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생의 길을 가기 전에 오지여행을 떠나라

아프리카 여행은 나에게 무엇인가

등록 2008.01.06 19:22수정 2008.01.07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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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항구의 시계탑(왼쪽)과 시그널 힐(뒤쪽 언덕) ⓒ 김성호


영웅 안내자 벤자민의 환송을 받으며 로벤 아일랜드를 떠나 케이프타운 항구로 돌아왔다. 로벤 아일랜드에서 케이프타운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바라보는 테이블마운틴과 테이블베이가 멋지다.

케이프타운 시가지의 풍경은 배가 다가가면서 카메라의 ‘줌인과 아웃’처럼 흐릿하게 보이던 장면이 또렷이 다가왔다. 테이블마운틴의 꼭대기를 감싸고 있던 하얀 안개가 짙은 구름으로 변하면서 시그널 힐을 거쳐 워터프론트 항구로 내려오자, 어둠이 깔리면서 여기저기서 전기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벤 아일랜드에서 돌아와 워터프론트 항구에 내리니 물개 한 마리가 페리 선착장 위에까지 올라와 자고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로벤 아일랜드 사이에는 정말 물개가 많다. 물개가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뭍에까지 올라와 자기 집인 양 버젓이 드러누워 자고 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과 케이프타운 항구를 건설한 그의 둘째 아들 알프레드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알프레드 워터프론트’ 주변은 가장 번화한 쇼핑거리답게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걸어 다니며 눈요기하고 재미난 볼거리가 많았다. 1883년 세워진 붉은색의 유명한 시계탑도 보이고, 노벨광장에는 4명의 남아공 출신 노벨 평화상 수상자들의 사진과 기록, 온몸 구리상이 세워져 있다.

초기 아프리카민족회의 의장으로 1960년 아프리카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앨버트 루툴리와 1984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 1993년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의 공로를 인정받아 공동수상한 넬슨 만델라와 당시 백인 정부 마지막 대통령인 프레데릭 드 클레르크의 구리상이 서 있다. 만델라의 구리상 앞에는 “아름다운 이 땅에 다시는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는 역사가 결코 되풀이 돼서는 안 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만델라가 1994년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했던 말이다.

항구 주변에는 쇼핑몰과 멋진 레스토랑, 카페가 있고, 거리에서 춤을 추는 젊은이들의 거리공연도 벌어지고 있었다. 9명의 젊은이들이 아래 위 같은 옷과 신발을 신고 악기 없이 손과 발로 박자를 맞추며 율동과 노래를 부르는데, 아프리카인만이 할 수 있는 거리의 아카펠라이다. 뒤로는 우리나라 대기업인 ‘엘지(LG)’의 광고간판이 건물 옥상에 크게 버티고 서 있고, 그 옆으로는 남아공 은행인 ‘압사(ABSA)’의 광고간판도 들어왔다.

페리와 요트들이 드나드는 전형적인 항구의 모습이다. 항구의 오고가는 배들을 보자 케이프타운이 ‘바다의 선술집’이라는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오랜 항행에 지친 선원들에게 케이프타운만큼 잠시나마 평온을 줄 수 있는 항구는 많지 않을 터. 오후 7시가 되면서 날이 어두워져 빠른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내가 묵는 숙소 근처에 “게임 레스토랑(Game Restaurant)”이라는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이름 그대로 사파리하면서 보는 야생동물 고기를 파는 곳이다. 임팔라와 스프링복, 혹멧돼지, 큰 영양인 엘란드, 쿠두, 악어 등의 고기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 악어고기를 시켰다. 젊은 남자직원은 “저지방이어서 건강에 좋고 맛있어 인기가 좋다”고 말한다.

악어의 갈빗살이 나오는데, 일반 생선고기와 별 차이가 없었다. 참치와 닭고기 맛 중간쯤이라고 할까, 약간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쫄깃쫄깃 씹히는 맛을 좋아하는 내 입맛에는 빗나갔다. 케냐 나이로비에는 사파리 야생동물을 파는 ‘카니보어 식당’이 유명한데 가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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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항구의 모습 ⓒ 김성호


여행 중 정치적 결단의 뉴스를 접하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 바로 건너편의 인터넷 카페에 갔다. 아프리카 대부분 국가에서 인터넷 속도가 느리고, 한글 지원이 안 되어 불편이 많았다. 그동안 우리나라 소식을 전혀 모른 채 두 달 넘게 여행을 하고 있었다. “컴퓨토피아(Computopia)”라는 인터넷카페는 한글지원이 되어 우리나라 소식을 오랜만에 접할 수 있었다. 컴퓨터 글자판이 영어와 한글로 되어 있는 우리나라 자판이다. 우리나라 삼성 제품이었다. 나중에 우리나라 여행객에게 들으니 우리나라 사람이 하는 카페란다.

인터넷을 통해 다음 목적지인 나미비아의 사막투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인터넷 카페는 장기 배낭여행하는 사람에게는 정보수집과 교류의 중요한 수단이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하는 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현지 교통수단과 투어 예약을 하는데도 필수적이다. 케이프타운의 인터넷 카페에도 여행객들로 붐빈다.

여행 정보를 찾은 뒤 느긋한 마음으로 우리나라 신문사 인터넷의 뉴스를 검색하다 깜짝 놀랐다. 북한이 미사일 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가 쌀과 비료 등의 인도적 지원을 중단했다는 소식이었다. 정치군사적 문제와 인도적 지원을 연계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대북 강경정책으로 북한 핵 문제도 꼬이고, 우리 정부도 원칙 없이 미국의 강경정책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 소식은 한 달 전 뉴스였으나 나는 케이프타운에서 처음으로 접했다. 그동안 빠듯한 여행일정과 아프리카의 열악한 인터넷 사정으로 우리나라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정치와 경제협력의 분리라는 햇볕정책, 포용정책의 전면적인 폐기였다. 더욱이 인도적 지원의 중단은 정경분리 원칙의 문제를 뛰어넘는 인류 보편적 가치의 부정이다.

에티오피아에서부터 우간다와 탄자니아,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등의 오지를 여행하면서 아직도 아프리카에 굶주림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동안 무관심해왔던 아프리카의 기아문제에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아프리카 시골 곳곳에서 만났던 국제 기아구호 단체인 플랜과 월드비전의 팻말을 보면서 작은 기부 활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따뜻한 손길이 된다는 것을 보았다.

인도적 지원은 이념과 국경을 초월하는 최고의 인권이자 인류애의 발현인데, 같은 동포인 북한에 대한 쌀 지원 중단은 어떤 이유로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인도적 지원은 어떤 정치적 문제와도 연결해서는 안 된다는 나의 철학에 대한 도전이었다.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프리카 여행 중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늘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하던 나에게 가장 아픈 소식이었다. 나는 이 뉴스를 보는 순간 개인적으로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내가 참여했던 정당을 떠나기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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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워터프론트 항구 거리의 아카펠라 노래팀 ⓒ 김성호


새로운 인생의 길을 가기 전에 오지여행을 떠나라

여행은 이처럼 체 게바라의 거창한 혁명의 길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도 인생의 중요한 선택을 하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정치적이든, 사업상이든, 인생의 방향이든, 사랑이든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으로부터 “한 성공한 대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새로운 사업을 하거나 인생의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는 반드시 혼자서 오지여행을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이해한다. 돈 많은 사업가가 굳이 별 다섯 개 고급호텔의 호화스런 여행을 마다하고 홀로 배낭여행을 다니는 이유를.

오지여행을 하다 보면, 그것도 홀로 배낭을 메고 힘든 여정을 걷다 보면 나 자신에 대해 겸허해진다.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아프리카의 저 넓은 초원과 사하라 사막의 밤하늘의 별들이 알려준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 세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을 가장 낮은 위치에 놓고 판단한 인생의 길이 잘못될 일이 없다. 실패한 선택은 대부분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자의적으로 판단한 오만의 결과이다. 천동설을 바탕으로 한 모든 과학적 논거가 허무한 것과 같다.

오랜 기간 혼자서 배낭을 메고 오지를 여행하게 되면,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멀리 넓게 볼 수 있다. 여행을 하면서 자신과의 많은 대화시간이 생기고, 눈앞을 가렸던 많은 세속의 구름이 걷힌다.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정작 필요한 나 자신과의 대화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인생의 새로운 결정을 하기 전에 한번 오지여행을 떠나라. 홀로 마음을 비우면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위한 여행을. 배낭 하나와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배낭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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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항구의 엘지 건물과 구름에 가린 테이블마운틴 ⓒ 김성호


<카페 모차르트> 여인의 향기에 취하다

나미비아로 가는 날이다. 전날 강풍으로 보지 못한 테이블마운틴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택시를 타고 케이블카 타는 곳을 갔다. 역시 강풍으로 운행을 하지 않았다. 요 며칠 계속 바람이 불어 케이블카 운행이 계속 중단되고 있었다. 테이블마운틴 정상은 나와는 인연이 없나보다.

테이블마운틴에는 여전히 검은 구름이 산 아래부터 칭칭 휘감고 있었다. 케이프타운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정적의 도시였다. 롱 스트리트 거리로 내려와 아침식사를 하는 <카페 모차르트>로 갔다. 야외의자에 앉아 마시는 모닝커피가 맛있다. 케이프타운을 떠나는 날이어서 그런지 감상적이 되었다. 출근하는 멋쟁이 여자들이 옷깃을 올린 채 카페 앞을 지나간다. 서울처럼 그렇게 쫓기듯 걸어가지 않는다. 여유 있는 걸음걸이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빗줄기가 굵어져 커피 잔을 들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정장에 넥타이를 맨 50대 중반의 백인남자가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펼쳐든다. 프랑스 남자 분위기를 풍긴다. 알랭 들롱 같은 그윽한 분위기를 풍기는 멋진 중년의 남자다. 어떤 때는 중후한 남자가 아름다운 여인보다 더 멋져 보일 때도 있다. 이 남자가 그렇다. 또 다른 자리에는 후더분한 여자가 역시 토스트와 커피를 마시고 있다.

커피를 나르는 주인 여자는 40대 초반이다. 프랑스 여배우 소피 마르소 같기도 하고, 샹송가수 파트리샤 카스를 닮은 모습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프랑스 여인만이 갖고 있는 느낌이다. 영어도 서툰 것 같다. 프랑스식 발음도 느껴진다. 프랑스 여인인지 묻고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나의 느낌이 중요하지, 그녀의 국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녀라면 여행을 좋아했던 모차르트를 사랑할 것 같았다. 그래서 카페의 이름도 모차르트로 지었겠지만.

그녀에게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2악장의 음악이 은은하게 울려 나왔다. 영화의 원작 소설가인 카렌 블릭센이 살았던 케냐 나이로비의 카렌 블릭센 박물관에서 들려오던 그 선율이다. 그녀의 향기가 카페 안을 촉촉이 적신다. 케이프타운의 <카페 모차르트>에 가면 커피맛과 함께 이 여인의 향기도 느껴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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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기차역 안에 있는 남아공 최초의 열차 기관차 ⓒ 김성호


정치적 진출이 활발한 아프리카 여성들

비가 그쳐 배낭을 메고 버스정류장이 있는 케이프타운 기차역으로 갔다. 아프리카는 버스정류장과 기차역이 같은 곳에 있다. 버스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어 롱 스트리트 거리를 따라 쭉 아래로 걸어서 내려왔다. 케이프타운은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은 것 같이 테이블마운틴과 테이블 베이가 감싸안고 있다. 사방으로 쭉 뻗어나가 퍼진 케냐의 나이로비나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등의 대도시들과는 다르다.

기차역 안에는 오래된 기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1859년 케이프타운에서 와인랜드인 동북쪽의 웰링턴까지 운행했던 남아공 최초의 열차이다. 기관차 부분만 전시되어 있어 여행객의 눈길을 끈다. 기차역 안에는 화장실이 모두 닫혀 있다. 남녀 화장실 모두 열쇠로 채워져 있다. 가게 직원에게 물으니 모두 사용할 수 없단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기차역 안에 공중화장실이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기차역 매점에 있는 신문을 보니 오늘 8월 9일이 ‘여성의 날(Women's Day)’이라며 특집기사를 다루고 있었다. 케이프타운 시내의 곳곳에도 각종 행사를 알리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남아공에서는 여성의 날이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다. 2만여 명의 흑인여성들이 백인정권 시절인 지난 1956년 8월 9일 흑인을 차별하는 통행법에 항의해 수도 츠와니(프리토리아)에 있는 대통령 집무실인 유니언 빌딩 광장을 향해 전국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날을 기념해 여성의 날로 정했다.

남아공은 정치경제 전 분야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 민주화 이후 새로운 헌법은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유일하게 동성애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 진보적 정권과 여성의 연대가 가져온 결과이다.

남아공은 여성의원이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장관의 40%도 여성이 차지할 정도로 정치계에서의 여성의 지위는 높다. 남아공뿐 아니라 르완다는 2006년도 기준으로 여성 의원 비율이 48.8%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모잠비크는 30%를 차지하고, 그리고 우간다, 나미비아, 탄자니아 등도 여성들의 정치계 진출이 활발하다. 여성들의 정치계 진출만으로 보면 아프리카에서 여성의 지위는 일반인들의 생각을 뒤집는다.

아프리카에서 독재정권이 물러가고 진보적인 정권들이 들어서면서 여성들의 진출이 크게 늘어났다. 르완다와 남아공, 모잠비크, 나미비아 등이 그렇다. 물론, 아직도 남성우월적인 전통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프리카 여성의 지위는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여성지위 향상도 민주화와 역사의 진보와 함께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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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프타운 항구 선착장에 올라와 자고 있는 물개 ⓒ 김성호


버스에서 만난 우리나라 여자 대학생

나미비아 수도 빈트후크로 가는 버스는 기차역에서 오전 10시 정각 출발했다. 인터케이프  2층 고속버스였다. 화장실은 1층 입구에 있는데, 깨끗하고 공간도 충분해 편안한 느낌을 준다. 1층에는 나이 드신 노인들이 탑승하고, 2층에는 젊은 승객들이 주로 탔다. 2층은 전망이 좋은 대신 약간 흔들리고. 1층은 시야가 좁은 대신 덜 흔들리고 안정감이 있는 데다 화장실이 있어 노인들이 탄다.

내 옆자리에는 우리나라 여자 대학생이 탔다. 아프리카 여행 중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 같은 버스를 타고 가기는 처음이다. 여름 방학을 맞아 케이프타운에서 어학연수를 한 뒤 21일 동안 트럭을 타고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빅토리아 폭포까지 가는 트럭투어를 가는 길인데,  일이 꼬여 나미비아까지 개별적으로 뒤늦게 가게 되었다고 한다.

기차역 버스정류장에서 인터케이프 버스에 오르려는데 젊은 여자가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말을 한다.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이었다. 오랜만에 우리말을 들으니 반갑다. 여자 승무원에게 부탁해 같은 자리에 앉았다.

우리나라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는 대학 3학년인데, 일주일 전 케이프타운에서 출발하는 트럭투어에 타고 떠났다가 비자 때문에 나미비아 국경에서 혼자만 되돌아와야 했단다. 어학연수 오기 전 우리나라 여행사를 통해 트럭투어를 신청했는데, 개별적으로 나미비아 비자를 미리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 낭패를 본 것이다.

나미비아 국경에서 비자가 없어 들어가지 못하고 케이프타운으로 혼자 되돌아와 비자를 받은 뒤, 다시 중간에 합류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나처럼 나미비아 비자로 여학생도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나미비아 빈트후크를 거쳐 대서양 해안도시 스와콥문트에서 트럭투어와 다시 합류하기로 했단다. 트럭투어는 캠핑용으로 개조한 트럭을 타고 전 세계 여행객들과 함께 여행하는 다국적 배낭여행으로 ‘트럭킹’이라고 부른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 중 우간다와 나미비아 등에서 트럭투어를 하는 젊은이들을 자주 마주칠 수 있었다.

학생은 “남아공 케이프타운에는 최근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어학연수를 많이 온다”고 했다. 영국식 교육제도를 택하고 있는데다, 학비도 미국이나 캐나다보다 싸서 장점이 있다고 한다. 그 학생도 비록 한 달간의 어학연수이지만 상당히 자신감이 붙어 있었다. 학생은 “브라질 등 전 세계에서 온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영어에도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고 뿌듯해 했다. 빈트후크까지 가는 20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었지만, 오랜 배낭여행으로 피곤한 상태여서 나는 차 안에서 내내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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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는 데블스 피크(왼쪽)와 테이블마운틴(오른쪽) ⓒ 김성호


여행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미래를 본다

아프리카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을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들에게서 우리 미래의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유학이든, 연수든, 한국국제협력단의 국제봉사활동단원이든, 국제기아구호단체의 봉사요원이든, 배낭여행이든 젊은 시절에 외국에 나가 새로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직접 눈으로 봐야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고, 생활의 다양성을 체험하고, 관용과 포용의 정신을 배우게 된다.

분명한 것은 젊은이들이 미래의 세상을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길을 닦는 것은 어른들이지만,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은 젊은이다. 그 길을 젊은이들이 어떻게 이용하느냐가 미래를 결정한다. 그 길로 탱크를 실어 나르면 전쟁과 분단이 일어날 것이고, 그 길로 햇볕을 실어 나르면 평화와 통일이 올 것이다. 나는 우리의 젊은이들이 세계로 나아가 ‘멀리 보는 눈’을 갖기를 바란다. 내가 아프리카 배낭여행 중 만난 우리의 젊은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이유다. 나는 결코 그 젊은이들에게 여행의 이유를 묻지 않는다.

여행을 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직접 여행 계획을 짜면서 영어를 공부하고,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아프리카로 떠나온 우리 젊은이들의 용기에서 진취적 기상을 본다. 도전하지 않는 자에게 성공은 없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서양이 동양을 보는 근본적인 시각을 바꿔 놓았고, 500여년 전의 콜럼부스의 신대륙 도착은 좋든 싫든 세계의 패권을 돌려놓았고, 그 영향은 지금도 세계를 좌우하고 있다. 체 게바라도 여행을 통해 자신의 인생의 방향을 찾았고, 세계를 변혁시켰다.

역사적으로 탐험의 역사와 진보의 역사는 늘 같이 있었다. 탐험이 침략과 제국주의의 팽창에 악용된 사례도 있지만, 역사의 진보와 문명의 교류에 기여한 바가 훨씬 크다. 노벨의 화약 발명이 인류를 죽이는 무기로 악용됐다고 해서, 화약 발명이 가져다 준 인류생활의  편리와 진보를 부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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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가린 데블스 피크 ⓒ 김성호


체 게바라는 혁명가이자 진정한 여행가

머물러 있는 자에게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모험하지 않는 젊은이에게서 희망을 볼 수는 없다. 젊은 시절 먼 여행을 떠난 뒤 체 게바라는 자신의 고향인 아르헨티나로 결코 되돌아가지 않았다. 인생이 여행이라면 가장 진정한 여행가는 체 게바라이다. 1953년 아르헨티나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두 번째 남미 여행에 나선 체 게바라는 1954년 5월 과테말라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병원을 차려 돈을 벌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어머니에게 털어놓으며 “그렇게 하는 것은 내 속에서 싸우는 두 명의 나, 사회 개혁가와 여행자 모두를 배신하는 끔찍한 일일 겁니다” 고 썼다(<체 게바라 자서전> 143쪽(황매출판사, 2004년). 체 게바라가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섰을 때 이미 그에게 혁명과 여행은 같은 것이었다.

아프리카 거리의 티셔츠에서, 고급 카페에서, 값싼 선술집에서, 식당에서, 전 세계 모든 젊은이들의 가슴 속에서 체 게바라를 만난다.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서 나는 혁명을 바라본다. 배낭여행을 떠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배낭 속에 가져올 ‘혁명’의 내용이 궁금하다.

혁명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혁명가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불의에 분노할 줄 알고 정의에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혁명이고, 남의 아픔을 헤집기보다는 조용히 감싸주는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혁명가가 아닐까. 사랑이 없는 혁명은 잔혹한 폭력일 뿐이다.

체 게바라 옆에는 총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남미와 아프리카의 정글 속에서 게바라 옆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오히려 책과 펜이었다. 게바라가 1967년 10월 볼리비아 산악에서 죽을 때 그의 짐 꾸러미에는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송가(Ode)>와 노트가 들어 있지 않았던가. 인문사회학적 소양이 빠진 거창한 구호는 요란하기는 하지만, 왠지 인간적이지 못하고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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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벤바히트 와인농장 화장실에 있는 포도 잎사귀(왼쪽부터 메를로, 피노타지, 시라즈, 카베르네 쇼비뇽) ⓒ 김성호


여행은 나에게 무엇인가

여행에서 느끼고 오는 모든 것이 ‘혁명’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자기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줄 테니까. 여행에서 느끼는 것은 모두가 다르다. 서로가 살아온 삶이 다르고, 또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행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온전히 안고 떠나고 그 삶으로 보고, 또 그 삶으로 느낀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다. 살아오면서 우리의 두 어깨를 짓눌렀던 짊을 여행을 통해 벗어버리고 나면, 자유로운 인간이 된 나를 발견한다. 여행의 여정이 나의 무거운 인생의 짊을 앗아간 것만으로도 여행은 해볼 만한, 가치 있는 일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결코 말리지 않는다. 여행에서 설령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행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도 23살 때 남미 여행을 마칠 무렵 “난 더 이상 내가 아니다. 과거와 같은 난 없다"고 외치지 않았는가. 극한 고독을 느껴보지 못한 인생은 진한 맛이 부족하다. 고독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여행을 할 수 없다. 여행은 언제나 고독과의 동행이기 때문이다. 고독은 단순히 외로움이 아니라, 자신과의 대화이다. 고독의 힘은 좌절이 아니라, 용솟음치는 물줄기와 같은 폭풍을 일으키기도 한다. 고독에 좌절한 사람은 몽상가가 되었고, 고독을 극복한 사람은 혁명가가 되었다. 여행은 고독을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여행을 해 보지 않은 인생은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여행의 추억이 없는 삶은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아프리카 배낭여행은 먼 훗날 나와의 추억대화를 위한 이야기 거리가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어려울 때 나를 뒤에서 밀어주는 보이지 않은 힘이 되어 줄 것이고, 먼 훗날 인생을 참 즐겁게 살았다는 삶의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26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프랑스에서 아라비아를 거쳐 에티오피아 하라르로 간 프랑스 천재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삶이 불행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랭보가 외친 “인생이 단 한번으로 끝난다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만 가지고 그의 인생의 행복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다.

37살의 짧은 생을 살다간 랭보지만, 그 누구도 감내하기 어려운 저 깊은 방황과 고독을 경험한 그의 삶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랭보에게는 가슴 속에 묻어둔 사랑처럼, 고독이 함께 한 기나긴 여행의 추억이 있으니까.

나에게도 여행의 추억이 있다. 오래 전 대학 시절 우리 산하를 둘러본 배낭여행은 삶의 방향을 알려주었고, 지난 2001년도 떠난 시베리아 기차여행은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 주었다. 이번 아프리카 여행은 살아오면서 퇴색된 정의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안고 오기를 기대하면서 떠났다. 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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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브 사막의 퀴버 트리 나무(코커붐) ⓒ 김성호


가장 아름다운 들꽃 공동체 나마콸란드를 지나다

케이프타운을 벗어나자마자 푸른 초원이 펼쳐진다. 끝없는 푸른 초원이다. 파랗게 자란 보리밭도 넓다. 방목하는 양들과 소들도 자유를 누린다. 수많은 노란 꽃들도 활짝 피었다. 다른 아프리카는 모두 겨울인데, 남아공만 여름 같다. 탄자니아의 세렝게티는 누런 초원인데, 남아공은 푸른 초원이다. 중간에 교통사고로 1시간이나 정체되었다. 나미비아로 가는 길에는 강과 큰 호수도 보인다. 올리판츠강이다.

올리판츠강을 건너자마자 오렌지 일종인 시트러스 생산지로 유명한 시트러스달(아프리칸스어로 ‘시트러스 계곡’이란 뜻)이 나오고, 뒤이어 루이보스 차(Rooibos Tea)가 많이 나는 클랜윌리엄 지역이 나왔다. 원주민들이 즐겨 마시던 루이보스 차는 카페인이 없어 어린이의 아토피 피부병과 노화방지에 효과가 좋은 남아공의 대표적인 차이다. 클랜윌리엄의 오른쪽으로는 루이보스차가 재배되고 산족의 동굴 바위그림으로 유명한 세더버그 산맥으로 가는 길이다.

조그만 마을에는 푸른 잔디운동장에서 어린이들이 영국 럭비를 한다. 양쪽에 럭비골대가 높이 세워져 있다. 유럽의 어느 선진국 못지 않은 어린이 운동장이다. 어린이들의 놀이에서도 다른 아프리카와 큰 차이가 난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어린이들은 메마른 땅에서  맨발로 나무골대를 세워 축구를 한다. 남아공 어린이들을 보면서 에티오피아와 우간다, 탄자니아 국경 마을의 어린이들이 맨발로 갈대 잎을 둘둘 말은 공으로 축구를 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가리에스 지역을 지나면서는 넓은 들판에 여러 종류의 하얗고 노랗고 붉은 데이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세계적으로 들꽃 공동체(군락지)로 유명한 나마콸란드이다. 가리에스에서 나미비아 국경지대의 오렌지강까지는 나마콸란드로 불리는 황량한 반사막 건조지대인데, 7월말부터 9월에 걸쳐 겨울비가 내리면 온갖 종류의 들꽃이 피어난다. 코이코이족의 하나로 금속가공 기술이 뛰어난  나마(Nama)족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에서 나마콸란드로 부른다.

작은 돌산 언덕 아래 펼쳐진 나마콸란드 들판에 핀 황금빛 노란색과 오렌지색 꽃들은 마침 아프리카의 강렬한 햇살이 비추자 데이지 꽃의 카펫이 된다. 자칼스블롬(학명 Dimorphotheca sinuata), 보터구스블롬(Arctotis gumbletonii), 삼부릴키(Felicia australis), 바르키에스크놀(Herrea elongata) 등의 다양한 데이지가 어울려, 마치 남아공이 다양한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민족 공동체이듯이, 울긋불긋 다인종의 꽃밭을 이루고 있었다.

나마콸란드에서 나미비아 사막에는 알로에의 일종인 퀴버 트리(Quiver Tree, 또는 코커붐)가 많이 자라는데, 나무가 가볍고 속이 스펀지처럼 부드러워 옛날 이곳에 살던 산족이 등에 메는 화살통을 만드는데 사용한 나무이다. 퀴버는 영어로 화살통이고, 아프리칸스어로는 코커붐이고, 애초 산족들은 초제(Choje)라고 불렀다.

퀴버 트리와 함께 희귀한 나무로는 하프멘스(Halfmens) 나무가 있는데, 허리 이상 상반신의 사람을 절반쯤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의 줄기 꼭대기에 옹기종기 붙어 있는 잎사귀들이 마치 사람의 작은 얼굴 같이 보인다. 산족은 200년 이상을 사는 이 나무를 자신의 고향을 지켜주는 조상의 영혼으로 생각한다.

남아공에서 나미비아로 가는 대서양에 인접한 나마콸란드 지역이 반사막지대의 지형과 기후를 보이는 것은 희망봉에서부터 올라오는 벵겔라 한류의 영향 때문이다. 앙골라 해안까지 올라가는 벵겔라 한류의 영향으로 해안 지역은 날씨는 서늘하지만, 상승기류가 발달하지 못해 강수량이 적어 사막을 만든다. 해안을 따라 형성된 사막이라고 해서 해안사막이라고 하는데, 나미비아의 나미브사막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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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 누르두베르 국경사무소에 서 있는, 내가 타고 간 인터케이프 버스 ⓒ 김성호


멋진 남자 리처드 기어와 조지 클루니

버스 안에서는 미국의 코믹 범죄 영화인 <오션스 투웰브(Ocean‘s Twelve)> 비디오를 틀어주고 있었다. 잘 생기고 멋진 남자 조지 클루니가 주연이다. 그렇잖아도 멋진 남자인데, 최근에는 수단 다르푸르 집단학살을 막기 위해 발 벗고 나서 감동을 주고 있다. 조지 클루니뿐 아니라 오래 전부터 티베트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있는 리처드 기어도 그렇고, 미국 배우들 가운데는 의식 있는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나는 오래 전 신문기자 시절 미국 보스턴에서 1년 동안 공부할 때 텔레비전 광고에 나온 리처드 기어를 보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리처드 기어가 무슨 새로운 영화를 찍어 홍보를 하나 생각했는데, 텔레비전 자막에는 영화 홍보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자유 티베트(Free Tibet)”라고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자신의 돈을 들여 “자유 티베트(Free Tibet)”라는 이름으로 티베트의 독립을 호소하는 새로운 모습의 리처드 기어를 처음 보았을 때 “참 멋지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 영화배우 최민식과 문소리도 스크린쿼터 축소반대운동에 앞장서는 등 문화주권을 위해 싸우는 모습이 아름답던데, 금강산관광 지키기나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에 발 벗고 나서면 더 멋지지 않을까.

우리나라 배우 중에는 왜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 추진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없을까. 정치인은 그렇다 치고, 문화예술인들마저 중국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정치와 이념, 종교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예술인일 텐데. 단순히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위해 투쟁하는 연예인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멀지 않아 리처드 기어나 조지 클루니를 볼 수 있겠지.

영화 <오션스 투웰브>에는 조지 클루니뿐만이 아니라 쟁쟁한 미국 배우들이 다 나온다. 내가 가고 있는 나미비아에서 마침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아기를 낳아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브래트 피트도 나오고, 매력적인 캐서린 제타-존스와 귀여운 여인 줄리아 로버츠도 보인다. 알 만한 미국의 남녀 배우들이 총출동이다.

영화에 빠져 있다 보니 버스는 벌써 스프링복에 도착했다. 오후 6시 해가 넘어갈 무렵이다. 스프링처럼 껑충 껑충 뛰면서 다닌다고 하여 붙여진 작은 가젤인 스프링복의 이름을 딴 ‘스프링복’은 코피(Kopje, 작은 언덕)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였다.
 
남아공 국경 출입구사무소인 비울스드리프(Vioolsdrif)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운 밤이 되어 있었다. 오후 8시 30분. 비울스드리프는 아프리칸스어로 ‘바이올린의 여울’이라는 뜻으로, 바로 앞에 오렌지강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마약견이 어슬렁거리면서 냄새를 맡는다. 잘 먹어서 배가 통통하다. 역시 1분 안에 절차를 끝낸다. 남아공과 나미비아 국경을 가르는 오렌지강은 레소토의 드라켄즈버그 산맥에서 발원해 대서양으로 흐르는 길이 2100km의 남아공 최대의 강이다. 오렌지강은 1770년대 네덜란드 군주였던 오렌지 공국의 이름을 딴 것.

어둠이 짙게 내린 오렌지강 다리를 건너 5분 정도 달리자 나미비아 국경 출입국사무소인 누르두베르(Noordoewer, 노어도우워)이다. 누르두베르는 아프리칸스어로 오렌지강의 ‘북쪽 강 언덕(North Bank)’이란 뜻이다. 빨간색 건물의 작은 출입국 사무소인데 20여분만에 수속이 모두 끝났다. 케이프타운에서 미리 나미비아 비자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국경 출입구사무소에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이유는 승객들도 많지만, 국경사무소 현지에서 비자를 발급하기 때문이다. 배낭여행객 입장에서는 그러나 시간이 오래 걸려도 국경에서 비자를 직접 발급받는 것이 편리하다.
#케이프타운 #남아공 #아프리카 여행 #체 게바라 #나마콸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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