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계 대느라 자기 삶을 잃어버리지 말고

[살가운 만화 34] 다니구치 지로, <열네 살>

등록 2008.02.11 17:55수정 2008.02.1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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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열네 살 (1∼2)

- 글ㆍ그림 : 다니구치 지로

- 옮긴이 : 양억관

- 펴낸곳 : 샘터(2004.4.25.)

- 책값 : 한 권에 7000원씩

 

 (1) 시간, 세월, 나이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몸이 찌뿌둥하여 아침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빨래한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아침이자 낮밥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고 책 조금 읽고 잠깐 드러누워서 허리를 펴고 다시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서 필름을 스캐너에 걸어놓고 있는 지금은 어느새 낮 네 시.

 

조금씩 길어지기는 하지만, 아직 겨울해입니다. 짧은 겨울해는 곧 있으면 꼴깍꼴깍 넘어가서 어두워지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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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열네 살> 1권 겉그림 ⓒ 샘터

▲ 겉그림 <열네 살> 1권 겉그림 ⓒ 샘터

― “괜찮다 히로시. 아버지를 잡지 못한 건 이 엄마란다. 네 탓이 아냐. 난,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어. 언젠가는. 그렇지만, 그 사람, 생각보다는 오랜 세월 잘 참아 준 거야.” (2권 177쪽)

 

글을 쓰다가, 책을 읽다가, 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이런 책 저런 책을 고르다가, 또 집에서 밥을 하다가, 쌀을 씻거나 그릇을 부시다가, 빨래를 하거나 걸레를 빨다가, 빨래를 널거나 이불을 털다가 손을 비빔질을 합니다.

 

비빔질을 하며 손을 녹일 때 손을 가만히 느껴 봅니다. 지긋이 바라보기도 합니다. 울퉁불퉁한 손마디를 두 손으로 엇갈리게 느끼면서 사람 나이 서른넷을 이렇게 맞이하는구나 새삼스레 느낍니다. 그런데 이런 서른넷을 느낀 지 얼마 안 된 듯한데 벌써 이월입니다. 곧 삼월일 테고 오월과 유월도 머지않겠구나 싶습니다.

 

먹고 살 돈을 얻자면 출판사로 원고를 넘겨주어야 하는데, 미처 넘겨주지 못한 원고가 한 해 넘게 묵고 있습니다. 그냥 보내기에는 아쉬움과 모자람이 많아서 자꾸 손질하고 거듭 고칩니다. 그런 지 어느덧 한 해를 꼬박 넘기고 반 해도 넘겼습니다. 이렇게 꾸물꾸물대며 언제 책으로 엮어내려고. 원 참.

 

― “그리고 얼마 후 너희들이 태어났지. 참 행복했지만, 그래도 뭔지 모르게 내 마음 속에는 늘 어떤 충동이 있었지. 단 한 번의 인생인데, 이대로 흘러가나, 그런 생각이었어.” (2권 166쪽)

 

생각해 보면, 좀 더 빨리 원고 마무리를 짓고 출판사로 넘겨주었다고 한들, 손쉽게 나올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찌감치 원고를 마무리 짓고 넘겨주었다면, 지금 돌아보기에 어수룩하거나 어줍잖은 대목이 많이 보여서 오히려 부끄러웠으리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마무리가 잘 되지 않아서, 또 여러 가지 일이 겹쳐 마무리 손질이 늦어졌기 때문에, 한 번 더 돌아보고 두세 번 차근차근 되새길 수 있구나 싶어요. 늦춰지는 일이 꼭 궂은 일이 아니며, 빨리 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이 밥을 굶으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 걱정은 그칠 수 없습니다. 다만, 굶게 되면 굶고 먹게 되면 먹으면 되지 하는 생각이 차츰차츰 깊어집니다. 지금은 지금대로 제 자신을 돌아보면서 제 삶을 즐기면서 마음껏 누리면 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 ‘그 포옹으로, 난 홀로 살아온 한 여인의 외로움을 느꼈다.’ (2권 97쪽)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열네 살 적 지난날은 열네 살이었던 그 나이대로 좋았습니다. 스물네 살이었던 지난날은 스물네 살이었던 지난날대로 좋았습니다. 서른넷인 지금은 서른넷인 지금대로 좋습니다. 앞으로 마흔넷까지 살 수 있다면 마흔넷인 그때에는 그 나이만큼 즐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쉰넷까지도 살 수 있다면 쉰넷이라는 나이가 좋을 테며, 예순넷까지도 튼튼히 버틸 수 있으면 예순넷이라는 나이는 저한테 얼마나 큰 사랑이자 보람일까 싶습니다.

 

 (2) 삶

 

엊저녁, 성당 나들이를 마친 뒤 저잣거리에 갔습니다. 설 연휴 뒤끝이라 그런지 저잣거리가 문을 안 열었습니다. 그제도 안 열더니. 냉이나 다른 나물이라도 장만할 생각이었는데, 명절 앞뒤로는 물건이 안 나와서 저잣거리도 문을 안 여는구나 싶습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모퉁이길 조그마한 회집에 가 보기로 합니다. 바깥에 내놓은 선간판에 여러 가지 회를 판다고 적혀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지금 없는 것이 많다며 우리가 시켜서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한두 가지뿐.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먹기로 합니다.

 

― ‘나가세 도모코가 너무 애처롭게 느껴졌다. 이 애도 나처럼 가족 일로 작은 가슴을 앓고 있는 것이다.’ (1권 201쪽)

 

두 사람이 앉아서 회를 반찬 삼아 밥을 먹습니다. 조그마한 모퉁이길 회집은 회집이라기보다, 동네사람들 술집이구나 싶습니다. 아저씨들이 2차나 3차로 와서 회를 안주로 삼아서 가볍게 소주 한 잔 걸치는 곳.

 

우리는 밥집을 잘못 찾아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는 수 없지요. 그래도 이곳이 이렇게 꾸려지는 곳임을 알게 됩니다. 작은 회집을 홀로 꾸리는 아주머니 주름살도 보게 됩니다. 작은 회집에서 ‘아내가 이혼하자고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며 깊은 생각에 잠긴 쉰 막바지에 이른 듯 보이는 아저씨들 푸념도 듣게 됩니다.

 

― ‘지금, 이렇게 다시 14세로 돌아와 보니, 그냥 지나친 것들이 잘 보이는 것 같아.’ (1권 181쪽)

 

회집을 나와 조금 걷습니다. 옆지기가 얼음과자를 먹고 싶다고 해서 동인천역 앞쪽에 있는 가게로 갑니다. 가는 길에 있는 주상복합건물에 있는 뒷간에서 볼일을 보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이곳 건물지기 눈초리가 달갑지 않아서 싫다고 합니다. 건물지기는 뒷간을 오가는 사람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는가 보군요.

 

― ‘그때, 아버지를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버지에게 맞은 일도, 이렇게 둘이서 대화를 나눈 일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1권 159쪽)

 

전철을 탈 때마다 뒷간 찾는 일은 숨은그림찾기처럼 느껴집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먼길을 나서며 뒷간 가기도 어렵습니다. 사이에 한 번 멈출 때가 아니면 느긋하게 쉴 수 없습니다.

 

우리 사는 도시에서는 길을 걷다가 아늑하게 다리쉼을 할 만한 데가 많지 않습니다. 전철역이나 버스역에서도 차를 기다리며 앉을 자리가 거의 없습니다. 공무원들 말을 빌면, 걸상을 마련해 놓으면 노숙자가 와서 드러누우니 안 좋다고 하는데, 노숙자한테도 걸상에 앉을 권리가 있고, 노숙자 아닌 사람들도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공원 긴걸상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권리가 있어요. 공원 풀밭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볼 권리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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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열네 살> 2권 겉그림 ⓒ 샘터

▲ 겉그림 <열네 살> 2권 겉그림 ⓒ 샘터

― “나카하라, 어디 가? 도시락은?” “바깥에서 먹으려고. 바깥이 기분 좋으니까.” “그럼 나도 갈게. …… 정말 맛있어. 역시 바깥이 좋군.” “그래, 교실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지?”  (1권 104쪽)

 

지금 우리들이 누리는 권리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무슨 권리를 얼마나 누리고 있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권리를 누리면서 느긋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나마 하고 있을는지요.

 

우리가 빼앗긴 권리나 잃은 권리가 무엇인가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지 않을까요. 빼앗긴 권리를 찾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는 채, 잃은 권리를 되찾을 꿈은 꾸지도 못하는 가운데, 돈이고 이름값이고 권력이고에 끄달리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요.

 

 동무도 없이, 식구도 없이, 피붙이도 없이, 이웃도 없이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죽어 땅에 묻히면 한 줌 쓸모도 없는 물질 욕망에만 사로잡힌 채, 아니 물질욕망에조차도 사로잡히지 못한 채 넋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3) <열네 살>이라는 만화책

 

두 권짜리로 된 만화책 <열네 살>을 봅니다. 일본 도쿄 한복판에 세 식구가 단출하게 살아갈 집 한 채 있고, 아내도 튼튼하고 딸내미도 씩씩하게 자라는 집안을 이끌어 가는 ‘집기둥(가장)’이라는 짐을 어깨에 짊어진 채 회사원 노릇을 톡톡히 해 나가는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둘러보지 못합니다. 식구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피붙이를 헤아리지 못합니다. 오로지 일에만 파묻힌 사람입니다. 어머니도 잊었고 아버지도 잊었고 누이도 잊었습니다. 이이가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이이 한 사람이 빠진다고 할 때 이이가 맡았던 톱니바퀴가 얼마나 얼크러질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앞으로만, 또 앞으로만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짓눌린 채 아무것도 바라보지 못하면서 살아갑니다. 아무것도 못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 “요즘 들어 그 전쟁에서 내 인생은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카하라 씨, 왜 그런 생각을?” “하하하,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정말, 전쟁이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1권 27쪽)

 

이리하여, 중년 나이가 되도록 ‘자기가 미처 못 느끼고 지나친 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느끼지 못합니다. 아이한테, 또 아내한테 들려줄 자기 이야기(추억)가 없습니다.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라면 오로지 잔소리와 다를 바 없는 ‘교훈’ 같은 다그침이나 꾸지람쯤일까요.

 

이런 주인공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에만 파묻힌 채 식구들이고 누구고 돌보지 않으며 살던 어느 날, 기차를 잘못 타서 고향마을로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모처럼 어머니 무덤 앞에 서게 되고, 이때 ‘여태 잊고 지내던, 아니 생각을 않으며 지내던 열네 살 나이’로 돌아가며 그때 삶을 하나하나 되씹게 됩니다.

 

― “남자는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왜?” “그러니까, 큰 이상을 가질 수 있잖아.” “그렇지 않아.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어. 앞으로 세상은 더 변할 거야. 여자도 훌륭하게 자립할 수 있는 시대가 올 거야. 앞으로 십 년만 지나면, 외국에도 지금보다 더 쉽게 갈 수 있어.” “정말?” “응, 변하는 거야.” “네 꿈도 이루어질 수 있는 세상이 올 거야.” (1권 196쪽)

 

꿈이면 꿈이고, 거짓이면 거짓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아간다고 하는 오늘 하루는 얼마나 오늘답거나 얼마나 참다울는지요.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는 우리한테 뜻깊으며 아름답거나 즐겁거나 반가운 하루일까요. 그냥저냥 흘려보내는 하루는 아닐까요.

 

하루 세 끼니를 챙기는 일이 중요할 수 있지만, 하루 세 끼니보다 더 중요한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한테 주어진 일감을 늦지 않게 해내는 일도 중요할 테지만, 주어진 일감보다 더욱 중요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집안에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 일이 있으면 말미를 얻어서 찾아갑니다. 집안에 누군가 혼인을 하거나 기쁜 일이 있어도 먼저 약속을 잡고 찾아가서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슬픔도 함께 나누고 즐거움도 함께하며 아픔도 서로 씻어 주고 아름다움도 함께 가꾸어 갑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홀로 짊어지는 짐이란 없습니다.

 

열네 살 어릴 적에는 어린이라서 못 깨닫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스물네 살 젊은이 때에는 어떠한지요. 서른네 살에는, 또 마흔네 살에는, 또 쉰네살이나 예순네 살에는 어떠할까요. 핑계를 대는 데에 바쁘거나 둘러대며 지나치려고만 하는 데에 꾀만 늘어나는 우리들은 아닙니까.

덧붙이는 글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 + 헌책방 +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2008.02.11 17:55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책 + 헌책방 + 우리 말 이야기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열네 살 1 - 꽃이 지기 전, 나는 봄으로 돌아갔다

다니구치 지로 지음,
샘터사, 2004


#만화책 #만화 #다니구치 지로 #열네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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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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