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 '만종'을 통해 본, 멈춰야 보이는 세상

[이미지 산책 2] <오르세미술관전> 2

등록 2007.08.23 10:24수정 2007.08.23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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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장 프랑수아 밀레, 1857-1859년, 55.5 x 66 cm, 오르세 미술관. ⓒ Photo RMN-Christian Jean

'만종'을 이야기하기 전에 사소한 것 먼저 언급합니다. '만종'이 뭐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다. 한자로 '晩鐘'이니 우리말로 하면 '저녁종' 쯤 되겠습니다. 실제로 '저녁종'이라고 번역한 책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당이나 절에서 저녁 무렵 하는 타종을 말합니다.

원제목인 'L'Angélus'는 정확하게 '삼종기도'를 뜻합니다. 삼종기도는 가톨릭에서 하루 3번 일과를 잠시 멈추고 기도를 하는, 역사가 오래된 하루 일과 중의 하나입니다. '삼종(三鍾)'의 3이라는 숫자는 하루 세 번이라는 숫자라기보다는 3번 종 치고 잠시 멈추었다가 3번 다시 치는 식으로 계속되는 타종의 의미입니다.

저녁 삼종기도는 6시쯤 바칩니다. 그림 속 장면은 해가 저무는 그 시간 때의 기도 모습입니다. 시계가 없는 그들에게 이 시간이 노동을 끝내는 시간입니다. 그걸 우리말로 번역할 때, '저녁에 종소리를 들으며 드리는 기도'라는 의미로 '만종'(晩 : 저물 만)이라 번역한 것 같습니다. 몇 년 전 성북동 길상사에서 저녁 6시에 범종각에서 타종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만종이지요.

명동성당이 보수공사를 하고 있어서 지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10여 년 전 일요일 저녁 6시에 명동성당 마당에 있어 보면 조금은 엄숙한 분위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성당 관리 아저씨가 직접 줄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종을 치셨습니다. 그 종소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넓은 마당에서 종소리를 듣자마다 모두가 멈춰 서서 삼종기도를 바쳤습니다.

지금 성당에서 '만종'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작품 제목이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늘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적절한 번역입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만' 자를 '滿(찰 만)'으로 생각했습니다. '가득 찬 시간' 즉 저녁시간 이렇게요. 워낙 유명한 그림이니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래서 고어풍이 나는 제목 '만종'이 붙었을 것입니다. 원 제목대로 '삼종기도'라고 하면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지 않고 운치도 없어 보입니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린 배경이 있습니다.

"'만종'은 내가 옛날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린 그림이라네. 옛날에 우리가 밭에서 일할 때, 저녁종 울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 할머니는 한번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우리 일손을 멈추게 하고는 삼종기도를 울리게 하셨는지 모르겠어. 그럼 우리는 모자를 손에 꼭 쥐고서 아주 경건하게 고인이 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드리곤 했지."(<밀레>(창해) 중에서)

삼종기도 기도문 내용 중에, 정확히는 이 기도문 중의 성모송 가운데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위 글 마지막 문장이 바로 그것을 뜻합니다. 밀레는 할머니를 끔찍이 사랑했다 합니다.

밀레 자신이 그렇게 신앙적인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종교화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농부들을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보통 농부화가라 불립니다. 그렇지만 밀레에게 드넓은 밭에서 노동을 하다가 기도드리는 이 특별한 한 순간의 모습이 마음에 남겨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종'만큼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동 준 작품 없을 것

우리 옛 분들도 해가 뜨면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하고 해가 지면 노동을 마치는 '자연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시골로 내려가 자연의 시간에 순응해 사는 사람들의 고백을 요즘도 종종 접합니다.

밀레는 농부들의 일상뿐 아니라 사계절의 농촌의 모습도 화폭에 담았습니다. 밀레의 많은 그림은 파리에서 40리 떨어진 바르비종에 거주하면서 그려집니다. 바르비종의 여관에 여러 화가들이 머물면서, 근처 퐁텐블로 숲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린 것이 계기가 되어 '바르비종파'가 생깁니다.

바르비종에서 같이 지내던 동료 화가 중에 샤를 자크라는 화가가 있는데 그 사람의 작품도 한 점 <오르세미술관전>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양떼가 있는 풍경'이 그것인데, 꼭 눈여겨 보시길 바랍니다. 얼마 전 대관령의 양떼목장을 갔다 왔는데 그래서인지 양떼 그림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정말 섬세합니다.

다른 화가에 비해 밀레는 이 숲에서 들판의 헐벗은 황량함에 주목합니다. '만종'은 이곳에서 그렇게 그려집니다.

그림으로 친다면 이 '만종'만큼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감동을 준 작품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도 낡은 사진으로 보았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화가 박수근도 그랬습니다. 밀레의 '만종'을 보고 밀레 같은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런 화가가 되었습니다.

책을 뒤지다가 놀라운 비평, 아니 고백을 접했습니다. 명화를 소개하는 책을 많이 쓰신 이주헌님의 글입니다. 좀 길게 인용합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서양 미술사상 밀레만큼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화해시킨 작가는 없다. 그는 화해의 사자였다. 밀레의 화해의지는 찰나만을 담아내는 미술이라는 예술 속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미술사는 그의 작품('만종')을 일러 고전주의와 사실주의가 화해한 양식이라고 평한다… (당시 사실주의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밀레는) 가난한 농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옛 고전주의적 규범과 이상주의를 절묘하게 혼합해 현실의 이미지를 영원으로 끌어올리는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당시 깨어져나가는 기독교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휴머니즘, 그 골 깊은 적대의식 사이의 진한 화해를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본격화된 산업화시대의 환경 파괴에도 불구하고 땅과 함께 노동하는 인간상으로 자연과 인간 간의 화해 또한 이끌어내고 있다." (<내 마음속의 그림> 중에서)

생각보다 작은 화폭의 이 그림이 그런 커다란 힘을 발휘하네요. 다른 책에서도 비슷한 고백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술에 임하는 밀레의 태도와 매한가지로 '만종'의 부부는 주어진 생의 조건을 피곤한 일상이 아닌 경건한 감사로 승화시킨다. 신의 축복 아래 이 세상 삼라만상이 서로에 대한 불신을 씻고 화해하는 듯한 이 그림에서 버거운 삶도 감당할 만한 것으로 무게를 덜어낸다."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중에서)

사실적인 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품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건 사람마다 다르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고전이라고 하는 것은, 명화라고 하는 것은 그런 각기 다른 사람들 마음에 비슷한 감동을 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종소리 이외에는 멀리 새 소리, 바람 소리만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이외에는 침묵이 흘렀을 벌판. 하루 종일 같이 했을 부부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농부의 몫인 쇠스랑이 휴식을 취하고, 아내의 몫인 바구니엔 감자가 가득합니다. 농부의 모자와 바지의 푸른색과, 농부 아내의 머리수건과 토시의 붉은색이 저녁의 어둠 속에 잠겨듭니다. 그리고 흙투성이의 앞치마가 노동의 고단함을 나타냅니다.

정말 정말 비교할 바 못되지만, 여행지에서 이런 침묵을 가끔 만납니다. 밤이 이슥할 무렵 넓은 시골 논밭, 멀리서 시외버스나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이외엔 고요함이 가득한 들판을 만납니다. 침묵을 느껴봅니다. 일년 내내 도시에 사는 이의 철없는 느낌이겠습니다만. 그리고 사실은 그런 현장에서 땀 흘려 노동하는 이가 맛보는 짙은 침묵이 진짜겠지만요.

기도한다는 것은 멈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기도만을 읊조리는 것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신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리가 멈추는 것이 침묵입니다. 멈추어 서서, 멈추게 해서 자신들의 소리를 함 속에 담아두는 것 그것이 침묵입니다. 그래야 들을 수 있는 세상이 있습니다.

어려웠던 폴 세잔의 그림, 정물화인데 남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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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화병', 폴 세잔, 1889-1890년, 62 x 51cm ⓒ 오르세 미술관

자료 조사하면서 제겐 폴 세잔의 그림이 참 어려웠습니다, 분명 정물화인데 남다른 구석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범상하지 않은 점들을 여러 책들이 지적합니다. 사물의 배치가 남다르다는 둥, 그림자가 인위적이라는 둥, 화병 뒤의 하얀 접시의 좌우가 다른 모습이라는(그러니까 같은 접시의 모습이 아니라는) 둥. 폴 세잔을 후기 인상파로 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세잔은 아주 천천히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빛에 의해 변화되는 사물의 외적인 모습에 치중하는 인상주의가 그에겐 잘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근본적인 실체에 다가가려 애썼습니다. 예를 들면 초상화의 경우, 그는 "모델을 읽어내는 것과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매우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명화를 보는 눈>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또 "자연에 따라 그린다는 것은 결코 대상을 그대로 베끼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감각을 실현하는 것이다" 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정물화에서 잘 발휘됩니다.

화병과 과일에 도드라져 보이는 푸른 윤곽선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잔의 감각'에서 창출된 것일 것입니다. 아마 왼쪽에 반쯤 잘려져서만 그려진 술병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화가는 멈추어 서서, 멈추어 있는 사물을 바라봅니다. 멈추면, 정지하면 세상은, 사물은 제 속을 보여줍니다.

바라보는 이의 시선이 멈추면 사물은 그때 움직입니다. 정지된 사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시선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멈추어서 구름을 보면 구름이 서서히 움직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걷는 이에게 구름은 제 몸짓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정물화(靜物畵)'라고 회화 장르를 규정하지만, 어쩌면 화가들 눈에는 사물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빛에 의해 끊임없이 생동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도 그런 것일 테고, 폴 세잔처럼 사물의 내면을 보려고 애쓴 이에게는 그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진동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표현대로 세잔의 사과는 "먹음직스러운 사과가 아니라 마음에 말을 건네는 사과"입니다. 그런데 그걸 표현하는 도구는 바로 색채입니다. 색채로 사과의 '말'과 움직임을 표현합니다.

색의 소리를 구분한다고?

색청(色聽)이란 말이 있습니다. "음을 어떠한 자극으로서 부여하였을 때, 본래의 청각 이외에 색채감각이 이에 준하여 일어나는 일"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예를 들면 저음은 어두운 색, 고음은 밝은 색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책에서 놀라운 구절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내(테오필 고티에--미술에 조예가 깊은 프랑스의 시인) 청각은 엄청나게 개발되었다. 나는 색깔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초록색, 붉은색, 푸른색, 노란색의 소리들이 완벽히 구별되는 파장으로 내게 이르는 것이었다."(<공간의 시학> 중에서)

이른바 색청과는 정반대의 공감각(共感覺)입니다. 색깔을 보고 소리를 듣는 공감각입니다. 저도 그림 속 색깔에서 소리가 들리는지 귀기울여봤습니다. '청맹(聽盲)'이 따로 없습니다.

사전에 색청과 반대되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이름을 지어 보았습니다. '청색(聽色)'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사전에서 '색청'을 다른 표현으로 '색채 청각'이라고 했으니, 그 반대로 '음향 시각'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색채들은 빛의 파장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우리 눈에 인식됩니다. 색이란 빛의 파장 즉 빛의 물결침이니, 그러니까 공기 중에서 물결치며 전달되니 분명 진동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색깔별로 그 진동이 다르니 색의 소리를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민감한 청각을 지닐 수 있다면 말입니다!

화가 고갱의 말이 이 생각을 뒷받침해 줍니다. "음악처럼 색채는 떨림이다. 가장 보편적이며 따라서 가장 붙들기 어려운 내부의 힘을 색채는 날카롭게 포착한다."(<고갱--고귀한 야만인> 중에서)

세잔이 이단아 취급 받으면서 새로운 세계를 찾고 새로운 시도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정물화가에게 보는 것은 듣는 것이고 듣는 것은 보는 것일 것입니다. 그 인상을 재빨리 잡기 위해 그는 수채화를 유화의 밑그림으로 사용했습니다.

"유화 물감으로는 그가 관찰한 대상의 첫인상, 즉 대기는 얼마나 눈부시게 부서지며, 아침 풍경은 얼마나 영롱하며, 올리브 나무숲은 또 얼마나 반짝이는가를 잡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신속한 작업이 가능한 수채화로 순간적인 장면과 충분히 대면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화로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중에서)

이 '푸른 화병'에서도 그런 흔적이 보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것이지만 정물화는 "머물러 있는(停) 사물의 그림"이란 뜻이 아닙니다. "고요한 사물의 그림(靜物畵)"인 것입니다. 고요할 뿐이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요함'이라는 단어에는 움직일 수 있는 존재가 움직임을 멈춘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그 존재 특히 세잔에게 그 유명한 '세잔의 사과'에게 이젠 반대로 화가가 말을 건네는 경지까지 이릅니다.

"화가의 영혼이, 그려진 사과 속에 담기는 믿지 못할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다시 말해, 화가의 삶과 기쁨, 고뇌마저 정물화 안에 깃들여 있다. 세잔은 가장 평범한 사과를 인성을 지닌 존재로 끌어올렸다."(<세잔>(창해) 중에서)

그러니 자주 멈추어 볼 일입니다.

덧붙이는 글 |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덧붙이는 글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밀레 #만종 #오르세미술관전 #세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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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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