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티첼리의 '비너스'는 결핵 환자?

[서평] 호흡기내과 의사가 전하는 <그림 속의 의학>

등록 2008.02.21 16:06수정 2008.02.2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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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 보티첼리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그의 아내이자 꽃의 여신인 플로라가 이제 막 바다에서 육지로 상륙하려는 비너스에게 꽃바람을 불어 축복하는 찰나, 육지에서는 화려한 꽃장식 드레스를 걸친 시간의 여신 호라이가 비너스를 맞는다.

갸날픈 몸매의 비너스는 오른손으로는 가슴을, 왼손으로는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전형적인 포즈로 수줍은 듯 약간 고개를 돌리고 서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금발머리의 미녀가 내과 의사 한성구의 책 <그림 속이 의학>에 등장한 까닭은 뭘까?

바로 왼쪽 어깨 때문이다. 일부 미술 애호가들은 보티첼리가 비너스의 왼팔을 무리하게 하복부에 가져다두는 바람에 어깨가 처지게 그려진, 단순한 데생 실수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호흡기내과 의사의 소견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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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핵으로 한쪽 폐가 망가진 여인의 가슴 X선 ⓒ 일조각


"초점 없는 커다란 눈망울, 마른 듯한 가늘고 긴 체형, 창백한 얼굴과 뺨의 홍조 덕분에 결핵에 걸린 젊은 여자는 애처로울 정도로 예뻐진다. … 당시 피렌체 최고의 미인으로 뭇 남성의 밤잠을 설치게 하고는 20대 초반에 결핵으로 요절하여, 미인박명이란 말에 딱 들어맞는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 결핵 환자 중에는 한 쪽 폐에만 결핵이 심한 환자들이 있는데,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이럴 때 대부분 왼쪽 폐가 망가진다. 혹시 왼쪽 주기관지가 길어 객담 배출이 쉽지 않은 것이 이유가 될지도 모르겠다. 왼쪽 폐가 심한 결핵으로 망가지면 그쪽 가슴이 오그라들고 어깨가 처지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상황이 된 환자의 가슴 X선을 보면 이해가 된다. 경험이 있는 호흡기내과 의사라면 이 비너스가 왼쪽 폐가 심한 결핵으로 망가진 결핵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의사가 본 그림 이야기 <그림 속의 의학>에는 이처럼 그림속에 숨어 있는 흥미진진한 의학 이야기가 즐비하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한껏 멋있는 포즈를 취하지만, 현대 의학으로 살펴보면 다양한 병증을 읽어낼 수 있다.

어려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도한 뭉크는 의사였던 아버지가 아무런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데 대한 실망감을 화폭에 그대로 담아낸다. 병실 풍경을 많이 그렸던 뭉크의 그림들 가운데 <몽유병자>나 <생 클루의 밤>은 잠 못 이루는 불면증 환자를 그린 것이다.

또, 라브가 그린 <헝가리의 여왕>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자유분방하고 아름다운 왕비 '씨씨(애칭)'를 모델로 했는데, 그녀의 개미허리는 꽉 조이는 코르셋 덕분이었다.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황후는 뒷날 제네바의 레만 호에서 배에 오르다가 무정부주의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게 된다. 평소 꽉 끼는 코르셋으로 감각 신경이 손상된 상태였던 씨씨 황후는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쓰러졌다고 한다.

<시녀들>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벨라스케스는 공주 곁에 있는 시녀들 중에 난쟁이를 둘이나 그려넣었다. 그는 크레틴병이라고 알려진 선천성 갑상선 기능저하증을 앓고 있는 난쟁이와 이마가 튀어나온 연골무형성증 환자인 <난쟁이 세바스찬> 등 난쟁이 그림을 많이 그렸다.

모델이 앓고 있는 병이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드러난다면, 화가의 병세에 따라 그림은 색감이나 스타일 자체가 크게 달라진다.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모네는 시력을 잃기 전과 후의 그림이 완연하게 다르다. 물론 한 작가가 20~30년 동안 같은 스타일을 그리지 않고, 시간이 흐르면서 양식이 달라지는 것은 일반적이지만, 백내장 수술을 끝까지 안하겠다고 버틴 고집쟁이 화가 모네의 경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책은 의사를 소재로 한 작품과 서양 의학수업을 그린 렘브란트의 해부수업, 정신과 치료를 받았던 고흐의 그림들이 의사의 시선으로 소개하고 있다.

특히 <예수 의사>와 <인간 예수>같은 작품을 통해 사람들이 의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놓치지 않고 있어 서양미술사에 등장한 의학 이야기와 우리 시대 의학과 의사에 대한 지은이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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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본 서양미술 이야기 ⓒ 일조각


프라 안젤리코의 <팔라디아를 치료하는 성 코스마스와 성 다미아누스>를 보면 환자의 집을 나서는 의사에게 환자 가족이 감사의 표시로 금품을 내밀고 있는데, 의사는 한 손으로 사양의 표시를 하고 있지만 다른 한 손으로 금품을 받고 있다. '의술을 펼치는 대가로 어떠한 금품도 받지 않겠다'는 스스로 한 서원을 어기고 있는, 요샛말로 '촌지'를 받는 장면이다.
촌지를 '밝히는' 의사는 곤란하다. 또 퇴원을 앞둔 환자가 '촌지'로 마음에 부담을 느낀다면 그 또한 안 될 일이다. 그러나 '저 의사 선생 때문에 내가 살았다'라고 생각하는 환자가 마음에서 우러나서 내미는 촌지를 무턱대고 거절하는 것 또한 어렵다. 택시 타고 가시라고 아드님이 드린 돈을 아껴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고의춤에서 꺼내 손에 쥐어주시며, "선생님이 건강해야 내가 오래 살지. 꼭 맛있는 것 사 잡숴"라며 몇 번이나 다짐하던 할머니, 그리고 치료 후 숨이 훨씬 덜 차서 산에도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직접 딴 송이버섯 몇 송이를 신문지에 싸서 어색하게 내밀던 할아버지. 의사는 이러한 촌지를 사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가 어두운 이 분들을 위해 큰소리로 외친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이러니 의사가 개혁의 대상인가 보다.(이 책 275-276)

1장 흔들리는 삶에서는 렘브란트의 <밧세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등 그림 속 주인공에게서 질병의 증후들을 찾아보고, 화가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고통들을 그려낸 그림들을 살펴본다.

2장에서는 질병을 앓았던 화가의 작품과 육체적 결함 때문에 서럽게 살았던 그림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3장과 4장은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다양한 대응 방식과 남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이어 험난한 의사의 길을 걷는 의대생들을 그린 그림들을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서 겪은 지은이의 생각을 들을 수 있고, 5장에서는 존경을 받기도, 때로 질타를 받기도 한 의사들의 모습을 그림으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돈을 쥔 자들이 의료를 통제한다는 글을 통해 의학이 직면한 문제들을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한다.

우리가 자주 들어왔던 일상적이 병증 이야기로 접근하는 이 책은 서양 미술이 어렵다고 느꼈던 사람들이나 그림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 흥미를 자극하는 입문서로도 손색이 없다.

그림 속의 의학

한성구 지음,
일조각,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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