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으로서...일체 게재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며"

국방부 과거사위 '신군부 언론통제 사건' 조사결과 발표...보안사, 언론사 간부에게 각서 받아

등록 2007.10.25 14:04수정 2007.10.25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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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안윤학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안윤학

 

"○○○사 편집(보도)국장 △△△

 

본인은 ○○○사의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편집국장으로서 비상계엄령 해엄 후에 아래 사항을 준수하여 실천하도록 편집 취재기들을 적극 계도할 것이며, 아래 사항은 일체 게재하지 않을 것임을 양심에 따라 서약하며… (중략)

 

(1) 1979년 10월 26일에 선포된 비상계엄령이 해제되는 시점까지 계엄기간 중 검열을 통해 관제 조치된 기사문을 계엄해제 후에도 절대로 재게재하지 않을 것이며…
(2) 계엄기간 중 계엄사 보도처에서 검열관제기준으로 제시한 검열지침의 정신을 존중하여…"

 

신군부의 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가 지난 1981년 각 언론사의 사장 및 간부진을 만찬에 초청해 거둬들인 각서 내용이다. 보안사는 계엄(1979.10.26~1981.1.24) 당시 검열된 기사가 계엄해제 뒤에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같은 각서를 받았다.

 

국방부 내부 문서에 따르면, 이 각서에 대해 한 언론사 간부는 "그간 계엄사에서 보도 검열을 해주어 부담이 없었는데 이제 스스로 통제해야 하니 책임이 무겁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군부 언론탄압 확인돼...언론사 간부 "그간 검열해주어 부담 없었는데"

 

지난 1980년 이후 신군부가 언론탄압을 자행한 실상이 문서로 확인됐다. 익히 알려진 대로 신군부 내 보안사가 '언론반' 설치해 보도 검열을 감독하고, 언론인 강제 해직 및 언론사 강제 통폐합에 관여한 사실이 밝혀 진 것. 보안사는 비상계엄 당시 합동수사본부의 주축이었다.

 

아울러 보안사가 강제 해직된 언론인의 동향을 파악한 뒤 등급에 따라 취업을 제한했던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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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안윤학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위원장 이해동)는 25일 서울 용산 국방부에서 '신군부의 언론통제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안윤학

 

과거사위에 따르면, 보안사는 1980년 2월 정보처를 신설하고 대 언론 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설치했다. 또 이상재(전 보안사 언론반장)씨를 책임자로 한 '언론반'을 별도로 운영했다. 이는 과거사위가 최초로 입수한 문서인 '언론조종반 운영계획'에서 드러났다.

 

이 문서를 살펴보면, 이씨는 'K-공작'을 실시해 언론사 간부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들에 대한 회유작업을 벌였다. 또 이 공작에 따라 보안사령관과 언론사주 및 간부의 면담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언론인의 반응을 수집·분석했다. 이 같은 공작은 신군부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계엄해제를 대비해 신군부는 검열한 기사가 보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각 언론사의 간부에 각서를 쓰도록 강요하기도 했다.

 

언론인 회유 'K-공작' 벌여...해직 언론인 취업 제한도

 

신군부가 해직 대상 언론인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언론정화자 명단'을 작성한 사실도 밝혀졌다.

 

작성주체와 날짜가 표시되지 않은 이 명단에는 정화보류자 44명과 정화자 938명 등 총 982명의 이름과 등급이 기록돼 있다.

 

특히 이 문서에는 '정화사유'가 나와 있는데 국시부정(10명), 반정부(243명), 부조리(341명), 기회주의·무능(123명), 근무태만(3명),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퇴사·퇴임'(50명)과 기타(103명) 등이었다. 또 아무런 이유가 기재돼 있지 않은 정화 대상 언론인도 109명에 달했다.

 

더욱이 신군부는 강제 해직된 언론인에 대해서도 등급에 따라 취업제한 기간을 두었다. 영구 취업 제한 조치까지도 내렸다.

 

보안사가 1982년 7월께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숙정위해언론인' 문서를 보면, 보안사는 해직 언론인을 ▲A급, 극렬비판 인물로 순화가 불가능하며 지속적인 감시가 필요한 자 ▲B급, 비판활동 재개 가능성이 농후한 자로 미행 감시가 요구되는 자 ▲C급, 순화만으로 회유가능성이 있는 자 ▲D급, 자숙하면서 생계에 전념중인 자 등으로 분류해 동향을 파악했다.

 

보안사, 언론사 포기 각서도 받아...'정부 호응도' 통폐합 기준

 

과거사위에 따르면, 보안사는 언론사 강제통폐합과 관련해서도 '포기각서'의 문안을 작성하고, 각 언론사주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앞서 당시 청와대 비서관이었던 허문도씨가 '언론창달계획'을 작성하고, 이를 문화공보부 장관 이광표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부터 결재를 받아 통폐합을 강행했다.

 

또 보안사는 각 언론사의 보도 성향, 국가관·시국관 등 정부 시책의 호응도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 등을 지방지 통폐합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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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동 국방부 과거사위 위원장 ⓒ 안윤학

이해동 국방부 과거사위 위원장 ⓒ 안윤학

과거사위는 "언론인 강제 해직과 언론사 강제 통폐합은 국가 공권력의 위법한 행사이므로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공식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에게 공개 사과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해동 과거사위 위원장은 "피해를 받은 많은 언론인에 거듭 사과한다"면서 "앞으로 언론의 자유를 면면이 지켜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과거사위는 "'중앙일보 언론인 연행 사건(한수산 필화 사건)'과 '오홍근 테러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공개사과하고 보상해야 한다"며 "특히 한수산 필화 사건의 후유증세로 사망한 박정만 시인에 대한 추가조사도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두 사건은 한씨와 오씨가 각각 게재한 소설(중앙일보, 1981)과 칼럼(월간 중앙, 1988)에 대해 군이 '악의적'이라고 판단해 이들에게 폭행 등 보복행위를 가한 사건을 말한다.

 

한편, 과거사위는 이날 '10·27법난 사건'의 조사결과도 함께 발표했다. 법난 사건은 지난 1980년 신군부측 합동수사본부가 '불교계 정화수사계획(45계획)'을 수립, 같은 해 10월 27일 불교계 최대 종파인 조계종의 스님 등 관계자 153명을 강제로 연행·수사한 사건이다.

 

당시 합동수사본부는 3일 뒤인 10월 30일 포고령 위반 수배자 및 불순분자를 검거한다는 명목으로 군·경 합동병력 3만2076명을 투입해 전국의 사찰 및 암자 5731곳을 대상으로 일제히 수색을 벌이기도 했다. 

 

불교계는 그간 이 사건을 '국가권력으로부터 부당하게 탄압받은 법난사건'으로 규정하고 지속적으로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과거사위는 "조계종측과 명예회복 및 피해회복 방안을 협의할 것"을 정부에 제안했다.  

2007.10.25 14:04 ⓒ 2007 OhmyNews
#신군부 #전두환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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