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페우스여! 이 세상을 위해 수금을 켜라

[이미지 산책 5] <오르세미술관전> 5

등록 2007.08.29 17:25수정 2007.08.2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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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페우스', 귀스타브 모로, 154 x 99.5 cm ⓒ 오르세미술관

우리들의 주인공 오르페우스는 평온한 얼굴을 한 채 목이 잘려 있습니다. 그의 머리를 무슨 물건인지 모를 도구 위에 얹고, 슬픔과 담담함의 얼굴을 한 채 젊은 여인이 서 있습니다. 위쪽 절벽 위에는 피리 부는 사람이 있고, 아래 발치에는 거북 두 마리가 기어가고 있습니다. 아리따운 여인의 옷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른쪽에는 환한 대지 밑으로 강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우면서도 섬뜩한 그림이 처음에는 눈길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 그림 앞에 방학을 맞이한 어린이들이 서 있기도 합니다. '저런 그림을 아이들에게 보여줘도 되나' 싶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할 내용의 그림입니다. 책을 뒤집니다. 그리고 이내 이 그림 뒤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저 아리따운 여인과 죽어 있는 오르페우스와는 이야기 전개상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한 젊은 여인이 헤브로스 지방의 트라키아 강가까지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뤼라를 경건하게 거둔다' 하는, 원래의 이 그림 부제가 붙어 있지 않아 생기는 혼돈입니다.

자! 이제 이 그림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다음의 내용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중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윤기님은 이 책의 지명, 신의 이름을 영어이름이 아니라 원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야기는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에서 시작됩니다.


...제우스는 시나 노래를 담당할 신들이 없음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제우스는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를 찾아가 동침했다. 그리고 므네모쉬네는 열 달 후 아홉 자매를 낳았는데 그들이 신들과 인간 세상의 온갖 예술을 담당하게 될 무사이(영어로 뮤즈) 여신들이다. 이들은 자리만 어우러지면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 중 막내 칼리오페는 현악과 서사시를 맡았다. 그런데 음악의 신 아폴론이 이 막내를 사랑했다. 음악의 신과 현악기의 여신이 만난 것이다. 그리하여 칼리오페가 아들을 낳으니, 그가 천하제일의 명가수라 할 오르페우스다.

오르페우스는 아버지 아폴론에게서 현악기의 일종인 뤼라(영어로 리라), 즉 수금 한 대와 연주하는 기술을 물려받았다. 그의 뤼라 켜는 솜씨는 정말 훌륭했고 노래도 잘 불렀다.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 나무, 바위도 그 가락에 반했다.

나이가 들자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에우리디케)와 혼인했다. 결혼의 신 휘메나이오스도 참석했다. 그러나 그는 이 둘의 결혼식에서 축복을 해 주지 않았다. 뭔가 미래의 석연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나 보다.

결혼한 지 열흘이 채 못 되어, 에우뤼디케는 친구들과 올림퓌스 산 템페 계곡으로 꽃을 꺾으러 갔다. 그런데 이곳에는 양을 돌보면서 꿀벌을 치는 아리스타이오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호기심으로 에우뤼디케에게 말을 붙여보려고 했다. 그녀가 새색시인 줄 몰랐던 것이다. 정숙한 에우뤼디케는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그런데 아리스타이오스가 따라오는 것이다.

에우뤼디케는 달아나다가 그만 저승의 안내자인 독사를 밟고 말았다. 독사는 에우뤼디케의 발뒤꿈치를 물었고, 에우뤼디케는 죽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깊은 슬픔에 빠져 탄식했다. 그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 여신에게서 사건의 내막을 듣게 된다. 그리고 에우뤼디케가 저승의 왕궁에 있음을 알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저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뤼라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던 것이다. 저승의 강에 다다랐을 때 수금을 뜯어 뱃사공 카론을 감동시켜 강을 건넜다.

그리고 저승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 앞에서 수금을 켜고 노래를 불러 그들 또한 감동시켰다. 하데스는 에우뤼디케를 데리고 오게 한다. 그리고 저승을 벗어나게 허락한다.

그러나 조건을 건다. 저승을 벗어날 때까지 에우뤼디케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된다는. 산 자와 죽은 자는 눈길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은 별로 힘들지 않게 저승 길을 거의 빠져나왔다. 그러나 길고 긴 시간이었다. 달빛이 드는 동굴 입구에 이르러서다. 오르페우스는 아내가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싶어 그만 뒤를 돌아다보고 말았다. 결국 에우뤼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떨어지고 만다.

오르페우스는 한탄과 절망과 저주의 노래를 부르며 몇 달을 트라키아 땅의 어느 동굴에 은거했다.

그때 트라키아 처녀들이 미색의 오르페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갖은 수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에우뤼디케와의 슬픈 추억에 잠겨 여자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때 포도주의 신을 섬기는 디오뉘소스 축제에 다녀온 처녀가 흥분한 나머지 창을 던진 것을 필두로 처녀들은 오르페우스를 죽이고 만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을 헤브로스 강에다 처넣는다. 제우스는 오르페우스의 수금을 거두어 별자리로 박아주었다. 오르페우스의 혼령은 다시 저승으로 내려가 사랑하는 에우뤼디케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뤼라는 고대 그리스의 현악기로 'U' 자나 'V' 자와 비슷하게 생겼고 하프처럼 손으로 뜯으며 연주하는 악기입니다. 그림을 보면 'V' 자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뤼라 위에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얹은 것은 화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됩니다.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뤼라를 같이 그려내기에 이만한 장치가 없습니다. 이 그림 부제의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뤼라를 경건하게 거둔다' 하는 내용처럼 뤼라는 오르페우스에게 분신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뤼라와 여인의 모습이 아름답고 정교하게 그려진 것도 화가 귀스타브 모로가 고고학 문헌과 여행담에서 모티프를 찾아 재현한 것입니다. 아마도 그림 뒤 피리 부는 이는 오르페우스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림 밑의 거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찾았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거북을 상업, 학술, 체육 등을 관장하는 신 헤르메스와 관련짓는다. 그가 거북의 등을 이용해 기타라는 현악기를 만들어 태양신 아폴로를 유혹했기 때문이다."(<한국문화상징사전> 중에서)

여기서 기타는 수금 즉 뤼라를 말하고, 헤르메스는 저승과 이승을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는 전령신입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뤼디케 그리고 헤르메스가 같이 새겨진 벽화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폴로는 음악을 관장하는 태양신인 아폴론의 로마식 이름입니다. 화가의 상상력은 뤼라가 그려진 그림에 뤼라의 모체라고도 할 수 있는 거북을 그려넣게 한 것입니다.

신화에는 무사시 여신들이 오르페우스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낸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까지 수습했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그림 속 젊은 여인이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뤼라를 무사시 여신들에게 전해주는 내용도 없습니다. 어찌어찌해서 뤼라가 제우스에게 가고, 제우스는 그걸 별자리로 박아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그러니 오르페우스의 죽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트라키아 처녀들이 오르페우스를 유혹하려 했을 만큼 빼어난 외모를 지닌 것만은 사실이고, 그녀 또한 그 얼굴에 반했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리고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수금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떠내려가자 강의 양 둑도 그 슬픈 노래에 물노래로 화답했다" 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만큼 이 여인도 그 노랫소리를 들었을 것이고요. 그림 뒤 묘사된 트라키아 강가에서 울려나오는 노랫소리가 들리시나요?

"'오르페우스'는 화가의 역할에 대한 그림으로, 오르페우스와 같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노래를 부르는 이가 화가임을 말해 준다. 이성간의 갈등,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 선과 악의 의미, 이런 것들이야말로 모로가 그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주제였다."(<모던 유럽 아트> 중에서)

위 그림과, 음악가 글룩의 가곡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이 신화이야기는 예술가들에게 창작 모티프가 되어 주었습니다. 모로 자신 대담하게 무섭고 엄숙한 주제를 다루는 것을 꺼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처음에는 비웃음의 이유가 되었지만, 나중에 모로는 인정을 받게 되고 덕분에 성격도 '원만해' 졌습니다. 화가도 인간이니까요.

오르페우스의 수금 소리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위로받고 원한을 풀고 시름을 잊어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뭇가지를 휘게 하고, 바위가 자신의 단단한 성질을 누그러뜨리는 노랫소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화가의 그림들이 그럴 수는 없겠는지요. 예술이 그럴 수는 없겠는지요.

신화 이야기를 소재로 한 그림을 끝으로 <오르세미술관전>의 중요 작품 감상을 끝맺습니다. 전시회 폐막 날짜도 다가오네요. 한 분이라도 더 진품을 감상하라고,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전시 작품에 대해서 글을 쓰겠다고 다짐하던 터라 부지런히 기사를 올렸습니다. 다음 기사부터는 아직 전시 기간에 다소 여유가 있는 <'빛의 화가 모네'전>으로 넘어갑니다. 계속 저를 따라오실 거죠?

덧붙이는 글 |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02-322-0071

덧붙이는 글 <오르세미술관전> :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 9월 2일까지.  02-32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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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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