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추석에 돌아가신 그 분을 아십니까

'인류사에 유일한 4대 독립운동가 가문' 신용우-신규식-민필호-김준엽

등록 2007.09.21 08:25수정 2007.09.2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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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추석은 9월 25일이군요. 뜬금없이도 저는 80년 전 9월 25일에 돌아가신 그 분을 한 번 생각해 보시라고 권합니다. 그 분은 예관 신규식입니다. 선생은 1922년 9월 25일에 죽었습니다. 상해 프랑스 조계 어양리 5번지에 있는 허름한 2층 가옥에서였지요.

당시 그는 43세의 중년신사였습니다. 그의 카이저 수염은 힘없이 볼을 타고 내려온 눈물로 젖어 있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외마디처럼 짧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임종하던 누구도 처음에는 그 유언이 무슨 말인지를 몰랐습니다. 그는 "정부, 정부"라고 정부를 두 번 토해내고는 영원히 떠났습니다.

슬프도다! 나라의 수치와 욕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경쟁의 와중에서 진멸할 위기에 처해 있도다.
무릇 살려는 자는 죽고 죽음을 기약하는 자는 삶을 얻을 터인데....

을사늑약 직후 25세 청년 신규식은 충정공 민영환의 <2천만 동포에게 고함>을 다시 한 번 처절히 읽고 나더니, 독약 아고니친을 성큼 입에 넣습니다. 그는 민충정공을 따라 순국하려 했던 것입니다. '순국(殉國)'에서 '순'은 따라죽을 순 자이니, 말 그대로 그는 나라를 따라 죽으려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부인 조정완의 슬기로운 구급으로 목숨을 건집니다. 다만 약발이 시신경을 건드려 그는 사시가 되고 맙니다. 사시를 우리말로 하면 '흘겨보기'기 됩니다. 그리고 흘겨보기를 다른 한자어로 바꾸면 '예관'이 되지요. 그 날로부터 선생은 자기의 호를 예관으로 정해 썼습니다. 예관 신규식, 그는 처참히 망해 버린 조국을 정시하기가 싫어 사시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1880년 충청도 문의에서 태어난 그는 문무를 겸비한 소년으로 성장합니다. 그는 한성외국어학교와 경사육군사관학교를 다녔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문과 무가 함께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을사늑약 후 자살을 기도했던 그는 끝내 경술국치로 나라가 결딴나자 분연히 총을 들고 서소문으로 나가 구식군대의 봉기에 가담합니다. 그의 옆에는 훗날 독립군 장군이 되는 노백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병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그의 슬픔은 깊어만 갑니다. 남편이 또다시 자살을 기도할 것이 두려워진 아내 조정완은 친정에 가서 아버지와 담판하여 자금을 만들어 냅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한양 조씨 종손이자 경기도 부호였습니다.

꽃이파리에 흙먼지가 이는 날이었습니다. 신규식의 준마는 북으로 달립니다. 강산의 살구꽃 진달래가 흔들거리고 있었습니다. 흰나비 노랑나비들이 흙바람에 쏠렸고 제비들이 낮은 허공을 화살같이 비행하는 들판이었습니다. 바람으로 잔설 위의 아지랑이가 사그라지고 뻐꾸기 울음이 유달리 구슬펐는데 숲 속의 부엉이는 그저 눈만 꿈벅이고 있었습니다. 신규식의 준마는 아무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그의 말에는 지금 계산으로 무려 13억 원의 현금 자루가 실려 있었습니다. 그가 말에서 내린 곳은 중국 땅 단동이 바라보이는 신의주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이디어에는 상해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차와 배를 번갈아 타며 상해 진입에 성공합니다. 그는 가져간 돈의 절반을 손문의 혁명대에 배팅합니다. 이후 그는 손문은 물론 중국 굴지의 혁명가들인 황홍, 송교인, 진기미, 당계요 등과 우호를 돈독히 합니다. 그는 상해에 박달학원을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길러냅니다. 여기에 이범석과 민필호라는 소년이 찾아들지요.


선생은 100명에 가까운 조선 청년을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보내고 지원했습니다. 또한 선생은 <동제사>를 결성합니다. 동제사란 '물을 함께 건너자'는 뜻의 이름입니다. 망국의 물을 건너자는 의미일 겁니다. 바로 이 동제사가 없었더라면 몇 해 후 임시정부가 조직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기에 동제사는 우리가 훈장처럼 여기는 상해임시정부의 모태입니다.

선생의 집은 독립투사들의 기숙사나 다름없었습니다. 박은식, 신채호 등의 기라성들이 선생의 집에 기식하며 적지 않은 경제적 원조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선생은 대망의 임시정부를 결성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그는 일절 보직을 사양합니다. 그 전에 간도의 거목 이상설과 제휴하여 당을 만들었을 때에도 모든 요직을 다 양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신 선생은 명저 <한국혼>을 저술합니다, 이 원고는 상해 유수 출판사에서 자원 출간합니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예관은 손문과 필적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놀랍게도 선생이 동경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을 상해에서 원격 지원한 자료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2`8 선언 전 장덕수를 일본으로 잠입시킨 일과 3`1운동 후 정화를 국내로 가게 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게 한 일 등이 모두 선생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의 직무유기가 시작됩니다. 선생은 내심 속을 썩이면서도 같은 독립운동가를 비난하는 일을 금기로 여겼습니다. 신채호나 이동녕 등은 이승만을 거칠게 비방했지요. 이 때 나이가 비슷한 안창호도 그리고 김구도 선생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여운형은 조금 세속적이었고 신익희는 눈치가 아주 빨랐지요. 이광수는 총독부 밀사에게 포섭되어 국내로 도망쳤고요.

임시정부의 분열은 선생에게 지독한 신경쇠약을 일으키도록 만듭니다. 이승만이 임시정부를 방기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리면서 선생에게 전권을 맡깁니다. 사실 애초부터 선생이 맡았어야 하는 일입니다. 이승만은 학벌과 나이가 다른 이보다 우월했을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선생은 국무총리 겸 법무장관 직을 받아, 거덜난 임시정부를 수습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아울러 선생은 박찬익 민필호 등을 대동하여 손문의 광동정부를 방문합니다. 손문은 선생을 환대하면서 임시정부를 승인해 줍니다. 사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이루어 낸 전무후무한 외교적 성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리강회회의 진입 실패로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이 다시 도집니다. 임시정부가 와해 위기에 빠지자 선생은 매일 밤을 통곡으로 지새웁니다. 선생은 잘 우는 기질과 약간 염세적인 세계관을 타고났는지도 모릅니다. 설상가상으로 임시정부를 지원해 주던 손문의 광동정부가 진형명의 반란으로 아주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됩니다. 선생의 좌절은 더욱 깊어집니다. 그는 갑자기 식음을 전폐합니다. 아마 그는 분열하는 한국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 겁니다. 식음 전폐 25일째가 되는 9월 25일, 그는 유령 같은 헛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나에게는 죄가 없소이다."

임시정부의 분열과 반목상을 보고 누군가를 탓하고도 싶었겠지만, 그는 생전 그것을 안으로 삼키며 자기에게는 죄가 없다는 말로 대신하지는 않았는가 싶습니다. 그러다가 선생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정부, 정부"라고 외마디를 토하고는 영면했습니다. 이렇게 임시정부가 꼭 유지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그는 떠났습니다.

선생의 부친 신용우 공은 정2품 의금부도사였는데 나라가 망하자 홀연히 의병장으로 나섰습니다. 선생의 동생 건식은 상해의 독립운동가로 활약했으며, 선생의 조카 신필호는 국내에서 세브란스 의사를 하며 독립운동가를 은신시키고 자금 등을 지원했습니다. 선생에게는 외동딸 명호가 있었는데 훗날 이 소녀와 결혼한 사람이 민필호입니다.

선생의 사위가 된 민필호는 나중에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을 맡습니다. 민필호는 중국군 고급장교 신분을 유지하며 임시정부의 자금 조달을 거의 도맡았습니다. 그는 중경으로 쫓겨간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중경 청사를 마련한 것도 민필호입니다. 민필호에게도 딸이 있었습니다. 딸의 이름은 민영주였습니다. 민영주는 독립군 지대장 이범석의 비서를 하다가, 학병에서 탈출하고 중경임시정부를 찾아온 청년 김준엽을 만나 결혼합니다. 주례는 같은 학병 장준하가 섰지요. 신용우, 신규식, 민필호, 김준엽. 이렇게 4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한 예는 세계 역사에도 없다고 합니다.

부기: 집안 좋다는 말이 있지요. 그런 말은 이런 분들한테 써야 제격 아니겠습니까? 요새는 재벌들한테 집안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런데 예관 신규식 선생의 독립운동 서훈은 이승만보다 아래입니다. 상해 공동묘지에 있던 그의 유해가 조국에 온 것은 선생이 돌아간 지 74년 후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 상해에 다녀왔습니다. 임시정부 청사에도 가 보았지요. 그 곳 어디에도 신규식 선생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참으로 역사처럼 불공정한 게 또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9월 25일은 추석이자 신규식 선생이 돌아가신 날입니다.
#4대독립운동가 #신규식 #민필호 #김준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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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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