."

시큰둥한 답변만 서늘하게 날아왔다. 뉴스에도 많이 보도되었듯 방학이 되면 미국에 있던 한국 아이들은 SAT 학원에 등록을 하고 새로운 입시 준비에 시달리게 된다. 그런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의 여유가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방학 계획서를 짜보라고, 계획서가 부실하면 한국에 가는 것을 유보할 수도 있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러자 무슨 일이든 기획하는 것을 좋아하는 행정가 스타일인 큰딸이 먼저 방학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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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이 작성한 여름방학 계획서. ⓒ 한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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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페이지짜리 여름방학 계획서. 잘 지켜질까? ⓒ 한나영

[여름방학 계획서]

가. 목적
-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고 안부를 전하는 시간을 갖는다.
- 한국의 맛있고 영양가 넘치는 음식을 섭취하여 국력을 높이는 체력을 기른다.
- 보고 싶은 친구들을 만나서 옛날 옛적을 회상하는 시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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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든여덟인 할머니를 모시고 병실 밖으로 나온 두 딸. ⓒ 한나영

나. 세부 사항
1. 가족 상봉
- 할머니 병원에 찾아간다.
- 외할머니댁에 찾아가 인사를 드린다.
- 그 외 친척들을 만나 인사한다.

2. 영양 섭취
- 몸 보신을 위하여 보신탕, 설렁탕, 그외 여러가지 몸에 좋은 음식을 먹는다.
- 2년 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순대를 섭취한다.
- 진짜 한국에서 만든 한식을 먹는다.
- 짬뽕과 자장면을 섭취함으로써 한국과 중국의 문화 교류를 느껴본다.
- 그 외 다른 음식을 먹어 건강해짐으로써 국력을 기른다.

3. 동무 면회
- 고 3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친구들을 면회하러 간다.
- 옛날 추억을 회상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 교회 친구들과 해외에 나가 있는 친구들을 만나는 기회를 갖는다.
- 선생님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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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눈 크게 뜨고 하늘 봤니? 비행기 안에서 보이는 하늘. ⓒ 한나영

4. 지식 양성
-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시간을 정해놓고 책을 읽는다.
- 6월 12일부터 7월 30일까지 영어책 10권, 한국책 10권을 독파한다.
- 책을 읽은 뒤 독후감을 쓴다.
- 어휘력을 늘리기 위해 단어를 외운다.
- 이틀에 한 번씩 영어로 일기를 쓴다.
- AP US History를 대비하여 미국 역사책을 읽고 약간의 리서치를 해본다.
- (…등등)

5. 사회 기여
- 주변에 알아봐서 보육원 같은 곳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 주말에 봉사하러 대전에 간다.
- 주변에 봉사할 곳이 또 있는지 알아본다.

6. 세상 경험
- 하늘 위는 어떤지 두 눈 크게 뜨고 본다.
- 비행기를 타본다.

다. 결론
- 한국 보내주세요.

라. 보너스
1. 음악도의 길: 악기 연습을 꾸준히 한다.
2. 인재 양성의 장소- 대학교 도서관
3. 주말은 내 맘대로

3페이지나 되는 큰딸의 여름방학 계획서는 제법 그럴듯했다.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지만 적힌 계획대로만 실천한다면 그런 대로 열매 맺는 방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딸 역시 제 언니와 비슷한 방학 계획서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두 딸은 계획을 잘 지켰을까. 글쎄, 약속이란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고, 실천되지 않을 가능성 때문에 계획도 존재한다는 궤변이 있듯이 아이들의 방학 계획도 생각만큼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천하지 못한 여름방학 계획이었지만 그나마 흡족했던 것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녔던 학교 선생님을 찾아 뵈었던 일이었다.

"선생님 만나러 가요"

중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온 작은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 선생님과 중학교 때 선생님들을 만나고 싶어했다. 사실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딸의 열망은 칭찬해줄 만 했다.

왜냐하면 공교육이 붕괴되고 있다는 말이 들리고,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는 슬픈 시대에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찾아뵐 선생님이 여러 분 있다는 것은 아이에게나 선생님에게나 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작은딸의 기대와는 달리 담임 선생님은 어쩌면 우리 애를 잘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작은딸은 너무나 평범해서 선생님이 오래 기억할 만큼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떤 담임 선생님은 무심하게도 학기가 다 끝나가는데도 딸의 이름을 틀리게 불러 상처가 된 일도 있었다. 그런 일도 있었던 만큼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선생님을 찾아가게 되면 선생님이 작은딸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딸의 실망이 클까봐 학교 가는 일을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이건 기우였다. 자신이 졸업한 초등학교의 옛 담임 선생님은 작은딸을 보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반갑게 물었다고 한다.

"어머, 이게 누구니? 찬미 아니야? 너 미국 갔다고 들었는데."

이름도 불러주고 근황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을 만나고 돌아온 작은딸의 얼굴에 희색이 만면했다. "이아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전근가신 선생님 수소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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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딸들이 방문한 초등학교와 중학교. ⓒ 한나영

같은 중학교를 다녔던 두 딸은 작은딸의 담임 선생님이자 큰딸의 학과 선생님이었던 분을 만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전근을 가셨다고 했다. 집에 와서 열심히 교육청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던 아이들, 다음 날 꽃단장(?)을 하고 학교로 선생님을 찾아갔다.

몇 년 지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옛 시절을 회상하면서 선생님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왔다. 교무실에 있던 다른 선생님들이 "제자가 찾아오는 선생님"이라고 부러워했다나?

더구나 작은딸은 선생님으로부터 친구들의 모습이 나와 있는 중학교 앨범까지 얻어와 기쁨이 배가 되었다. "김우겸 선생님, 감사합니다."

한국에 있었던 7주 동안 아이들은 이렇게 나름대로 분주한 방학을 보냈다. 방학계획서에 나와 있던 대로 시간을 보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건강한 방학을 보내고 온 것 같아 크게 아쉬움은 없는 올 여름이었다.
#미국 #방학 #선생님 #친구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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