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는 후궁이 많을수록 좋다

[태종 이방원 196] 폐출 위기에 몰린 공비

등록 2007.11.18 20:12수정 2007.11.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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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 폐출 위기에 몰렸던 소헌왕후 심씨가 세종대왕과 함께 잠들어 있다. ⓒ 이정근


전 병조참판 강상인과 병조판서 박습 그리고 영의정 심온의 동생 심정을 처형한 태종은 더욱 고삐를 죄었다.

“심인봉은 곧 심정의 배다른 형이다. 비록 세력이 없더라도 역신(逆臣)의 형으로서 안연히 입직(入直)하는 것이 의리에 편안하겠느냐.”


“이것은 곧 신 등의 죄입니다.”

병조판서 조말생이 실수를 자인했다.

“내가 병권을 내놓지 않는 것은 왕위(王位)를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주상에게 무슨 사고가 있을 경우에 후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친(至親)을 이간시키는 것은 여러 소인배들의 작당에 기인한 것이 많았으니 어찌 크게 징계하여 뒷세상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리오.”

좌군총제직에 있던 심인봉을 해임함과 동시에 해진(海珍)으로 귀양 보내는 것을 필두로 대대적인 소탕작전이 펼쳐졌다. 중노릇 하고 있던 심정의 형 도생을 옹진으로, 심징을 동래로, 조카 심석준을 낙안으로 유배 보내고, 심온의 서자 심장수를 사천으로, 성달생을 삼척으로 귀양 보냈다. 또한 강상인의 아우와 아들을 유배 보내고 박습의 아들과 이관의 형, 동생, 조카, 숙부까지 변방으로 귀양 보냈다. 한마디로 연루자 집안을 초토화시킨 것이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조선팔도를 뒤흔든 피바람 속에서 제일 크게 흔들린 곳이 왕비가 있는 중궁전이었다. 친정아버지가 영의정이 되어 명나라 사신으로 떠나고 셋째 왕자 용(안평대군)을 낳아 경사가 겹친 것도 잠시, 숙부가 대역죄로 처형되고 아버지가 대간의 괴수로 지목되어 잡혀올 날을 기다리고 있으니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천길 벼랑에 서있는 입장이었다.

중궁전의 주인 왕비 심씨가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누웠다. 아버지를 대역죄인의 수괴로 지목한 것에 대한 항의 표시가 아니라 해산후유증과 심신이 피폐해졌기 때문이다. 초상집 같은 중궁전에 폐비문제가 덮쳐왔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분위기가 조정에 솔솔 피워 올랐다. 설상가상이다.

“심씨(沈氏)가 이미 국모(國母)가 되었으니 그 집안이 어찌 천인(賤人)에 속할 수 있겠느냐? 심온의 아내와 네 명의 어린 딸을 천인에 속하게 할 때는 윤허를 얻어 시행하라.”

심씨가(家)에 대한 선을 제시한 태종이 영돈녕 유정현, 좌의정 박은, 우의정 이원, 병조판서 조말생, 예조판서 허조, 지신사 하연을 불렀다.

“아버지가 죄를 지었어도 딸이 왕후와 왕비가 된 일은 옛날에도 있었다. 형률에도 연좌한다는 명문이 없으므로 내가 이미 공비(恭妃)에게 밥 먹기를 권하였고 또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경등은 이 뜻을 알라.”

“상교가 진실로 마땅합니다.”

군주에게는 후궁이 많을수록 좋다, 빈과 잉첩을 더 들여라

“임금의 계사(繼嗣)는 많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내가 지난해 예관의 청으로 3, 4명의 빈(嬪)과 잉첩(媵妾)을 들였으니 그들의 아버지인 권홍, 김구덕, 노귀산, 김점등이 왕실에 향하는 마음이 다른 신하와 달랐다. 계사를 많이 두고 한편으론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게 되며 또 옛날의 한 번 혼인에 아홉 여자를 취한다는 뜻에도 맞는다. 지금 주상이 정궁(正宮)에 세 아들이 있지만 많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때 세종은 향(문종), 위(수양대군), 용(안평대군) 세 아들이 있었다.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嬪)과 잉첩(媵妾)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

유정현이 맞장구를 쳤다.

“이 일은 주상이 알 바가 아니니 내가 마땅히 주장할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아들 세종을 새장가 들게 하겠다는 것이다. 친정아버지가 대역죄인에 연루되어 부부금슬이 깨졌을 터, 폐출하지는 않고 중궁전에 두되 새 여자를 들이겠다는 것이다. 태종은 예조에 명하여 가례색(嘉禮色)의 제조와 별좌를 선임하여 보고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전 폐출 논의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다.

“궁중이 적막합니다.”

좌의정 박은이 중궁을 폐(廢)할 것을 에둘러 말했다.

“내가 이미 경의 뜻을 알고 있다.”
“중중전을 폐하는 것이 백성의 의리에 합당한 줄 아뢰옵니다.”

의금부제조 변계량이 중궁을 폐하기를 청했다. 죄인의 딸을 국모로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 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심씨는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廢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않다.”

폐출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세종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인의 딸인 까닭으로 외인(外人)이 반드시 이를 의심하지만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이 어찌 법관(法官)이 청할 바이겠느냐.”

죄인의 딸을 사랑하면서 괴로워하는 세종

심온 사건 이후 세종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가시방석이었다. 사랑하는 부인이 연루되었지만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는 안타까운 처지였다. 이러한 아들의 복잡한 심리를 꿰뚫어 본 태종이 공비는 절대 폐출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며 세종을 안심시킨 것이다.

“만약 형률(刑律)로써 논하오면 상교가 옳습니다. 그러나 주상의 처지에서 논한다면 심온은 곧 부왕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서 중궁에 자리에 있도록 하겠습니까. 은정을 끊어 후세에 법을 남겨두시기를 청합니다.”

조말생과 원숙이 반대했다.

“경(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의 일도 또한 불충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내가 전일에 가례색(嘉禮色)을 세우라고 명한 것은 빈(嬪)과 잉첩(媵妾)을 뽑으려고 한 것뿐이다.”

가례색을 세우라는 것은 빈과 첩을 뽑으려는 것이었을 뿐, 왕비를 뽑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니 너무 앞서나가지 말라는 뜻이다. 태종은 전국에 금혼령을 내렸다. 아들 세종이 싫어해도 빈과 잉첩을 간택하여 중궁의 공백을 메꾸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세종은 6명의 부인에 22명의 자녀를 둔 군주가 되었다.
#가례색 #빈 #잉첩 #세종 #소헌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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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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