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잡아오라

[태종 이방원 197]영의정 체포 작전

등록 2007.11.20 16:01수정 2007.11.20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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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조선과 명나라 국경의 사신 노정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정근


청북정맥의 가파른 고개 판막치를 피하여 극성령에 올라서니 압록강이 눈앞에 펼쳐졌다. 한양을 떠나 여기까지 달려온 길을 뒤돌아 생각해보니 아찔하기만 하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직선 참로 요소요소에는 금군(禁軍)이 쫙 깔려 있다. 그들을 피하여 오느라 산을 넘고 내를 건너 우회한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곽산을 지나 전문령을 넘으면 지름길이지만 삭주로 돌아오느라 하루가 더 걸렸다. 문곡에서 구현령을 넘을 때는 산적을 만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니고 있던 패물을 털어주며 목숨을 구걸했으니 다행이지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1070리 한양 길이 아득하기만 했다.


"금군에게 붙잡히면 너도 죽고 우리 집안도 결딴이 나느니라. 고생이 되더라도 역참이나 마을 길을 지나지 말 것이며 만에 하나 붙잡히더라도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이실직고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너는 중궁전 아이가 아니라 판통예문사 안마님댁 아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장의동(藏義洞) 대감댁을 떠나올 때 부부인 마님의 글썽이던 눈망울이 눈앞을 가렸다. 부부인(府夫人) 마님이 누구인가? 이 나라의 국모. 왕비의 어머니가 아닌가. 지체가 하늘 끝까지 닿는 부부인 마님께서 몸소 아랫것의 손을 잡아주며 눈물짓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고갯마루에 동지섣달 칼바람이 파고들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니 의주성이 한눈에 보였다. 의주목사 임귀년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마님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명나라 땅에 들어가 죄인을 잡아오라

강상인과 심정을 처형하고 그 추종세력을 척결한 태종은 대소신료들을 바짝 얼어붙게 했다. 특히 무관(武官)들의 군기를 틀어쥐었다. 수강궁에 물러앉은 자신이 주상의 뒤통수나 쳐다보는 허수아비가 아니라는 것을 무관들에게 각인시켜준 것이다. 한양의 일을 어느 정도 처결한 태종은 심온이 돌아오는 길목 의주 일이 걱정되었다.


“심온이 이미 대역(大逆)이 되었으니 혹시 이를 알고 도망쳐 숨을까 염려된다. 속히 평안도 관찰사에게 일러 미리 체포하는 것에 대비하도록 하라.”

선지를 평양감사에게 보낸 태종은 그래도 미덥지 않았다.

“역관 전의로 하여금 군사 10명을 거느리고 연산참(連山站)으로 가서 심온을 기다리고 있다가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잡아오도록 하라.” - <세종실록>

압록강을 건너 의주에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지 말고 명나라에 들어가 잡아오라는 것이다. 위험한 발상이다. 조선 국경에서 7일 거리에 있는 연산참은 명나라 땅이었다. 명나라 조정에서 알게 되면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다분한 문제였다.

압록강 국경에서 요동에 이르는 길에 동팔참(東八站)이 있었다. 명나라와의 첫 접경지역인 주롄청에서부터 시작해 탕참-책문-봉황성-송참-진이보-연산관-첨수참-요동이다. 그 중의 한 지점이 연산참이다. 명나라 땅으로 내륙 깊숙이 들어간 지점이다.

“연산까지 가서는 아니 됩니다.”

박은이 우려를 표명했다.

“의주목사 임귀년은 심온이 천거한 사람이오며 또 심온의 집 종이 일찍이 심온을 맞이하려고 의주로 갔사오니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체포해야 할 것입니다. 또 임귀년의 관직을 해임하여 변고를 일으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총제(摠制) 원민생이 대책을 내놓았다. 의주목사 임귀년은 심온 사람이니 불온한 마음을 먹고 변란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온이 돌아오기 전 사전 조치하여 근심의 싹을 자르자는 것이다.

“임귀년의 관직을 파면하고 전 부윤(府尹) 우균으로 의주목사를 삼는다.”

즉시 지인(知印) 강권선을 의주로 보냈다. 한양에서 의주에 이르는 천릿길은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으며 역마(驛馬)의 말발굽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칠흑 같은 밤에 압록강을 건너는 여인

12월 스무하루. 의주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삼각산의 형체도 보이지 않은 칠흑 같은 밤. 금군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서고 있는 신갈파진을 피하여 압록강 가에 서 있는 여인이 있었다. 강을 건너려는 여인이다. 여인이지만 남자 옷차림으로 변복을 했다. 강을 건너면 내 나라 땅이 아니라 중국 땅이다. 그래도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야 하는 여인이었다.

1년 중 2개월 정도 동결되는 압록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신갈파진에서 주렌청(九連城)에 이르는 길은 사람들의 왕래도 잦았다. 눈을 피해 어두운 밤길을 건너야 하는 여인은 어디가 얼어 있고 어느 쪽에 살얼음이 있다는 것을 알 길이 없다. 얼음이 깨지면 구해줄 사람도 없는 죽음의 길이다. 그렇지만 망설일 수 없었다. 죽어도 가야 하는 길이었다.

“이대로 강을 건너시면 의주에서 금군에게 체포되옵니다. 어서 피하시라는 부부인 마님의 전갈이옵니다.”

한 나라의 영상이요 임금의 장인(國舅)으로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오던 심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왕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그리고 상왕 태종의 분에 넘치는 환송을 받으며 떠나온 것이 불과 두 달 남짓 전인데 도무지 믿기지 않은 일이었다.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날벼락이었다.

엎드려 읍소하던 여인이 얼굴을 들었다. 가녀린 두 뺨에 한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딸아이가 어렸을 때 데리고 있던 아이를 왕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가면서 데리고 들어갔던 아이였다.

‘그렇다면 이 아이가 전하는 말은 부인의 간청이며 중전의 부탁이 아닌가?’

한양은 위험하오, "어서 몸을 피하시오"

한양의 정세가 뭔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부인과 중전이 아이를 여기까지 보내 귀국을 돌리라는 얘기는 생명이 위태롭다는 얘기가 아닌가? 심온은 잠시 망설였다. 하늘을 쳐다봤다. 몇 점 흰 구름이 남동쪽으로 흐르고 한 떼의 기러기가 무리를 지어 날고 있었다.

"귀국을 거두고 몸을 피한다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할 짓이다. 일국의 영상으로 그것도 왕비의 애비로서 당치않은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니느니라."

심온은 귀국을 서둘렀다. 심온을 비롯한 사은사 일행이 의주를 향하여 출발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여인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지로 뛰어드는 대감마님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은사 일행이 의주에 닿았다. 명나라로 떠날 때 극진히 환송하던 의주목사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천거하여 의주목사가 된 임귀년이 보이지 않고 낯선 사람들이 보였다. 눈빛이 날카로운 장정들이었다. 임귀년이 파직과 함께 한양으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하옥되어 있다는 사실을 심온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명이요. 대역죄인 심온은 오라를 받으시오."

태종의 특명을 받은 의금부 진무 이욱의 목소리였다. 대역죄라니 너무나 뜻밖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죄목이었다. 이렇게 체포된 심온은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압송하라는 태종의 특명에 따라 함거에 실려오는 신세가 되었다. 갈 때는 영광의 행차길, 올 때는 죄인의 몸으로 압송되는 달구지 수레 길이었다.
#심온 #국구 #의주 #사은사 #압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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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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