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열정'을 반성하다

한풀 꺾인 더위가 내게 들려준 귓속말, 그리고 개학 첫날 이야기

등록 2007.08.21 10:40수정 2007.08.21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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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19일) 다 늦은 오후에 개학을 하루 앞두고 가까운 산에 올랐습니다. 계절의 순환 이치는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한풀 꺾인 듯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때가 되면 한풀 꺾일 줄도 아는 여름이 고맙기만 했습니다.

여름이 가을로 바뀌는 이즈음에 산에 오르면 하오의 산 그림자가 제법 서늘합니다. 며칠 새에 햇살도 퍽 유순해져 있습니다. 산을 내려와 동네를 지나올 때는 집집마다 울타리 너머로 푸른 단감들이 막 벌게지기 시작하면서 저로 하여금 이런 감상에 젖게 하기도 합니다.

'아, 내 안도 저들처럼 잘 익어가고 있을까? 어느 새 또 한 해의 시간들이 반환점을 돌아오고 있는데….'

그리고 그런 사색의 시간들을 통해 어쭙잖은 시를 한 수 건지기도 하지요.

한풀 꺾인 더위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것을 보면
뜨겁게 사는 것
그리 사무칠 일이 아니네.

나의 뜨거움이
너의 괴로움일 수 있다면
이즈음의 햇살처럼
下午의 산 그림자처럼
나도 한풀 꺾이고 싶네.

몸 불리기를 마친 푸른 감들이
제 안을 들여다보며
벌건 물이 들어가듯이
나도 벌건 물이 들고 싶네.

땅에 떨어지기 위해
곡기를 끊어버린 나뭇잎처럼
가만 나를 떨어뜨리고 싶네. -자작시, '한풀 꺾인 더위가'


릴케가 말했던가요? 지난여름은 위대했다고. 그 위대함은 대자연의 통과의례적인 창조적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 여름은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예비하는 아름다운 인고의 상징만이 아닌, 재앙에 가까운 어떤 두려움으로 엄습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때가 되어도 한풀 꺾일 줄 모르는 우리 인간의 욕망이 자초한 일이지요.

개학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학교에서 만날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방학 전날 쪽지상담을 할 때 저에게 이런 말을 적어준 아이들입니다.

'선생님, 요즘 들어 부쩍 너무 자주 화를 내시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너무 억울한 생각이 들었지만, 긴 방학을 보내면서 그것이 아이들 앞에서 한풀 꺾일 줄 몰랐던 저의 조급함이나 욕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신기하게도 제 안에 자리했던 작은 두려움들이 사라지기도 했고요. 학교에 가면 아이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마음에 그런 여유로움이 생긴 것은 눈에 이상이 생겨 안과 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오른 쪽 눈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라 저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약 두세 달 전쯤의 일입니다. 마치 붓에 먹물을 찍어 맑은 물에 풀어놓으면 생기는 동심원 같기도 했습니다.

몸에 생긴 이상 현상에 대해서 대체로 무심한 편인 제가 광주에 있는 망막 전문 병원을 찾아가 레이저 수술을 받은 것은 약 한 달 전쯤의 일입니다. 그 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간단하게 정리해봅니다.

'레이저 수술만으로는 치료가 끝나지 않아 더 큰 수술을 받아야할 상황까지 갔다가 수술 직전에 상태가 약간 호전되어 일단 수술을 취소하고 추후 경과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상태임.'

눈에 이상이 생긴 뒤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책을 가까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레이저 수술을 받은 직후에는 그 상태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독서삼매경에 빠지면 무더운 여름도 아랑곳이 없었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답답하고 환장할 노릇이었지요. 책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거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금기사항이니 베란다에 나와 멍하니 앞산이나 바라보고 있을 도리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동안 숲이나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하루를 넘긴 날이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숲이나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은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생략한 채 하루를 마감한 날이 많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또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나는 왜 책을 읽으려고 하지? 왜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를 보고 무언가를 쓰려고 하지?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일 말고 그동안 내 눈이 한 일이 뭐지?'

제가 아이들 앞에서 조금 성급했던 것은 어떤 욕망 때문이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시간도 갖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교사가 되고 싶은 것도 때로는 아이들을 위한 순수한 생각만이 아닌, 내 자신의 과도한 욕심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너무 자주 화를 낸다는 말을 쪽지에 적어준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항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자주 화를 내다니? 내가 학생들에게 얼마나 친절한 교사인데 그런 말을 해?"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솔직히 그럴 때가 있습니다. 제 스스로 친절한 교사가 되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그런 행위 말입니다. 그런 '나를 위한 열정'이라면 차라리 한풀 꺾이는 것이 아이들을 위하는 일인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학교에서는 '나의 뜨거움이 너의 괴로움이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기도 하니까요.

개학 첫날, 저는 다행히도 그런 실패를 하지 않고 아이들과 하루를 잘 보냈습니다. 긴 방학 뒤끝이라 아직 공부하는 것이 몸에 배지 않은 아이들을 조급하게 다그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환한 웃음으로 대해주었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러면서도 어느 해보다도 더 많은 양의 수업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었지요.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월간지 <사과나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개학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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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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