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초년생의 서글픈 고백

등록 2008.01.30 15:22수정 2008.01.3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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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는 다짜고짜 만남을 재촉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그는 갑자기 조직의 생리에 대해 느낀 바를 낱낱이 열거했다. 그가 꺼낸 푸념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듣고 있기에 섬뜩할 정도였다.

 

업무능력만으로 권력의 상층부에 도달하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직급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은밀한 뒷거래가 이뤄지게 마련이다. 적절한 로비와 암투를 종용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능력만으로 인정받으려는 이들을 ‘순진’이란 단어로 도태시켜 버린다.

 

회식 자리에서 오고 가는 ‘뒷담화’는 아부와 충성에 익숙지 않은 이들을 매장시켜버린다. 상사에 대한 적극적인 접대는 줄 서기를 암시하고, 상사도 접대를 부하직원의 능력으로 간주한다. 권력의 상층부와 학연, 지연 등으로 연결되지 않은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승진하기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야한다”고.

 

샐러리맨들은 승진과 출세만 보장된다면 무릎을 꿇는 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상사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키워야 하는 입장이고, 부하는 상사의 힘을 빌려 좀 더 일찍, 그리고 쉽게 승진하길 원한다. 결국 접대나 은밀한 뒷거래를 통해 상사와 부하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뤄지곤 한다.

 

줄 서기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모습은 ‘캐스팅보트’를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어떤 일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다가 이익을 취할 기회가 오면 얼굴색을 바꾸는 부류다.

 

카멜레온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이런 부류를 흔히 기회주의자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쪽 저쪽에서 이득을 취하는 중에도 정작 양쪽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캐스팅보트는 물질 만능 사회가 낳은 사회적 병폐의 하나로 간주되지만,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이들과 비슷한 상황에서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승진을 갈망하는 대부분의 샐러리맨들은 캐스팅보트를 승진을 위한 지름길의 하나로 정의 내린다.

 

양심의 가책을 뒤로한 채 캐스팅보트의 삶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진과 삶의 목표가 등호로 성립된다. 특히 경제적으로 빈곤했던 샐러리맨들에게 돈·권력·명예는 곧 인생이다.

 

조직 내에 존재하는 어두운 단면을 직접 보고 느낀 친구는 나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왔다. 누구나 막연히 하는 질문이지만, 그렇다고 막연히 답할 질문은 아니었다. 조직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느낀 사회의 한 단면도 친구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 어쩌면 이 모습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며 우리가 배우고 있는 이상은 책 한쪽에 기록된 낡은 이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할수록 내 기억 속에 가득 찼던 이상은 사라지고 세속적인 면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라고 애써 부정하지만 결국 그 어두운 단면이 현실을 대체한 지금, 나와 친구의 솔직한 푸념마저 낭비로 느껴진다.

 

그날 밤 친구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해 결론을 내렸다. 사회라는 기성복에 나를 맞추자고. 명쾌한 해답인 동시에 서글픈 고백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1.30 15:22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데일리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사회초년생 #사회생활 #상사와 부하 #승진 #캐스팅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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