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격동기에 살았다네

[이미지 산책 4] <오르세미술관전> 4

등록 2007.08.28 09:53수정 2007.08.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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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조류를 거스른 화가 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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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리부는 소년', 에두아르 마네, 1866년, 161 x 97 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Hervé Lewandowski

위에 올린 에두아르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 그림이 무척 크지요. 실제 작품도 크답니다.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마네가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마네가 스페인의 벨라스케스라는 화가의 작품을 보고 반해서 그와 유사한 분위기로 그린 작품입니다. 즉 초상화에 있을 법한 배경과 풍경을 완전히 없애고 인물만 강조한 것입니다.

마네는 1866년 살롱전에 이 '피리 부는 소년'을 출품했는데 낙선하고 맙니다. 그 때 소설가 에밀 졸라가 그를 변호하는 글을 신문에 기고합니다. 졸라는 마네의 그림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즉 객관적으로 현실을 묘사하려는 글쓰기 방식을 선택한 그에게 마네의 그림들이 자신의 자연주의적 사조에 걸맞았던 모양입니다.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올해의 낙선작 '피리 부는 소년'이다… 마네의 재능이 정확하고 간결한 필치로 이 작품에 실현되어 있다… 마치 나를 위해서 그려진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네의 그림은 꾸밈이 없다. 부분들에 괘념치 않을 뿐 아니라, 인물에 불필요한 덧칠을 하지 않는다."(<마네-이미지가 그리는 진실> 중에서)

소년의 모습은 완벽한 구도로 화폭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안정된 자세로 좌우 균형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림자가 왼발 뒤와 손 주위에만 있고 다른 부분엔 없습니다. 그래서 위쪽으로 한 15도 방향에 등이 있나 생각했는데, 이것도 마네의 의도적인 그림자 생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복의 강렬한 색과 금빛 악기집이 멋지게 조화를 이룹니다.

어떻게 보면 요즘 시대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사진 같습니다. 사방에서 조명을 쬐어서 그림자를 없애는 광고 사진 말입니다. 이것이 당시에는 낯선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낙선의 이유가 되기도 했을 거구요.

"(마네는) 배경을 없애고 여백을 어두운 색으로 칠해 환상적 요소로 사용하는 기교를 익혔으며… 소년의 발뒤꿈치에 약간의 그림자를 그려 넣어 단지 빛의 방향과 깊이만을 알게 했다."(<마네의 손과 모네의 눈> 중에서)

그런데 마네는 낙선작의 대표격 화가였습니다. 그는 부지런히 살롱전에 그림을 냈지만, 그의 그림은 매번 낙선하곤 합니다. 그의 그림에는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방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통과의 단절이 그것입니다.

시인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아 현대적 삶의 이미지를 화폭에 담으려 했는데, 그 시도가 고전주의적이고 아카데믹한 살롱전의 심사위원에게는 불쾌감만을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참고로 보들레르는 최초의 '현대성'의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는 상징주의 시인입니다.

1868년에 가서야 '졸라의 초상화'가 당선됩니다. 그리고 1872년에 가서야 성공이라고 하는 것을 맛봅니다. 그의 그림들이 한꺼번에 팔리는 쾌거를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복도 많았던 사람입니다. 보들레르, 졸라, 말라르메까지 여러 문인들이 평론으로 후원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세 문인 다 상징주의, 자연주의 등의 새로운 시도를 하던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군요.

그림은 혁신적이었지만 그러나 막상 마네 자신은 보수적이고 소시민적이었습니다.

"마네는 세련된 도회 사람이며 사교계와 상류 시민 계급과의 교제를 줄기고 외출할 때는 언제나 구석구석 차림새에 신경을 쓰는 멋쟁이였다… 살롱에 제출한 그림이 거부되자 마네는 진심으로 낙담했다."(<명화를 보는 눈> 중에서)

모델이 된 소년은 황실 근위군에 있는 소년 군인이었습니다. 모델은 그 후 자신의 아들을 대신 서게 해서 완성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번에 그림이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소년의 얼굴이 마네의 아들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림 속 소년은 보병들을 전투장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악기인 피리를 불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슬픈 현실을 보여줍니다. 군인이 출세의 길이 되었다고 할까요. 당시는 나폴레옹 3세의 독재 시기였고 제국주의적 열망이 들끓었던 때입니다. 몇 년 후에 보불전쟁이 일어나고, 프랑스는 파리까지 함락되는 수모를 겪지요.

생활의 소소한 면 그린 다혈질 논쟁가 '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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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좌의 관현악단', 에드가 드가, 1868-1869년, 32 x 46 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Hervé Lewandowski

'오페라좌의 관현악단'이라고 번역했는데, 여기서 오페라좌는 오페라 극장을 말합니다. 불어 제목에는 'l'Opéra'라 해서 대문자로 되어 있는데 다시 말해서 고유명사입니다. 즉 '파리 오페라 극장'을 말합니다. 그래서 '오페라 극장의 관현악단'이라고 번역하면 더 좋을 듯 싶습니다. 아마 '오페라좌'라는 말은 '오페라 중심의 무대(극장)'라는 뜻이 담긴 것 같습니다

지금 파리에 있는 오페라 극장은 1875년에 완성되었고, 위 그림은 1870년경에 완성되었으니 그림 속 극장 모습은 오페라 극단이 그 이전에 전전하던 극장 중의 하나입니다.

음악 마니아였던 에드가 드가는 이 극장의 회원권을 지니고 있어서 맨 앞줄에 앉아 관람을 하곤 했습니다. 당시 이 곳 관현악단의 바순 연주자가 드가의 친구였습니다. 그림 한가운데의 연주자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바순 친구 덕분에 그는 세트 뒤의 출입 제한 구역에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 날 들르며 그림을 조금씩 완성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관현악단을 지켜보았으면서도 그림 속 안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채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바순 연주자는 관현악단 뒷부분에 위치하는데, 그림에서는 일부러 앞으로 배치시켰습니다. 자기 친구를 부각시키기 위해서지요. 다른 연주자들의 배치도 비정상적입니다.

연주자들 얼굴 모습이 제각각인 점도 그렇습니다. 섬세하게 그려진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의 얼굴은 사실 드가 자신의 친구들 즉 음악가, 의사, 화가의 얼굴들입니다. 심지어 왼쪽 맨 위로 보이는 귀빈석의 얼굴도 당시 사랑받던 음악가랍니다. 일종의 '집단 초상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전시회에 가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작품은 내용에 비해 크기가 작습니다. 가로 세로 50센티미터 가량의 화폭에 인물들을 가득 채워 넣었습니다. 드가는 "초상화에는 격식이 없다. 초상화는 그 사람 특유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그려야 하며, 특히 몸짓이 표현하는 바를 얼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얼굴이 하나도 없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드가가 자기가 그린 그림을, 그것도 남의 소유에 있는 그림을 다시 가져다가 수정하곤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돌려주지 않았답니다. 이 그림은 그 바순 친구에게 넘겨졌는데, 드가는 이 그림 또한 다시 손볼 계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위에서도 말한 보불전쟁이 터지면서 '다행스럽게'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더 나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드가는 치열한 면모가 있는 화가였습니다. 논쟁가이고 다혈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소재는 이에 어울리지 않게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면모들이었습니다. 빨래하는 장면, 경마 장면, 카페의 모습 그리고 아주 중요한 춤추는 소녀들까지요.

당시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도 발레가 공연되었습니다. 드가는 발레리나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린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위 그림은 발레리나가 등장하는 최초의 그림입니다. 당시 발레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합니다.

"그러나 드가에게 중요했던 것은 공연의 질이 아니라, 무용수의 움직임과 속도였다. 즉 그를 잡아끌었던 것은 하늘거리는 눈송이를 보는 듯한 발레의 매력이었다"(<세계를 움직인 그림들> 중에서)

그러나 아름다운 발레의 동작뿐 아니라 무대와 연습실에서의 고단함도 찾아 그렸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발레리나 그림들은 기억과 상상에 기대 그린 것이랍니다. 왜냐하면 위 '관현악단' 그림을 그릴 무렵부터 눈에 이상이 있게 되고, 점점 더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제가 궁금했던 것은 당시 무대 조명은 어떻게 했을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전기가 발명되기 전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림을 보시면 무대 앞에 발레리나들을 비추는 조명의 존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알고 보니 드가가 가스 가로등의 빛과 햇빛을 섞어 복합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그러니까 상상 조명입니다.

그런데 드가는 결벽증을 지니고 있었고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내는 타입은 못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작업실에서는 치열하게 작업을 했습니다. 그는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내가 얼마나 열심히 작업했는지 알게 될 거야'라는 독백을 반복했던 고독한 예술가 드가. 소외만이 유일한 벗이었던 그의 작업실은 '인내와 절제'를 통해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탄생시키는 산고(産苦)의 현장으로, 화려한 발레 무대에 가려진 장막의 뒤편처럼 치열한 생의 매우 특별한 공간, 바로 그것이었다."(<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중에서)

음악, 문학 분야 예술인과 폭넓게 교류한 '바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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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다민가의 화가의 아틀리에', 프레데릭 바지유, 1870년, 98 x 128.5 cm, 오르세 미술관 ⓒ 오르세 미술관

프레데릭 바지유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화가였습니다. 그림 속처럼 넉넉한 공간의 아틀리에를 그것도 파리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흐의 아를의 방과 비교가 안 되지요. 게다가 동료 화가까지 같이 사용하게 했습니다.

추정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왼쪽 끝에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가 르누아르인데 그와 같이 아틀리에를 사용합니다. 더욱이 둘은 동갑내기입니다. 르누아르는 아직 화실이 없었습니다.

바지유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동료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합니다. 화가만이 아니라 문인, 음악가도 같이 모였습니다. 위의 그림 중 르누아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대를 에밀 졸라로 보기도 합니다. 오른쪽 끝에 피아노를 치고 있는 이는 파리 시청의 직원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인 에드몽 메트로라는 사람입니다.

가만히 보니 문학과 미술과 음악의 3대 예술의 모습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왼쪽의 두 사람이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면요(그렇게 바지유가 구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그림은 바지유의 넓은 인간관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자신의 거처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모임을 주선하는 품 넓은 마음씨를 지닌 이들이 있습니다.

당시 화가 주변에는 문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비평, 옹호를 하면서 영향을 끼치고 자신의 작품에 반영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문인으로 이 그림에 나오는 졸라가 그렇습니다. 이 때의 활발한 문인들의 미술비평은 이전과는 다르게 주관적이고 미학적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배경에는 중산층이 늘어나 왕가와 귀족 대신 압도적인 미술애호가 층을 형성하고, 저널리즘이 발달하여 이런 애호가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변화한 시대의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보들레르와 졸라, 말라르메 등이 마네를 위해 지지의 글을 썼다(<노성두, 이주헌의 명화 읽기> 중에서>)

다른 말 할 것 없이 이 마네도 이 그림에 당당히 등장합니다. 그림 한가운데 모자를 쓴 이가 바로 마네입니다. 당시 마네는 화가들 중에 중심적인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스 기질은 없었고 따뜻한 성품을 지닌 화가였습니다.

그 왼쪽은 모네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모네도 바지유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그린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가 공식적인 이름이 되기 몇 년 전의 모습입니다.

그에 비해 드가는 풍족한 편이었습니다. 오페라 극장을 자주 드나들고, 발레리나의 연습실도 자주 드나들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가운데 그림을 소개하는 키 큰 이가 바로 바지유 자신인데, 자신의 모습을 마네가 대신 그려넣게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작품에 다른 이가 손을 대게 한 것으로 볼 때 바지유는 상당히 도량이 넓은 사람 같습니다.

또한 실제의 아틀리에에서도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림 곳곳에 자신과 르누아르, 모네의 그림을 그려넣었습니다. 창문 옆 벽의 누드화(위쪽, 르누아르)와 정물화(모네)가 그것입니다. 친구 화가의 그림을 그려넣는다는 것은 경의를 표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오르세미술관전> 그림 중에 르누아르가 그린 바지유 초상화도 있는데, 그 그림 뒤에 모네의 작품이 모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화가들은 '그림 속 그림'을 통해 우정을 표시했습니다.

도록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지유는 이 작품에서 19세기 후반의 불연속적이고 불안정한 근대 특유의 실존감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동시대 화가들과 불완전한 덧없음을 공유했지만, 그만큼 감미로움도 나누었다. 삶의 풍요로움과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은 서로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로 초기 인상주의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위 그림들의 화가 세 사람(아니 바지유의 그림 안에 있는 화가들까지 포함해서) 바티뇰이라는 대로에 있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그렇게 인상주의의 전초를 마련합니다. 그리고 1874년에 일명 제1회 인상파전이 열리게 됩니다.

위 세 작품들의 제작 시점엔 화가들에게 다 비애가 있습니다. 마네는 자신의 그림이 낙선되고, 드가는 이때쯤부터 눈에 이상이 있게 되고, 바지유는 그림이 완성되던 해 일어난 보불전쟁 때 사망하고 맙니다. 위 그림 속에 서명과 같이 표기된 '1870'이라는 숫자가 그의 마지막 연대기를 나타냅니다.

그러고 보니, 이 보불전쟁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배경이 화가들의 세계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전에 프랑스는 열강의 자리에 들어가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해외 식민지를 늘리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주변국과의 전쟁에 참여 또는 지원하고, 부르주아 층의 위세가 커지고 있던 때였습니다.

파리지앵의 그림들을 모으다 보니, 이번 글은 시대가 급변하는 때에 제작된 그림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시대적 급변이란 우선 산업이 발전하고, 파리 거리가 재정비되고, 자본주의가 정착하는 등의 발전 가도의 모습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 다음 좋은 시절은 다 가고 사회적 불안이 커지는, 예를 들면 식민지 건설에 제동이 걸리고, 경제가 위기를 맞고, 북쪽의 프로이센은 점점 더 강력한 위협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와중을 의미합니다.

"프랑스-프러시아의 전쟁(보불전쟁)과 파리 코뮌, 그리고 뒤이은 폭력적인 혁명정부의 활동은 화가가 본업에 충실할 수 없도록 가로막았다. 1870년 9월에 드가는 마네처럼 국가방위군에 입대했다… 드가는 파리 코뮌 지지자들에게 대한 진압을 맹렬히 반대한다… 그들은 모두 처형될 운명에 놓여 있었다. 드가와 마네였다."(<드가-무희의 화가> 중에서)

르누아르도 징집되었고, 바지유는 전쟁터에서 전사합니다. 그렇게들 모두 시대의 격변기에 화가로서 살았습니다. 비록 그 전쟁의 상황이 그림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시대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예술을 사용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의 삶은 조국이 어려울 때 함께 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02-322-0071

덧붙이는 글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02-32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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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몸을 씁니다』 등 네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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