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3000원이 아까워 책을 못 본다면

[헌책방 나들이 124] 서울 낙성대 <흙서점>

등록 2007.10.17 09:48수정 2007.10.17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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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앞 책방 앞 너른 마당에 책을 잔뜩 벌여 놓기도 합니다. 밖에 나온 책은 한 권에 1000원씩입니다. ⓒ 최종규

▲ 책방 앞 책방 앞 너른 마당에 책을 잔뜩 벌여 놓기도 합니다. 밖에 나온 책은 한 권에 1000원씩입니다. ⓒ 최종규


<1> 서울 나들이


오늘은 마음먹고 책방 나들이를 떠나기로 합니다. 아침부터 가방을 챙기고 집안 갈무리를 합니다. 사진기 두 대와 필름을 살핀 뒤 지갑에 돈이 얼마 있는가 봅니다. 살림 옮기랴 도서관 열어 꾸리랴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느라 책방 한 곳 느긋하게 찾아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앞도 옆도 뒤도 못 보고 제자리걸음만 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멀리, 그러니까 서울로 나들이를 가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사람이 그다지 안 많으리라 생각한 낮에 전철을 타고 서울에 갑니다. 신도림에서 갈아타 낙성대로 달리는 전철은 그지없이 사람밭입니다. 서울에는 서울사람뿐 아니라 서울 둘레에 사는 사람도 수없이 드나들며 일을 하거나 볼일을 볼 테니, 사람이 뜸한 때란 없을지 모릅니다. 아니, 없겠지요. 사람들 잠드는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아니고는 사람 뜸한 때란 없겠지요. 알고는 있으나 덜 하기를 바라고, 알면서도 서울로 나들이를 오게 됩니다.

 

다른 모든 문화와 시설이 그러하듯, 헌책방도 서울에 가장 많거든요. 책읽는 사람은 서울에 가장 많고, 책팔림새도 서울이 가장 높습니다. 고물상이며 아파트며 폐지수집상이며, 헌책이 나올 만한 샘터도 서울이 가장 많습니다. 이리하여 몸이 좀 고달프게 되더라도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무뚝뚝한 얼굴과 몸짓으로 부대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마음이 괴롭고 힘겹더라도 서울 나들이를 합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세상이고, 하는 수 없는 우리 모습이기에 이렇기는 한데, 늘 ‘그래도’를 떠올립니다. ‘언제까지’도 생각합니다. ‘그래도 서울 나들이를 꼭 해야겠느냐?’, ‘언제까지 서울 나들이를 해야겠느냐?’

 

지금으로서는 문화며 시설이며 온통 서울로만 쏠리고 있고, 서울로 가야만 빵부스러기라도 건질 수 있다고 하지만, 빵부스러기조차 건지기 어렵고 문화와 시설 모두 뒤떨어지거나 어설프거나 모자란 지역 한 귀퉁이에서 그 지역 나름대로 이웃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서울하고는 다른 문화와 시설’로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으면 좋지 않겠느냐 헤아려 봅니다.

 

서울에 있는 모든 것이 서울 아닌 곳에도 있어야 합니다. 서울에서 누릴 수 있는 모든 문화를 서울 아닌 곳에서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서울처럼 인천에도 헌책방이 많다고 좋은 일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서울처럼 지하철이 촘촘히 있다고 해서 더 좋을 수는 없다고 느낍니다. 있는 만큼, 알맞는 만큼 함께할 수 있을 때가 더 낫다고 느낍니다.

 

더 많은 책을 읽는 일이 나쁘지는 않으나, 저마다 자기한테 알맞은 만큼 책을 찾아서 읽는 일이 더 좋다고 느껴요. 더 좋은 책이 있다면, 그 더 좋은 책을 읽는 일이 나쁘지 않겠으나, 덜 좋은 책이라고 해도 우리들 마음눈으로 잘 새기고 북돋우면서 제 마음밭을 일굴 수 있으면 한결 좋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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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꽂이 한켠 묶음으로 된 책은 끈으로 묶인 채 책꽂이 위쪽에 얹혀져 있곤 합니다. 이곳은 책 드나듦이 잦아서, 눈에 뜨이거나 자기가 바라는 반가운 책이 있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장만하지 않으면 다른 분이 금세 낚아 갑니다. ⓒ 최종규

▲ 책꽂이 한켠 묶음으로 된 책은 끈으로 묶인 채 책꽂이 위쪽에 얹혀져 있곤 합니다. 이곳은 책 드나듦이 잦아서, 눈에 뜨이거나 자기가 바라는 반가운 책이 있을 때, 바로 이 자리에서 장만하지 않으면 다른 분이 금세 낚아 갑니다. ⓒ 최종규


<2> 예전 책을 보면서도


볼을 타고 흐르는 땀줄기를 닦으며 책을 읽으며 달리는 지하철은 낙성대역에 멈춥니다. 히유. 한숨을 길게 쉬며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사진기 가방 든 손에 다시 힘을 주고 걷습니다. 예전에는 계단이었으나 이제는 에스컬레이터로 바뀐 4번 나들목으로 나갑니다. 에스컬레이터는 틀림없는 편의시설입니다만, 오르내리는 길을 이것으로 갈면서 아주 좁아져서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계단은 계단대로 널찍하게 그대로 두면서, 승강기를 좀더 넉넉히 놓으면 더 낫지 않을까요. 두 다리 성한 사람은 계단을 타야 옳다고 느낍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야 할 만한 분들이라면 아예 승강기를 타도록 마음써 주는 편이 낫고, 승강기 자리를 넓힌다면 짐 많이 든 분이나 바퀴걸상 타는 분도 한결 손쉽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햇볕 밝은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한 번 한숨. 지난날 '삼우서적'이 있던 자리를 흘끔 바라봅니다. 김밥집이 되어 버린 옛 헌책방 터. 저 자리에 헌책방이 있었음을 떠올릴 만한 사람은 얼마나 될는지.

 

'흙서점' 앞에 닿습니다. 유리문 안쪽으로 들여다보이는 책방 골마루에는 벌써부터 책손으로 북적북적. 늘 북적대는 수많은 책손들은 ‘이 헌책방에 눈에 뜨이는 좋은 책이 들어오기 무섭게 쏙쏙 뽑아’ 갑니다. 책도 많이 들어오고, 들어오는 만큼 또 많이 나가고. ‘좋은 책은 오래 꽂혀 있기보다는 그때그때 바라는 책손이 얼른 알아보고 사 갈 수 있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흙서점' 사장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책손이 많아서 책드나듦이 아주 빠릅니다.

 

셈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책을 살핍니다. 먼저 <노신의 마지막 10년>(임현치·김태성 옮김, 한얼미디어,2004)란 책을 고릅니다. <낡은 카메라를 들고 떠나다 (2)>(이상엽, 임재천, 강제욱, 노순택, 성남훈, 최승희, 청어람미디어, 2006)도 보입니다.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이 퍽 보이는군요. 헌책방 책손들은 이럴 때 흔히 ‘횡재했다’고, ‘대박’이라고 하지만, 이런 책을 고르는 제 마음은 썩 가볍지 않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책을 보며 절을 하면서도 그다지 내키지 않습니다. 다만, 요즈음 책값이 너무 비싸기 때문에 ‘온돈 주고 사기에는 벅차다’고 느꼈던 책을 구경할 수 있으니 살림살이에는 보탬이 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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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저씨와 책손 한 사람이 고른 책을 책방 아저씨가 부지런히 싸 줍니다. 겉에는 신문을 대고 책이 다치지 않도록 야무지게. ⓒ 최종규

▲ 일하는 아저씨와 책손 한 사람이 고른 책을 책방 아저씨가 부지런히 싸 줍니다. 겉에는 신문을 대고 책이 다치지 않도록 야무지게. ⓒ 최종규


.. 그러나 그 같은 혁명이 정작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났는지는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사진의 혁신이 일어났는지, 더욱더 가치 있는 사진기록들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말이다. 생산과 유통, 소비의 패턴은 분명 바뀌었지만, 정작 가치 있는 이미지들이 개인과 가족들에게, 또는 사회에 남겨지고 있을까? 혹시 이런 것들이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데, 글로벌스탠더드라는 미명 하에 소규모 자본과 생산의 다양성을 초토화시키고 몇몇 거대 자본의 집중화만 심화된 것은 아닌지 충분히 의심해 볼 일이다 ..  <12쪽>


곰곰이 헤아려 보면, ‘온돈 주고 사기에 벅차다’고 느끼는 책은 저한테 그다지 쓸모가 없거나 도움이 안 되는 책인지 모릅니다. 책값이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저한테 쓸모가 있거나 도움이 되는 책은 ‘이야, 반갑구나!’ 하는 마음으로 덥석 집어서 책값을 치릅니다.

 

지지난주, 서울 연신내에 있는 '문화당서점'에서 자그마치 30만원이나 치르며 책을 장만했습니다. 책값을 치르며 눈알이 뱅글뱅글 돌았지만, 30만원어치 고른 책에서 덜어낼 책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날, 정문기 선생이 쓴 <한국어도보> 1977년 판을 만났습니다. <한국어도보>는 우리네 물고기 문화와 삶을 알뜰히 그러모아 한 권으로 마무른 큰책. 물건이 없어서 구경하기조차 힘든 책인데 깨끗하게 간수된 판으로 만났으니 없는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책 <26년(1)>(강풀, 문학세계사,2007)이 보입니다. 본 김에 함께 집습니다. <인권론>(카렐 바삭·박홍규 옮김, 실천문학사,1986)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글쓴이는 어떤 분인지 잘 모르지만, 옮긴이 이름을 보고 집어듭니다.


.. 그러나 이 책은 종래의 그 침략자들이 내세운 그런 류의 인권법에 관한 것만이 아님을 우선 변명거리로 삼을 수 있다. 사실 우리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해서 인권유린으로 시종해 왔던 구미 중심의 인권 논의가 정작 지금까지 판쳐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또한 구미나 일본 정도에서의 논의 역시 지난날의 침략적 요소를 반성하지 못한 채 자국 중심으로 시종하여 왔다는 점에서도 여전히 위선적이다 ..  <옮긴이 말>


다른 인문학 책을 보아도 비슷하게 느끼는데, 우리 사회와 문화와 경제와 역사를 다룬 책은, 1970년대 것이든 1980년대 것이든 2000년대에 나오는 책하고 거의 바뀌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학문이 제자리걸음인지는 모르겠고, 우리 세상흐름이 그대로라고, 거의 고인 물이라고 느낍니다.

 

국가보안법 문제는 1970년대나 2000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인권짓밟기 문제 또한 1980년대와 2000년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노동자 권리가, 학생 권리가, 농사꾼 권리가, 집안일 돌보는 여성 권리가, 장애인 권리가, 보통사람들 권리가 얼마만큼 지켜지고 있는가요. 힘과 이름을 움켜쥔 이들을 뺀 나머지 사람들 권리는 얼마만큼 보살펴지고 있는가요. 현장 사례만 늘어나고 밑바닥 문제는 한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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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마루 한켠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손님이 뜸하거나 조용할 때면 신문이나 책을 집어들어 읽으려 하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때란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까지 잠깐 자리에 앉아 다리쉼을 할 겨를조차 없을 만큼 바쁩니다. ⓒ 최종규

▲ 골마루 한켠 헌책방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손님이 뜸하거나 조용할 때면 신문이나 책을 집어들어 읽으려 하지만, 이렇게 느긋하게 쉴 수 있는 때란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을 때까지 잠깐 자리에 앉아 다리쉼을 할 겨를조차 없을 만큼 바쁩니다. ⓒ 최종규

 

<Poche-encyclopedie : Photographie>(jeunesse,1985)는 “손바닥 만한 백과사전” 스물여덟 권 가운데 하나로, 사진 이야기를 다룹니다. 백과사전 하나 엮자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든다고 합니다만, 이렇게 손바닥책으로 자그맣고 가볍게 엮어낸다면, 적은 돈으로도 푸지고 너른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겠지요.


<3> 사진책 잔뜩


<Bangladesh : Mosac in green>(Ministry of foreign affairs,2004)은 방글라데시 사진책. 방글라데시 사람들 삶터와 자연 이야기를 다룬 사진책은 여태껏 본 일이 없습니다. 저는 처음 만납니다. 사진 높낮이가 좀 떨어지지만, 이만한 책이 어디냐 싶은 마음에 덥석.

 

빛깔있는 사진은 따로 찍어서 붙인 <Roloff Beny-Island Ceylon>(Viking press,1971) 또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스리랑카 사람들 삶터와 자연 이야기를 다룬 사진책. 1971년에 나온 책이면서도 사진을 오려붙이기 하다니.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에서도 1970년대에는 오려붙이기를 넘어서지 못했지.

 

<Karel Plicka-Praha ve fotografii>(Orbis,1960)는 체코 프라하 삶터와 사람들 삶을 담아낸 사진책.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사진. 흑백으로도 문화유산과 문화유적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면, 임응식 님이 담은 종묘 사진도 흑백이었어요. 우리네 삶터도 꼭 빛깔사진으로 찍어야만 제대로 ‘기록’ 되는 건 아닙니다.

 

<a day in the life of America>(Collins,1986)는 1986년 3월 2일, 온누리 사진가(그래 보아야 유럽과 미국 사진가지만) 수백 사람이 미국 구석구석을 하루 동안 돌아다니며 찍은 사진 가운데 200장을 추려서 엮어낸 사진책. 이 묶음책은 해마다 꾸준히 나옵니다. 아무튼, 저마다 다른 사진밭을 일구어 나가는 사진가들이 ‘자기 나름대로 바라보기에 어느 한 나라 삶을 사진 한 장으로 보여준다면 이 모습이다!’하고 생각하는 사진을 찍어서 모은 책으로, 사람마다 다 다르게 보고 있음을, 아니 우리 모두는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고 있음을 찬찬히 헤아릴 수 있어 반가운 책입니다.

 

큼지막한 일본 사진책도 네 권 봅니다. <ふると日本列島 (1) 北海道>(每日新聞社,1986), <ふると日本列島 (3) 關東>(每日新聞社,1987), <ふると日本列島 (4) 信越ㆍ北陵>(每日新聞社,1986), <ふると日本列島 (6) 近畿>(每日新聞社,1987). 사이에 몇 권이 비지만, 짝을 다 맞춘 판을 바랄 수 없구나 싶어서, 짝 다 맞춘 판 찾는 데에 애먼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짝이 안 맞더라도 이 책에 담긴 사진부터 알뜰히 즐기면 더 낫다고 느껴서 고릅니다. 이 사진책은 ‘중앙일보사도서관장서’로 1988년 6월 4일에 사들였다는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사진 찍는 사람도 많고 사진잡지도 많은 일본은, 제 나라 삶터를 참 꾸준하게 찍고 다시 찍고 또 찍으며 책으로 묶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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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아저씨 손 수없이 많은 책을 만져 온 손과 수없이 많은 책이 놓였다가 떠나간 셈대. ⓒ 최종규

▲ 헌책방 아저씨 손 수없이 많은 책을 만져 온 손과 수없이 많은 책이 놓였다가 떠나간 셈대. ⓒ 최종규

 

<4> 실랑이


이럭저럭 고른 책을 셈대에 올려놓습니다. 가방에는 다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따로 묶어야 하는데, 묶어야 하는 책짐도 하나가 아닌 둘이 되는군요. 등에 멜 가방 무게만 해도 20kg이 넘을 듯. 두 손에 들어야 할 책꾸러미도 하나에 10kg 가까이 될 듯. 가로세로 37cm×27cm 큰 사진책 한 권만 해도 얼마나 무거운데요. 날도 더운데 책꾸러미 들고 다니자면 땀깨나 쏟고 다리도 후달달 해야겠습니다.


(책손 1) “3000원이요? 그렇게 비싸요?”
(책손 2) (어떤 책을 골랐는지 옆에서 지켜보다가) “3000원이면 되게 싸네.”
……
(책손 1) “왜 이렇게 천대를 해?”
(책손 2) (끝내 책을 안 사고 나가는 책손 1 뒷모습을 보며) “나가면서 중얼중얼대는구먼.”
(헌책방 아저씨) “다 그래요. 손님들 …… 어떤 분은 책을 읽을 때 침도 안 묻히고 책도 안 접어요. (책이 다치지 않게) 이렇게도 펼쳐지 않고, 고개가 일로 가고 절로 가고, 그렇게 봐요. …… 나도 (손님한테 책을) 살 때, (책장이) 접힌 게 있으면, 판 사람을 욕하거든.”


제가 고른 책을 셈하기 앞서, 어느 젊은 아저씨가 책값을 셈했습니다. 그분은 헌책방 주제에 무슨 책을 그렇게 비싸게 부르냐며 잔뜩 투덜거리다가 나갔습니다. 가만히 보니, 새책으로 사자면 1만 5천원은 치렀어야 하는 책입니다. 그런 책을 3천원 달라고 했으니, 참 싸게 불러 준 값입니다. 그만한 책이면 7천원을 불러도 비쌀 수 없는 책이니까요.

 

그러나 그분은 책이 아닌 물건을, 그것도 싸구려 물건을 사러 헌책방에 오셨겠지요. 자기 마음에 알알이 담아낼 책이 아니라, 싸구려 물건 돈 몇 푼, 그러니까 천원 한 장쯤 던져 주고 가져가서 자기 처세에 쓸 마음이었겠지요. 어쩌면 천원짜리 한 장도 아닌 500원짜리 쇠돈을 던져 주고 갈 마음이었는지도. 어쩌면 이 낡아빠진 책을 왜 돈을 받고 파느냐고 빈정거리려던 마음이었는지도.

 

책 하나 만나는 기쁨은 모르는 채, 책 하나에 담긴 알맹이를 달콤하게 맛보는 즐거움을 모르는 채, 책 하나에 싱그러운 열매를 담아내고자 많은 사람들이 흘린 땀방울을 느끼면서 자기 삶을 더욱 드높이 가다듬는 매무새를 내버린 채, 책 하나에 당신 생계뿐 아니라 사람들한테 빛줄기 하나 건네고픈 헌책방 일꾼 손길을 느끼지 않으려는 채, 그저 허깨비만 보며 앞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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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쪽지 책방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손님들 모두한테 하나하나 말씀드릴 수 없어서, 쪽지에 적어 놓은 글이 책시렁 곳곳에 놓이거나 붙어 있습니다. ⓒ 최종규

▲ 알림쪽지 책방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손님들 모두한테 하나하나 말씀드릴 수 없어서, 쪽지에 적어 놓은 글이 책시렁 곳곳에 놓이거나 붙어 있습니다. ⓒ 최종규

 

그분은 단돈 3000원을 아꼈을지 모르나(책을 안 샀으니), 그 단돈 3000원으로 함께 품을 수 있던 너른 사랑과 믿음과 나눔 가운데 어느 하나도 받아안지 못하고 맙니다. 책에 담긴 앎조각을 넘어, 앎부스러기를 그러모은 사람들 슬기와 온삶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맙니다. 딱하네, 불쌍하네, 가엾네 하는 생각이 잇따릅니다. 하지만 그분은 자기가 딱하게 살고 있음을, 자기가 불쌍한 줄을, 자기 마음이 얼마나 가난하여 가여운가를 모르면서 오늘 하루도 하냥 앞으로만 앞으로만, 또 앞으로만 달리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 서울 낙성대 〈흙서점〉 / 02) 884-8454

2007.10.17 09:4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 서울 낙성대 〈흙서점〉 / 02) 884-8454
#헌책방 #흙서점 #헌책방 나들이 #서울 #낙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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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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