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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순> 대한민국 아줌마가 주인공!

08.01.28 17:46최종업데이트08.01.28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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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임순례 감독, 이하 우생순)을 봤다. 많이 알려졌다시피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매우 인성적인 경기를 펼쳤던 여자핸드볼 대표팀을 다룬 영화다.

 

나는 그 당시 여자핸드볼 결승 경기를 수십 차례 보았다. 남녀 핸드볼은 올림픽 때면 효자 종목이라고 반짝 관심을 받는 대표 종목이다. 올림픽이나 월드컵 기간에만 부쩍 스포츠광이자 애국자가 되는 노릇이 싫어서 나는 결승전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티비 중계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두 번째 연장전부터인가, 나는 티비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운동 경기를 보면서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어 감동의 눈물로 팔다리를 적시며 애국심을 확인하는 노릇을 꽤 싫어하는 나도 그 경기만큼은 지금 당장 저 경기장에 달려가 선수들을 껴안고 같이 울고 싶을 만큼 온 마음을 다해 감동했다.

 

경기 결과를 알고 나서도 각종 프로그램에서 주요 장면을 재방해줄 때마다 보고, 보고 또 보고, 저절로 외울 정도로 다시 보았다. 선수들 인터뷰에 울고 감독 인터뷰에 울고, 이렇게 질질 울고 나면 뭔가 의미 있는 감동으로 내 자신을 정화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감동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반가웠고 개봉을 기다렸다.

 

이미 영화 홍보를 위해 티비 오락 프로그램에 나와서 발랄하게 수다를 떠는 김정은과 문소리와 김지영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영화를 보러 가서는 코믹한 역할로 배치된 김지영의 많이 연습한 사투리를 들으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또 새침떼기 애교쟁이처럼만 보이던 김정은이 슬슬 달라 보이는 게 신기해서 눈물을 흘렸고, 스크린에 조그맣게 'D-30'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드디어 감동의 그 순간이 제깍제깍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눈물 콧물 훔치며 울었다.

 

그러다가 한미숙 역의 문소리가 마지막 한 방의 슛을 쏘는 슬로우 모션 장면에서 나는 결정적으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이럴 수가! 그저 감동의 도가니로 끝났다면 나에게 이 영화는, 그것도 나쁘지는 않다만, 기대한 만큼만의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은 길게 박수를 쳤다. 그런데 나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 슛이 실패했었단 말이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 경기 분명히 우리 팀이 이겼는데, 수십 번씩 복기할 정도로 많이 봐서 틀릴 리가 없을 텐데…. 나는 그 날 한국팀이 이겨서 금메달을 땄다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뭘 본 거지?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카메라의 광고 카피가 있었지만 나에게는 철저히 기억이 기록을 지배했다. 명백히 진 게임을 나는 한 치의 의구심 없이 이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내 기억처럼 금메달을 땄다면 영화는 싱거웠을지도 모른다.

 

이겼기 때문에 그들의 경기가 값진 것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하고 이기는 감동 스토리는 너무 뻔하고 지겹다. 세상은 1등만을 기억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만들었고,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 고분고분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공감한다.

 

사실 이 영화는 여자핸드볼의 이야기를 빌어 하는 한국 아줌마들 이야기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아줌마, 남편과 아이를 돌보다 제 한 몸 건사하기 힘든 게 당연해야 하는 아줌마, 촌스런 뽀글머리에 굵은 팔뚝과 퍼진 몸매, 창피를 모르는 처신으로 이미지화된 아줌마들 말이다. 영화의 삼인방 아줌마 캐릭터들은 이런 요소들을 고루고루 나눠 가졌다. 그리고 공통점은 모두 자존심을 버려야했다는 점이다.

 

자존심이란 처녀와 아줌마를 가르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적당히 콧대가 높고 튕길 줄도 알아야 매력 있는 거라고 사회화 되었다가 결혼하면서 아줌마가 됨과 동시에 자존심을 다 버려야 한다.

 

이 영화는 젊었을 때는 콧대도 높고 꿈도 높았을 아줌마들이 콧대 꺾고 꿈도 버려야지만 생존이 가능한 이야기, 그러나 마지막으로 버릴 수 없는 단 하나의 꿈을 가진 아줌마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넓게 보면 변방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살아야 하는 서글프고 악에 받친 수많은 인생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운 것은 아줌마 선수들이 전부 죽을 각오로 경기를 한다는 점이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없어, 라고 하듯이. 저렇게 독기를 부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맞다. 독기를 부리지 않으면 2등도 못해먹는다. 당신의 인생이 일등이나 이등이 아니더라도, 하물며 꼴찌를 해도 독기를 부리는 것을 보여줘야 소수의 박수라도 받는다. 모든 인생은 저마다의 가치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은 있지만, 그냥 듣기 좋자고 하는 말이지 진짜로 그것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가슴 아프다. 아줌마들은 자존심은 말끔히 버리되 독기는 증폭시켜야 하는데, 그건 너무 힘들고 싫은 일이다. 힘들고 싫은 상황에 몰아넣고는 당신은 감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고 박수 쳐 주는 것보다는 그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더 고맙다.

 

임순례 감독은 <우중산책(1994)>이라는 단편영화로 서울국제단편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 후 장편영화로 <세친구(1996)>,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를 만들었는데, 두 편 다 주류에 끼지 못하는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단편영화는 제목부터 우울하기 짝이 없고, 장편도 내용이나 흥행 성적이나 우울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확연히 달라진 면모가 보였다. 적절하게 잘 배치한 코미디적 요소가 돋보였는데, 송정란(김지영 역)과 오수희(조은지 역)는 캐릭터의 호감도도 성공이고 흥행 기여도도 아주 성공이다. 임순례 감독이 코미디를 시작하더니 드디어 흥행 감독의 반열에 올랐구나, 생각했다.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다. 나의 친구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도 재미있었어, 라고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배역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류승범은 확실히 작정하고 웃음을 주는 캐릭터였다. 그런데 또 내 기억 속에는 류승범처럼 재미난 요소보다 지지부진한 변두리 삼류 밴드의 이야기로만 남아 있을까?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본 것은 몇 년 전 정동진영화제에서였는데, 거기에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확실한 주관과 고집을 가지고, 확연하지 않은 재능을 믿으며,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한다지만, 사회적 위치로 보면 변두리 삼류 밴드보다 나을 게 적어도 하나는 있다고 주장할 수 없는 자기 처지를 심하게 이입하며 영화를 보았던 것 같다.

 

“니가 원하는 걸 하면서 행복하니?”라는 대사는 폐부를 찌르며 소주병을 마구 따게 했었다. 그래서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촉새 같은 류승범보다 마을버스 운전사가 되어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던 황정민이 훨씬 빨리 떠오르는 것이다.

 

문득 <우생순>에 대한 나의 분별없는 감동이 미안해졌다. 내 감정이 정화되는 것에만 충실해서 울어댔던 것이 약간 부끄러웠다. <우생순>을 내가 느낀 것처럼 웃음도 많은 영화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들이 진정한 승리자이며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낸 영웅이라고 한껏 올려 세우고 있는 핸드볼 선수들일지도 모른다. 2004년 최고의 감동을 주었지만 그 후에 여자 핸드볼은 또 우리의 관심에서 급속하게 사라졌고, 이 영화의 감동이 앞으로도 여자핸드볼을 기억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장담하지 못하겠다.

 

영화가 끝난 후 실제 선수들과 감독의 인터뷰 장면이 이어졌다. 그 선수들은 한국에서 뛸 팀이 없어 흩어졌고 감독은 그 선수들의 현실에 말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임순례 감독이 이 장면들을 덧붙인 것은 어쩌면 여자핸드볼 선수들을 30분 가량 지속될 감동을 위해서만 기억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스크린쿼터가 축소되고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훌쩍 감소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디워> 논쟁처럼 걸쩍지근한 논쟁이 영화 뉴스의 머리를 차지하다가, 간만에 관객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흥행 가도를 달리는 한국 영화를 만난 게 반갑다.

 

그러나 이 영화가 임순례 감독의 필모그라피에서의 의미와 현재 한국 영화산업에서의 의미에 못지않게, 이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실존 인물들에게도 행복하고 힘이 나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의 전부인 핸드볼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원없이 하기를 바라는 그들에게도 말이다.

2008.01.28 17:46 ⓒ 2008 OhmyNews
한국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여자핸드볼 임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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