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는 없다!

충남 강경에서 만난 소박한 교회 건축과 조형물

등록 2007.11.09 10:19수정 2007.11.09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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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문화재 제42호 강경북옥감리교회. ⓒ 안병기


강경에서 만난 문화적인 '덤'

곡창지대에 자리 잡은 소도시인 충남 강경은 금강에 접한 포구 덕택에 한때는 우리나라 굴지의 수산물 출하 항구로 떵떵거렸던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강점기에는 수탈의 전진기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해방이 되자, 일제는 이 도시에 자신들의 추잡한 껍데기를 남긴 채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렸다. 그로부터 5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잔재'들은 근대 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대접받으며 국가 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흔히 강경에 가면 젓갈을 한 바가지 듬뿍 퍼주고 나서 '덤'을 준다고 하지만, 우리가 강경에 가서 받을 수 있는 덤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일컬어지는 문화의 '덤'이다.

강경의 근대문화유산이라 해서 일제가 남긴 건축물만 연상하는 것은 오산이다. 지난 10월 27일, 강경 지역 문화재를 찾아 기행 하면서 만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미내다리도 아니요, 죽림서원도 아니다. 일제가 남기고 간 근대 문화유산은 더욱 아니다.

그날, 내가 강경에서 만났던 문화재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은 북옥감리교회를 비롯한 오래되고 소박한 교회 건축과 조형물이었다.

한옥교회가 가진 아름다움, 강경북옥감리교회

북옥감리교회는 북옥리에 있다. 강경의 상징인 옥녀봉의 턱 아래에 새색시처럼 다소곳이 앉아 있다. 서울의 북촌이나 전주 교동의 한옥마을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이런 걸 가리켜 서양말로 '데쟈뷰'라 한다든가.


도시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교회만 보다가 코딱지만한 북옥감리교회를 보자, 마음 속에 평화가 저절로 깃드는 느낌이었다. 건평 36평의 작은 목조 건물. 왜 우리는 이런 작고 소박한 교회를 가질 수 없는가. 왜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버리고 자꾸만 대형화로 치닫는가.

고백하자면, 내게도 크리스마스 때 나눠주는 무지개떡을 얻어먹으려고 교회에 몇 번 갔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굉주호 한복판쯤에 있었던 덕의리 교회였다. 잠깐이었지만, 초가집이었던 덕의리 교회에서의 '엉터리 신자 노릇'은 지금 생각하면 꽤 행복한 기억이다.

북옥감리교회 건물은 1923년 이인법 목사가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교회뿐 아니라 초기 기독교 건축은 대부분 한옥이었다고 한다. 자금의 문제와 함께 토착화 과정에서 오는 마찰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작용했을 터이다.

그러나 서양인인 신부나 목사들이 한옥으로 지어진 교회에 다소 불편함을 느꼈던 때문일까. 교회의 건축 양식은 점차 서양식으로 변해갔다. 그 결과 초기 한옥교회는 대부분 소멸하거나 개축 또는 신축함으로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강경 북옥감리교회는 교회건축사적으로 봐서 희소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건물의 조형성이 장방형 평면을 취함으로써 전통적인 비례를 벗어났지만, 평면 구성과 상부 가구구조는 초창기 한옥교회의 건축방법을 그대로 보여준다. 북옥감리교회는 한옥교회가 가진 아름다움을 무엇인가를 알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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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을 단 겹처마와 현관문. ⓒ 안병기


우선 건물의 처마를 살펴본다. 처마란 서까래가 기둥 밖으로 빠져나와 형성된 공간이다. 이 건물은 부연을 덧단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이다. 이렇게 서까래를 길게 뺀 이유는 여름을 시원하게 나기 위한 것이다.

처마의 끝인 추녀 부분은 말발굽처럼 긴 말굽서까래를 걸고 있다. 부챗살 모양의 선자서까래를 깔만한 공간이 없는 서민들의 살림집에서 볼 수 있는 서까래이다. 악센트를 주듯 처마 서까래 끝에 칠한 흰색이 이 건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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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부분.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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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내부. 외곽기둥보다 높은 기둥인 고주가 천장을 받치고 있으며 고주에 대들보가 결구되어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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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위의 십자가와 등 ⓒ 안병기


안으로 들어가서 가구를 살펴본다. 1고주 9량 집이다. 종단면상에 도리가 9개가 걸려 있다는 얘기다. 고주에 결구되어 있는 대들보 위에 중보가 얹혀져 있으며 그 위에 종보가 얹혀 있다. 벽은 벽돌을 쌓은 후에 회를 발라 마감했다. 흰색이 아주 정갈한 느낌을 준다. 천장은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켰다. 예전에 전주 한옥마을에 살 적에 자주 다녔던 전통찻집들의 천장들도 하나같이 저랬다. 노출된 서까래가 드러내는 조형미가 아주 멋스럽지 않은가.

북옥감리교회는 초기 기독교 한옥교회의 건축양식과 가구기법 그리고 내부 형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강 연안지역의 기독교 선교 역사의 상징적 건축물인 만큼 오래도록 잘 보존했으면 싶다.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 강경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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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터를 지키는 가옥.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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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면에서 바라본 강경침례교회터와 기옥. 한 등산객이 안내판을 읽고 있다. ⓒ 안병기


북옥감리교회 옆에 있는 약수터에서 약수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옥녀봉을 올라가면 정상 부근에서 쓰러져 가는 스레트집 한 채를 볼 수 있다. 옛 강경침례교회가 있던 자리다. 안내판은 이 터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논산시 강경읍 북옥리 137번지 옥녀봉에 위치한  강경침례교회는 미국 침례교단에서 파송된 파울링 선교사 부부가 강경의 지병석씨를 전도하고 1896년 2월 9일 주일예배를 드린 후 한국 최초의 침례교회인 강경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종교의 탄압과 항일사상의 근거지를 말살하려고 신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1943년 교회를 폐교하고 몰수하였다. 현재 침례교회터와 가옥이 현존하고 있으며 전국총회에서 강경읍 북옥리 137번지를 '침례교단 사적지'로 지정하였다."

대전에 침례신학대학교가 있기 때문인지 이곳 충청도 일대엔 유독 침례교회가 많다. 이곳에 침례교회가 들어선 오랜 역사를 볼 때, 침례신학대학교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전지역에 자리잡은 것은 필연이 아니겠는가. 1943년에 폐교됐다는 강경침례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그 교회가 신사참배에 희생당했다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어린 아이들의 신사참배 거부운동, 강경성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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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 20일 강경성결교회에 세워진 신사참배거부선도기념 조형물. ⓒ 안병기


다시 북옥감리교회 쪽으로 내려와 강경의 끝자락인 홍교리를 향해 조금만 가면 붉은 벽돌의 강경성결교회가 나온다. 교회 마당엔 신사참배 거부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5m 크기의 조형물은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옆면엔 기념비 건립 소사를 적었으며, 뒷면엔 1924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기독교잡지인 <활천>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조형물 건립 소사는 서두를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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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물 옆면에 새겨진 건립 소사. ⓒ 안병기

"1924년 10월 11일에 강경보통학교에서 일어난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강경성결교회 김복희 집사 외 57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이 주역이었으며 그밖의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사건이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집단적 운동이 왜 지금까지 어둠에 묻혀 있었는가. 어른들조차 차마 거부하지 못했던 신사참배를 철부지 어린 아이들이 거부했던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닌가.

이 사건을 처음으로 공론화한 것은 담임목사였던 신영준씨였다고 한다. 2005년 11월 11일자 성결신문에 '신사참배거부 선도지에 기념비를 세우자'라는 글을 실어 공론화한 것이다. 이후 이광복 화백의 도안과 감독으로 기념물을 완성했다고 건립 소사는 적고 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강경 지역에 남아 있는 작은 교회들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이 작은 교회에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순수함을 재발견했으면 좋겠다. 초기 기독교가 보여줬던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기록되지 않거나, 간직되지 않은 역사는 무의미하다. 자료 없이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거나 교훈을 얻을 수 없다. 저 작은 교회와 그 흔적들이 오래도록 남아서 성장 위주로 물량화와 대형화만 추구하는 한국 교회의 거울이 됐으면 좋겠다.
#강경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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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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