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에는 달맞이꽃만 있다

[달내일기 115 ]없애야 할 꽃인가, 보고 즐겨야 할 꽃인가?

등록 2007.08.08 14:57수정 2007.08.09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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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터로 다져놓은 땅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온통 달맞이꽃뿐이다. 그러나… ⓒ 정판수

삶의 터전을 시골로 옮기면서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약속한 게 있다. 아침마다 마을 주변 산책하기. 그러면 저절로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고, 운동도 되고, 어른들을 만나 마을 소식을 들을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이사 온 해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지켰다. 그러나 작년부터 산책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고, 올해는 하는 날을 손꼽을 정도다. 산책하지 않음으로써 늘어나는 건 뱃살과 게으름 뿐. 해서 보름 전부터 산책하기로 작정했는데 공부 안 하던 애가 막상 공부하려니 연필 부러지듯이 결심하고 나자 아침마다 비는 왜 그리 자주 오는지.

오늘은 날이 잔뜩 찌푸렸지만 비는 내리지 않아 집을 나섰다. 그리고 늘 마을 아래쪽으로 갔는데 오늘 따라 왠지 위로 가보고 싶어 그리로 길을 잡았다. 그 길은 외남선(경주시 외동읍과 양남면을 잇는 도로) 도로를 가로질러 늘밭마을로 해서 돌아오게 된다. 대략 40분 정도 걸리는데 도로를 가로질러야 하는 일 외에는 주변 정취가 꽤나 멋있다.

오르막길로 들어서 걸음을 옮기는데 저만치서 노란 유채꽃이 만발한 듯한 밭이 나왔다. '이 계절에 유채꽃이라니!' 하며 가까이 가 보니, '세상에!' 온통 달맞이꽃이었다. 아니 밭 전체가 '달맞이꽃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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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달맞이꽃의 자태가 마치 유채꽃이 핀 듯하다. 그러나… ⓒ 정판수

달내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밭이나 산을 개간하여 집을 짓기 위해 닦아놓은 널찍한 터가 몇 군데 있다. 바로 그 중의 한 곳에 가득히 달맞이 꽃이 피어 있었다. 그곳은 재작년에 개간한 땅으로 작년까지만 해도 맨흙이 드러난 땅이었는데 단 한 해만에 달맞이꽃 천지였다.

아름다웠다. 아침이라 활짝 피진 않고 서서히 오므라들고 있는 상태였지만 그대로도 아름다웠다. 낮에는 꽃봉오리를 닫고 있다가 밤이 되면 꽃봉오리를 활짝 피우고, 아침이면 다시 수줍은 듯 꽃잎을 접는데, 지금 이 순간의 모습이 갓 시집온 새색시처럼 아름다웠다.

달맞이꽃을 한자로 '월견초'라고 한다. 아마 한자 '月見草'를 우리말로 풀이하는 과정에서 '달맞이꽃'이 되었고, 달을 향한 그리움을 나타내다보니 꽃말도 '기다림'이 되었으리라. 또 달맞이꽃은 해방이 될 무렵 우리나라에 들어왔기 때문에 '해방초'라고도 한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선 달맞이꽃이 달의 신 아르테미스와 한 요정과의 슬픈 사랑의 매개체가 되어 그 애절한 사랑이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게다가 최근에는 '월견자(月見子)'라 불리는 달맞이꽃의 씨에서 나온 기름, 즉 종자유(種子油)가 질병을 치료하거나 건강식품으로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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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맞이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다. 그러나… ⓒ 정판수

이처럼 달맞이꽃은 아름답고, 낭만적이고, 유용한 식물처럼 인식돼 왔다. 그래선지 가수는 달맞이꽃을 노래했고(주병선의 '달맞이꽃'), 시인은 시로 읊었고(문정희의 '달맞이꽃'), 수필에선 글감으로 많이 애용돼 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과연 달맞이꽃은 우리 주변에 그냥 보고 즐겨야 할 꽃인가? 꽃이기에, 아름답기에, 질병 치료에 효과 있기에 그냥 두어야 할 꽃인가?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기에 그 꽃을 볼 때마다 아련함을 떠올려야 할 것인가?

달맞이꽃은 귀화식물(歸化植物)이다. 아니 이주식물(移住植物)이다. 그것도 오래 전에 자연스럽게 들어와 우리꽃처럼 된 식물이 아니라 미국에서 해방 후 관상용으로 인위적으로 들어온 이주식물일 뿐이다.

그런데 이 꽃이 보통 한 포기에서 6만 개 이상의 씨앗이 생길 정도로 왕성한 번식력을 지니다보니 달맞이꽃이 퍼진 곳에는 다른 식물이 자랄 수 없다는 게 큰 문제다. 전에는 분명 길가에 드문드문 보였는데 이제는 보이지 않는 곳이 드물다. 표현을 달리 하면 징그러울 정도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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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 언덕에도 온통 달맞이꽃이다. 그러나… ⓒ 정판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년까지만 해도 집터로 닦아놓은 밭에 드문드문 보이던 달맞이꽃이 올해는 다른 풀 하나 자리할 틈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또 이 꽃은 뿌리가 깊게 박혀서 웬만큼 자란 달맞이꽃은 어른들이 뽑기에도 힘이 부칠 정도고, 가축들도 이 풀은 입에 대지 않아 소나 염소 등의 먹이로 쓸 수도 없다.

달맞이꽃의 폐해를 진작부터 느껴 행동으로 옮긴 지자체가 있음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연합뉴스> 2007년 5월 28일자 보도에 따르면, 천연기념물 제431호인 충남 태안군 원북면 신두리 '모래언덕(砂丘)'이 되살아나고 있다고 한다. 자생식물들만 자라고 있던 모래언덕의 초지에서 이주식물 중 특히 달맞이꽃이 초지를 마구 잠식해 연약한 사구식물과 자생식물들이 멸종위기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군과 환경보호 단체에서는 2003년도부터 '달맞이꽃과의 전쟁'을 벌여왔는데, 그 계획이 효과를 봐 귀화식물이 판을 치던 모래언덕에 다시 토종식물이 자리 잡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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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큰 도로가에도 달맞이꽃이다. 그러나… ⓒ 정판수

다양한 식물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자라는 달내마을에 달맞이꽃만 만발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현실은 심각하다. 그동안 무심코 지나치다가 오늘처럼 세세히 살피니 달맞이꽃이 침범하지 않은 곳이 없다. 여러 가지 풀꽃 대신 노란 달맞이꽃 밭이 될 날이 이제 머지않은 것 같다.

아니 이는 달내마을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차를 몰고 나가면서 살펴보니 큰 도로 작은 도로 할 것 없이 길가에 달맞이꽃이 자라고 있다. 여기저기 달맞이꽃 천지다. 그대로 놔두면 번식력과 생명력이 왕성한 이 식물이 더욱 우리나라 생태계를 잠식할 것이 뻔하다.

달맞이꽃은 없애야 할 꽃인가, 보고 즐겨야 할 꽃인가?
#달맞이꽃 #외래종 #유채꽃 #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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