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에 따라 국민을 1등과 2등으로 나누다

[내가 만난 아프리카] 인종차별에 기독교를 악용한 유럽 제국주의

등록 2007.12.22 19:21수정 2007.12.2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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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땅에 있는 유럽 도시 '케이프타운'

센추리 시티를 지나면서 버스는 케이프타운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른쪽으로 대서양의 바다가 보이는데, 항구가 바로 테이블 베이(Table Bay) 만이다. 철길이 보이고 철길 옆에는 항구에서 내린 머스크(Maersk)라고 쓰인 컨테이너 박스들이 기차에 실리기를 기다리며 쌓여 있다. 머스크는 덴마크의 세계 최대 컨테이너 회사이다. 컨테이너를 싣고 내리는 크레인이 보이고, 하버 플레이스(HARBOR PLACE)라는 이름의 건물에는 우리나라 회사인 '현대(Hyundai)' 간판이 보인다. 현대그룹의 케이프타운 사무실인가 보다. 던칸 부두의 모습이다.


그 옆으로 빅토리아&알프레드 워터프론트의 해안지역이 보인다. 테이블 마운틴 산과 테이블 베이가 눈에 들어오니 텔레비전과 여행책자 등으로만 보았던 바로 그 케이프타운이다. 버스는 테이블 베이를 끼고 돌다가 케이프타운 기차역에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이 요하네스버그와 마찬가지로 기차역 바로 옆에 붙어 있다. 모두 19시간이나 걸려서 달려온 길이다. 하루를 꼬박 버스 안에서 샌 셈이다.

오후 1시, 햇볕이 비치는 케이프타운은 정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다. 미 샌프란시스코나 호주의 시드니처럼 전형적인 항구도시의 모습이다. 푸른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선, 낭만이 있는 항구의 모습, 깨끗한 고층 건물들, 언덕을 따라 지어진 다양한 예쁜 집, 바다를 바라보며 한 잔의 커피와 맥주를 마실 수 있는 카페들,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악사들, 뒤로 높이 솟은 테이블 마운틴 산은 놀라움 그 자체다.

어떻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져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하는 감탄이 나온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땅도 아프리카고 도시도 아프리카인데, 이곳은 땅은 아프리카인데 도시는 유럽이다.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 새로운 이국적인 풍경의 다국적 도시를 만들어낸 곳이 바로 케이프타운이다.

아름다운 도시에 치안마저 좋으니 배낭 여행객에게는 더 이상 좋을 수가 없다. 배낭을 어깨에 메고 버스에서 내린 나의 마음도 둥둥 떠 있다. 상쾌한 바람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 쬐니 마치 푹신한 우레탄이 깔린 도로를 걷는 기분이다. 살벌한 요하네스버그의 분위기에 빼앗겼던 여행의 자유를 케이프타운에서 되찾은 느낌이다. 자물쇠에 잠겨 있던 나의 배낭이 활짝 열리고, 발걸음도 한결 가볍고, 무엇보다 짓눌려 있던 나의 마음이 펴진다. 날아갈 듯 한 기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곳이 케이프타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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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시내에서 올려다본 테이블마운틴 모습 ⓒ 김성호


야수의 도시에서 인간의 도시로 오다


이런 도시에서는 아무리 멀어도 모든 것은 발로 해결한다.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가며 시내의 모습과 사람을 구경하면서 여행객 숙소를 찾아간다. 배낭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롱 스트리트 거리의 롱 스트리트 백패커스로 갔다. 항구에서 테이블 마운틴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은 바둑판 모양으로 잘 짜진 거리다. 여행객 숙소에 들어서자 이미 투숙한 여행객들로 북적거린다. 2~4인용 방은 모두 찼고, 6인용 기숙사식 도미토리 방에 침대 한 개만 남았다. 방학 때이고 여름휴가철의 성수기여서 다른 곳에 가도 별 수 없다.

그나마 남아 있는 침대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40랜드를 내고 이틀을 예약했다. 한반에 6명이 자는 숙소이니 국적도 다양하다. 스페인에서 온 2명의 남자 여행객과 브라질에서 온 남자 여행객, 영국에서 온 2명의 여자 여행객이다.

배낭을 숙소에 내려놓자마자 바로 거리로 나섰다. 날씨도 좋고 마음도 편안하니 마냥 시내를 거닐고 싶어졌다. 배낭여행하는 사람에게, 특히 홀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걷는 것만큼 즐거운 시간은 없다. 시내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현지인들의 삶을 구경하고, 그들의 문화를 느끼고, 전통 음식을 맛보며, 그리고 내 마음의 찌꺼기를 비우는 것만큼 행복한 여행은 없다.

그러나 아프리카 여행의 현실은 꼭 그렇지 않다. 아프리카의 자연은 순수함 그대로이지만, 아프리카의 도시는 야생의 난폭함이 그대로 인간사회로 옮겨졌다. 케냐의 나이로비와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뿐 아니라 대부분의 아프리카 도시에서 낭만을 즐기며 도시를 활보할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여행객을 노리는 범죄가 횡행하고, 전반적인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빈곤과 부의 양극화가 가져온 불행이지만, 도시 공동체의 기본인 평화와 질서가 파괴된 아프리카 도시의 모습을 보는 것은 아픈 현실이다.

도시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사는 이유는 한마디로 먹는 음식과 입는 옷, 문화적 생활 등 모든 것이 한곳에 집중되어 있어 살기 편하기 때문일 텐데, 치안이 사라진 도시란 약육강식의 야수의 세계와 다를 바가 없다. 아무리 세렝게티 초원의 동물의 왕국이 좋더라도, 동물의 삶의 방식을 인간이 사는 도시에 그대로 옮겨올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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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온스 헤드의 웅장한 모습 ⓒ 김성호


테이블마운틴에서 시그널 힐까지 흘러내리는 케이프타운의 모습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뒤쪽에 우뚝 솟은 테이블 마운틴이다. 산 정상이 테이블(탁자)처럼 평평하다고 해서 붙여진 테이블 마운틴은 케이프타운의 최고 명물이다. 테이블 마운틴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맥클리어봉이 동쪽으로 보이고, 그 왼쪽으로는 악마의 정상이라는 뜻의 '데블스 피크'가 자리 잡고 있다.

테이블 마운틴의 오른쪽으로는 사자가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의 2개의 언덕이 있는데, 뾰족한 바위산은 사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라이온스 헤드'라고 부르고 테이블 베이쪽의 끝 부분은 둥근 언덕으로 사자의 엉덩이를 닮았다고 하여 '라이온스 럼프'라고 부른다. 라이온스 럼프는 요즘은 보통 '시그널 힐(Signal Hill)'이라고 하는데,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대포를 쏘아 신호를 보냈다는 뜻에서 유래 된 이름이다. 요즘은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정각 낮 12시에 대포를 쏘아 시간을 알려준다.

케이프타운의 중심지는 데블스 피크에서 맥클리어봉과 테이블마운틴, 그리고 라이온스 헤드와 시그널 힐(라이온스 럼프)을 병풍처럼 뒤로 하고, 대서양의 테이블 베이를 향하여 사발처럼 움푹 팬 둥근 도시라 하여 '시티 보울(City Bowl)'이라고도 한다.

롱 스트리트 거리의 피자가게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아프리카 여행 중에 피자 맛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새우 등 해물이 들어간 해물피자 맛이 일품이다. 양이 너무 많아 반 정도밖에 먹지 못하고 나머지를 챙겨서 시내 구경을 한 뒤 숙소에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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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봉우리는 데블스 피크고, 오른쪽은 테이블마운틴 ⓒ 김성호


피부색깔에 따라 국민을 차별했던 아파르트헤이트 박물관

내 발길이 처음으로 찾은 곳은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District Six Museum)'이었다.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의 상징을 보여주는 케이프타운의 한 구역이었던 '6지구 박물관'이라는 뜻. 입구에서부터 가슴이 뭉클하다. 지금은 사라진 디스트릭트 식스 지역의 옛날 지도가 바닥에 그려져 있다. 부이텐칸트 거리에 있는 이 박물관은 옛 백인정권의 인종차별정책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리스트릭트 식스는 옛날 혼혈과 흑인 등 유색인종 노동자들이 주로 살던 지역의 이름인데, 백인정권이 백인 전용지구로 지정하면서 유색인종을 시내에서 모두 내쫓기 위해 강제 철거했던 장소이다. 바로 이곳에 백인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가 이뤄진 1994년 인종차별 정책을 고발하는 박물관을 지었다.

디스트릭스 식스 지구에는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끌려온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인 등 이른바 '케이프 말레이계'와, 네덜란드 백인과 흑인과의 혼혈인을 중심으로 일부 흑인과 인도계 등이 인종차별 없이 활기 넘치게 살아가는 다인종 도시였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을 이뤄 '케이프타운의 영혼'이라 불렸던 곳이기도 하다. 케이프 말레이계는 주로 이슬람교도들이 많았다. 1966년 백인전용지역으로 지정되면서 6만여 명의 유색인종들은 시외곽인 케이프 플래츠 지역으로 쫓겨 가고 가옥은 불도저에 의해 모두 강제 철거되었다.

박물관 벽에는 지역별로 강제 철거되기 전의 집들이 빽빽이 들어선 옛 풍경과 포클레인으로 집들을 허무는 장면, 철거 뒤 공터가 된 모습 등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가져온 디스트릭트 식스의 파괴 장면을 사진과 그림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다. 1950년대와 1960년, 그리고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된 1990년대 이후의 신분증명서(주민등록증)의 변천도 사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1960년대 인종차별 정책이 한창일 때는 신분증명서에 백인과 흑인뿐 아니라 말레이(Malay),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 등 유색인종도 각 인종별로 구체적으로 세분해 증명서에 기록했다. 말레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끌려온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노예나 식민지배에 저항했던 이슬람교도들을 말하고, 케이프 컬러드는 초기 네덜란드 백인과 산족, 코이코이족 등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을 말한다. 주민등록증에 주민을 인종별로 분류해 등록하게 해 백인과 흑인, 말레이, 컬러드 등으로 주민등록증에 표시를 했다. 하나의 국민이 아니라, 국민을 인종에 따라 1등 국민과 2등 국민으로 나눈 셈이다.

현재는 피부색깔과 상관없이 '남아공 시민(Citizen, Republic of South Africa)'로 단일한 신분증으로 바뀌었다. 하나의 국민을 인종별로 나눠서 주민등록증에 표시한 것을 보니 인종차별 정책의 비인간성과 인권유린 행위에 짙은 슬픔이 밀려왔다. 네덜란드 백인인 아프리카너들이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한 케이프 식민지에 정착했기 때문에 당연히 케이프 컬러드는 현재 케이프 주에 많이 살고 있다. 빅토리아&알프레드 프론트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춤과 노래를 부르는 거리의 악사 대부분은 케이프 컬러드이다.

바로 혼혈인종의 역사를 한눈에 느낄 수 있는 디스트릭트 식스 박물관은 과거 남아공에서 순수 백인이 아니면 흑인뿐 아니라 혼혈인, 아시아 황인종도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박물관 자체가 옛날 평화롭게 살아가던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재현해 놓아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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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오브 굿 호프의 6개 국기 게양대와 뒤쪽의 테이블마운틴 모습 ⓒ 김성호


인종차별은 제국주의에 숨어 있는 추악한 본질

아파르트헤이트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이었는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인종에 따라 백인과 흑인, 컬러드, 인도인의 4등급으로 나눠 사는 지역을 분리시켰으며, 특별한 허가 없이는 백인들이 사는 도심에 출입 자체를 막았다. 백인정권은 1913년 원주민토지법과 1959년 반투자치촉진법 등을 통해 흑인들을 특정지역에 거주하도록 사실상 격리정책을 폈다.

말은 원주민 토지보호니 자치허용이니 떠들었지만, 실제는 백인정권을 세우는 데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을 특정지역에 격리함으로써 그들이 오랫동안 살아왔던 토지를 합법적으로 빼앗고 백인주도의 정권을 건설하려는 의도였다.

남아공의 '흑인 특정지역 거주정책'은 사실 미국의 '인디언 보호정책'과 다르지 않다. 미국은 1830년 특정지역에 인디언 보호구역을 만들어 원주민인 인디언을 보호구역으로 격리한 뒤 그들이 살던 지역을 모두 빼앗았다. 말이 '보호'지, 실제는 당시 흩어져 살고 있던 인디언을 '추방'해 그들이 살던 땅을 빼앗고, 백인정권을 건설하려는 의도였다.

미국은 인디언들의 숫자가 백인들의 학살과 질병 등으로 급속히 감소해 백인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에 백인정권의 건설이 성공했고, 아프리카는 백인들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어 백인정권 건설에 실패했다. '원주민 밀어내기와 자국민 이주하기'는 남의 땅을 빼앗는 자들이 역사적으로 해온 전형적인 수법이다.

흑인의 정치참여와 투표권이 부정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도 공원도 해변도 버스도 심지어 화장실도 모두 흑백으로 분리했다. 심지어 다른 인종간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성행위 자체도 불법이었다. 한마디로 백인 이외는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취급했다. 흑인과 유색인종을 야만인으로 규정한 것은 유럽 제국주의자의 인종차별의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영국작가인 조셉 콘래드의 <어둠의 속>과 스웨덴 저널리스트인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쓴 <야만의 역사>에서 '유럽의 제국주의는 아프리카인을 야만인으로 보는 데서 시작된다'고 주장했고, 알제리 독립운동가인 정신과의사 프란츠 파농은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라는 책에서 제국주의에 깔린 인종주의를 비판했다. 호주 멜버른 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이란 책에서 '원주민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남의 영토에 침범해서 영토를 빼앗는 사람들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려는 일반적인 행위'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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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오브 굿 호프(앞쪽)와 데블스 피크(뒤쪽 봉우리) ⓒ 김성호


인종차별에 기독교를 악용한 유럽 제국주의

이러한 인종차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네덜란드 칼뱅주의 신교였다. 이스라엘인들이 민족종교인 유대교의 구약성서에 근거해 자신들을 '선민(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으로 생각하듯이, 보어인들은 칼뱅주의를 왜곡해 "하느님의 참된 종은 기독교도인 백인뿐이며, 다른 인종은 백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백인선민' 사상을 만들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정신적 바탕이자 유럽 제국주의의 도덕적 무기였다.

유럽 제국주의자들이 남의 땅을 정복할 때 기독교를 악용했다. 스페인이 남미, 영국이 북미와 호주대륙, 네덜란드가 남아공을 정복할 때 항상 그들의 뒤에서 이론적 뒷받침을 해주었던 것이 기독교였다. 야만적인 이교도들을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이 정복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에서 "유럽 제국주의자의 공통 종교였던 기독교는 남의 영토를 정복하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고 말했다. 모세가 아모리족의 시온 왕의 땅을 정복하면서 이교도인 아모리족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멸시켰듯이, 유럽 제국주의는 아프리카를 침략할 때 마치 '모세의 길'처럼 기독교신앙을 도덕적 방패로 삼아 무장했다.

부시 미 행정부 이래 세계에 몰아치고 있는 전쟁의 이면에는 바로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선과 악마', '문명과 야만'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보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의 종교적 편향이 깔려 있다. 이슬람세계에 퍼져 있는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친이스라엘의 잘못된 중동정책에서 비롯됨에도 불구하고, 일부 이슬람원리주의자들의 테러를 이슬람세계 전체의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알카에다의 테러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침략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프리카를 정복할 때 가졌던 종교적 편견이 미국을 통해 중동지역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케이프타운이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 이유

박물관을 나와서 달링 스트리트를 건너면 높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성이 보인다. 남아공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희망의 성'이라는 뜻의 '캐슬 오브 굿 호프(Castle of Good Hope)'이다. 네덜란드인들이 처음으로 케이프타운에 정착한 뒤 1666년부터 1967년 사이에 만든 별 모양의 성곽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성곽 위의 6개 깃발들은 옛날부터 남아공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했던 국기를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꽂은 것이다. 네덜란드 국기에서부터 옛 영국 국기, 네덜란드, 영국, 백인정권의 남아공, 1994년 민주화 이후의 새로운 남아공 국기 순이다. 이 깃발의 국가와 순서만 보더라도 남아공의 아픈 식민지배와 해방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초기 네덜란드인의 정착과정과 케이프타운의 형성과정을 엿볼 수 있는 성이다. 현재의 남아공은 바로 케이프타운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도시라는 뜻의 '마더 시티'로 불린다. 케이프타운에 유럽의 백인들이 몰려들면서 애초 주인인 아프리카인들과의 싸움이 일어났고,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걸쳐 다민족 다문화의 공존을 모색하는 '민주화된 남아공'의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

1488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찾던 포르투갈 항해자인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유럽인으로 처음으로 케이프타운 아래 희망봉에 첫 발을 디딘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관리였던 얀 반 리벡(Jan Van Riebeeck)이 1652년 케이프타운에 상륙해 도시를 만들었다. 캐슬 오브 굿 호프의 성곽은 1652년 리벡이 처음 진흙과 나무로 만든 요새를 그 후에 돌과 시멘트벽으로 교체한 것이다. 애초 케이프타운은 유럽과 인도를 오가는 선박들의 가축과 채소, 물 등 식량을 보충하고 쉬어가는 보급 기지이자 정박지로서 개발되었다. 남아공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져온 백인 식민지배가 시작된 것이다.

케이프타운이 희망봉을 제일 먼저 발견한 포르투갈의 소유가 아니라, 뒤늦게 도착한 네덜란드의 소유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 제국주의가 식민지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기준은 단순히 먼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정착지를 누가 먼저 건설했느냐 여부였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에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상륙했었다는 표시는 남겨두었지만 정착지를 건설하지 않고 떠나 버렸기 때문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뒤이어 네덜란드 백인들의 이주가 줄을 이었는데, 이들 보어인들은 주로 농사와 목축을 했기 때문에 스스로 네덜란드어로 농부라는 뜻인 '보어'라고 불렀다. 이들 보어인과 원주민인 흑인들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들이 원했던 것이 같았기 때문이다. 땅과 자유였다. 아프리카인 입장에서는 자신이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땅과 자유를 이주민인 보어인이 빼앗아 가려 했기 때문에 이를 지키기 위해 투쟁해야 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따르지 못하면, 분배를 둘러싸고 갈등이 일어나는 법이다.

'정착'을 통해 포르투갈과의 소유권 경쟁에서 이긴 네덜란드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내쫓는 이유는 '경작'이었다. 원주민들은 땅을 경작하지 않기 때문에 소유권이 없다는 논리였다. 유럽인들은 '농경생활=정착=문명, 유목생활=이동=야만'으로 보았다. 거꾸로 유목생활을 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입장에서는 땅은 이용하는 것이지, 경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데이는 <정복의 법칙>에서 "원주민은 스스로를 '땅의 주인'이라고 부르고, 네덜란드인을 '땅의 노예'라고 불렀다"고 쓰고 있다. 유목생활을 하는 원주민과 농경생활을 하는 유럽인들의 땅을 바라보는 시각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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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봉우리는 라이온스 헤드고, 오른쪽 뾰족탑 건물은 케이프타운 시청 ⓒ 김성호


영국과 네덜란드 백인의 연합은 흑인차별의 시작

영국은 네덜란드가 힘이 약해진 틈을 이용해 1806년 케이프타운을 점령한 뒤 식민지로 삼으면서 네덜란드 백인과 영국 백인사이에 보어전쟁 등의 갈등을 빚다 1910년 4개 공화국이 남아프리카연방을 결성한다. 소수 백인끼리의 갈등을 봉합한 '백인연합 남아연방'의 공공의 적은 이제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에게로 화살이 돌려졌다. 백인의 선민사상과 강력한 무력, 인종차별법 등이 동원되었다.

네덜란드 백인인 보어인과 영국계 백인이 아프리카인 흑인을 제외한 채 백인들끼리 건설한 국가인 남아연방은 출발부터 인종차별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소수 백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다수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이다. 남의 땅에서 애초 주인을 제외시킨 채 손님인 백인들끼리의 남아연방이라는 국가를 건설했으니, 아프리카인들과의 갈등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다.

네덜란드 백인들은 자신들의 이름도 농부라는 뜻의 '보어' 대신 아프리카 토착 백인이라는 뜻의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토착 백인이라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이주민'이 아니라 다른 흑인 아프리카인들과 마찬가지로 '토착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프리카너들이 쓰는 네덜란드어가 '아프리칸스(Afrikaans)'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꾼다고, 흑인을 차별하는 보어인들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캐슬 오브 굿 호프의 성곽 바로 앞에는 큰 광장인 그랜드 퍼레이드가 있다. 그랜드 퍼레이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 등에서 케이프타운 건설을 위해 끌려온 옛날 노예들이 살던 곳. 지금은 주말에 벼룩시장이 열린다. 내가 갔을 때는 인도계 부부가 할 일 없이 광장에 앉아 쉬고 있고, 많은 비둘기들이 날아다니면서 커다란 야자수 아래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노예들이 살던 고통의 집에서 케이프타운 주민들이 편히 쉬는 평화의 쉼터로 변해 있음을 비둘기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랜드 퍼레이드 옆에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웅장한 케이프타운 시청 건물을 지났다. 시청사의 발코니를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넬슨 만델라가 27년간의 오랜 감옥생활을  끝내고 1990년 2월 11일 케이프타운 근처의 팔 지역에 있는 빅터 버스터 교도소에서 석방되어 처음으로 대중연설을 했던 곳이다. 72살의 백발노인이 되어 나타난 만델라는 "나는 여기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국민인 여러분의 종으로 앞에 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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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가든에 있는 특이한 생김새의 나무 ⓒ 김성호


노예가 만든 케이프타운의 흔적들

시청 발코니 앞을 지나 왼쪽으로 돌아가니 케이프타운의 초기 건설자인 얀 반 리벡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박과 선원들에게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기 위해 만든 채소밭이 나온다. '컴퍼니가든(The Company's Garden)'이라고 부른다. 동인도회사의 정원이라는 의미이다. 지금은 시민들이 산책을 하거나 의자에 앉아 책을 보는 등 시민공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커다란 나무 가지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땅에 있는 먹이를 찾는지, 아니면 여행객을 구경하는지 모르겠다. 다른 다람쥐 한 마리는 나무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와 꽃, 사람과 다람쥐가 함께 어울리는 시민공원이다.

컴퍼니가든에는 인도고무나무와 야생 바나나, 알로에, 장미 등 각종 나무와 꽃뿐 아니라 커다란 샤프론 배나무(Saffron Pear Tree) 한 그루가 철제 버팀목의 도움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280년 이상 된 것으로 추정되는 샤프론 배나무는 남아공에서 재배한 나무로는 가장 오래된 나무이다. 가든 안에는 '노예 종(Slave Bell)'의 모형이 걸려 있는데, 노예들을 일하도록 부르기 위해 치던 당시 종을 재현한 것이다.

컴퍼니가든뿐 아니라 케이프타운 자체가 사실상 당시 노예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이다. 케이프타운이 건설되던 1600년대 중반부터 1800년대 초기까지 케이프타운에 끌려온 노예숫자는 6만3000명이나 되었다. 노예들은 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동인도회사가 다스리던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 실론(현 스리랑카) 등에서 데려왔고, 그리고 잔지바르와 마다가스카르, 앙골라, 모잠비크 등에서도 끌어왔다.

당시 노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케이프타운 유적지로는 노예들의 초기 거주지였던 그랜드 퍼레이드 광장과 노예들의 집단 숙소인 노예 롯지, 노예시장에 세워진 나무로 된 노예 기념판, 노예 교회, 노예 빨래터, 노예를 고문하던 기둥 등이 있다. 내가 묵었던 롱 스트리트 거리에서 시그널 힐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보캅(Bo-Kaap) 지역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인도 등에서 끌려온 이슬람교 노예들의 후손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는 지역이다. 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보캅 박물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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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의 그랜드 퍼레이드 광장 ⓒ 김성호


인종차별 법안 통과시킨 부끄러운 국회의사당 건물

컴퍼니가든 입구에는 남아공 국회의사당인 의회 건물이 있는데, 백인정권 아래서 인종차별 정책을 법적으로 뒷받침해주었던 치욕의 자리이다. 1910년 백인들끼리의 남아공연방을 건설한 뒤 1913년 원주민토지법을 시작으로 사실상 통행법의 시초인 도시지역법, 원주민토지법, 인종간 결혼금지법, 인구등록법, 집단지역법, 공공시설격리법, 반투자치촉진법 등 인종차별 정책 법률을 잇달아 만든 곳이다. 물론, 1991년 모든 인종차별 정책 법률을 폐지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종차별 정책에 대항한 아프리카인들의 저항운동은 이른바 흑인 등 유색인종이 백인들이 사는 도심을 지나갈 때 허가를 받도록 한 통행법의 철폐 운동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백인경찰의 무차별 총살로 수많은 흑인들이 희생한 1960년의 샤프빌대학살과 1976년의 소웨토항쟁이 대표적이다. 정치적 투쟁의 중심에는 넬슨 만델라가 주도한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있었다.

지난 1994년 민주화 이후 넬슨 만델라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선출된 곳도 바로 이곳 의사당이다. 남아공 의회는 1910년 애초 남아연방이 연방제 국가로 시작됐기 때문에 상하 양원제로 되어 있는데, 실질적인 권한은 하원이 갖고 있다. 특이한 것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이면서도 국가원수이자 행정수반인 대통령은 우리나라처럼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하지 않고, 하원이 뽑는다는 점이다.

넬슨 만델라가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은 인종차별 정책이 철폐된 뒤 처음으로 실시된 전 국민이 참여하는 총선에서 넬슨 만델라가 이끄는 정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가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찾지 했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의 후임인 타보 음베키 현 대통령 역시 아프리카민족회의 소속이다. 타보 음베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14살 때 아프리카민족회의에 가입했는데, 그의 아버지 고반 음베키는 만델라의 정치적 동지로서 로벤섬에 같이 투옥되기도 하는 등 집안 전체가 투사 집안이다.

지난 2004년 실시된 총선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전체 의석 가운데 3분의 2의 절대다수를 차지고 있는데, 이는 인구분포에서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남아공 인구 4700만 명(2005년 기준) 중 흑인이 77%이고, 그다음 백인이 10%, 혼혈인 9%, 아시아인 3%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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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퍼니가든 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다람쥐 ⓒ 김성호


야당이 시장과 시의회 장악하고 있는 케이프타운의 색다른 정치

아프리카민족회의는 중앙정부뿐 아니라 지방정부도 모두 차지하고 있는데, 주요 도시에서 유일하게 다른 당이 시장을 맡고 있는 곳이 케이프타운이다. 케이프타운 시장은 제1야당인 민주연합 소속의 여성이다. 민주연합(Democratic Alliance)은 백인과 일부 흑인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자유주의 성향 정당이다. 민주연합의 백인여성인 헬렌 질레는 지난 2006년 3월 케이프타운시장에서 당선됐는데, 남아공의 시장 역시 대통령처럼 각 지방자치의 시·도의회가 선출한다.

언론인 출신인 헬렌 질레 시장은 백인이면서도 신문기자 시절 남아공 흑인저항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스티브 비코의 죽음이 자연사가 아니라, 백인정권의 고문에 의해 살해된 사실을 밝혀내 명성을 날렸다. 이처럼 백인정권 시절 아파르트헤이트에 반대한 백인들도 있었는데, 여성 의원이었던 헬렌 수즈먼과 노벨문학상을 받은 여성작가 나딘 고디머 등이 대표적이다. 리투아니아 유대계 이민자의 딸인 헬렌 수즈먼은 당시 진보당 소속으로 백인정권의 여당인 국민당에 대항해 인종차별 정책을 끝까지 반대한 유일한 국회의원이었다.

민주연합은 케이프타운 시의회에서도 유일하게 아프리카민족회의보다 의석이 많아 제1당을 차지하고 있다. 남아공에서 케이프타운만의 독특한 정치적 성향을 보여준다. 케이프타운이 기본적으로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데다 인종별 인구분포에서도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이른바 '케이프 컬러드'가 48%로 가장 많고, 흑인 31%, 백인 19%, 아시아계 1.4%이다. 순수한 흑인이 오히려 혼혈과 아시아계 및 백인들에 비해 소수인 유일한 대도시이다.

남아공은 공용어가 영어와 네덜란드계 백인의 언어인 아프리칸스를 비롯해 코사어, 줄루어 등 흑인 부족어를 포함해 모두 11개인데, 케이프타운에서는 집에서 아프리칸스를 사용하는 사람이 41%로 가장 높고, 코사족이 29%, 영어 28% 등이다. 혼혈인 케이프 컬러드가 대부분 아프리칸스어를 사용하기 때문이고, 흑인 중에서는 케이프타운에 유독 코사족이 가장 많이 살기 때문이다. 넬슨 만델라와 타보 음베키 현 대통령도 모두 코사족이다.

이집트 카이로를 향해 바라보고 있는 세실 로즈 구리상

컴퍼니가든의 입구에는 영국의 제국주의자이자 케이프식민지 수상이었던 세실 로즈의 구리상이 세워져 있다. 다이아몬드와 금광 사업으로 돈을 번 세실 로즈는 케이프식민지 총독인 수상까지 오르면서 부와 권력까지 움켜쥐었으나 1902년 49세 때 심장병으로 케이프식민지에서 숨진다. 그의 유해는 내가 지나온 짐바브웨 불라와요 근처의 마토보 국립공원의 산 정상으로 옮겨져 묻혀 있다. 케이프타운의 세실 로즈 흔적으로는 로즈 기념관과 그가 사들였던 커스텐보쉬 식물원 등이 있고, 케이프반도의 동쪽 해안지역인 뮤젠버그에 그가 죽은 별장이 있다.

컴퍼니가든의 세실 로즈 구리상에는 '당신의 땅(Hinterland)이 저기에 있다'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세실 로즈가 카이로가 있는 북동쪽을 향해 자신의 왼손을 가리키며 서 있다.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영국의 식민지를 만들어 아프리카 종단 철도를 건설하려던 세실 로즈의 평생의 꿈을 표현한 것이다. 컴퍼니가든 주변에는 이밖에도 남아프리칸 박물관과 유대인 박물관, 국립미술관 등 볼거리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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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컴퍼니가든 입구에 있는 세실 로즈 구리상 ⓒ 김성호


이슬람 보캅 지역은 칼라풀한 원색의 마을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간 곳은 언덕 위의 보캅 지역이다. 보캅 거리는 빨갛고 파랗고 노란색의 집들이 어우러진 원색의 집합체이다. 케이프 이슬람교도들의 집단 주거지인데, 주로 18세기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끌려온 말레이계 노예의 후손들이다. 이슬람 성소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초승달 모양 위에 별 모양의 상징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에티오피아 하라르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이슬람 성소이다.

하라르에서 보니 이슬람 사원은 지붕 위에 초승달 모양의 상징만이 달렸고, 이슬람 성인의 무덤이 있는 성소는 초승달 모양 위에 별 모양의 상징이 함께 달렸었다. 보캅의 이슬람 성소는 근처 집들과 마찬가지로 밝은 하늘색과 밝은 살색이어서 눈에 바로 띄었다.

따뜻한 아프리카의 날씨를 만끽하면서 여유 있는 케이프타운 시내 탐방을 즐겼다. 케이프타운 시내 분위기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캐나다 밴쿠버와 사뭇 비슷하다. 두 도시 모두 항구도시에 인구도 그리 많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좋다.

내가 묵었던 롱 스트리트 거리는 밤에도 안전해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었다. 정식 경찰이 가끔 경찰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고, 경찰은 아니지만 별도의 안전요원이 해가 지자 2~3명씩 한 조가 되어 길목마다 롱 스트리트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행객이 많은 거리의 안전을 위해 시청이나 지역상가에서 별도로 고용한 사설 거리 경비원 같았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치안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마침 토요일이어서 롱스트리트 거리에는 여행객들이 몰려나와 축제날인 양 밤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춤을 추면서 즐긴다. 새벽 1시가 되었는데도, 도로에는 차량들이 전조등을 켜고 달리고, 카페와 바에는 맥주를 마시거나 요란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여행객들로 만원이다.

내가 묵은 숙소의 작은 바에도 전 세계에서 온 여행객들이 술을 마시면서 밤새는 줄 모른다. 우리 숙소의 방에는 새벽 2시가 넘도록 4명은 들어오지 않고, 몸이 불편한지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은 여자 여행객 둘만 자고 있다. 케이프타운의 낭만적인 풍경은 밤늦도록 계속 되었다.
#케이프타운 #남아공 #테이블마운틴 #디스트릭스 식스 박물관 #컴퍼니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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