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세 알을 함께 심는 마음이 그립다

[포토에세이] 도토리의 싹

등록 2008.03.08 10:08수정 2008.03.08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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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참나무의 새싹 긴 겨울 지나고 새싹을 내고 있다. 정확한 명칭은 졸참나무의 열매지만 이 글에서는 '도토리'라고 부른다. ⓒ 김민수

▲ 졸참나무의 새싹 긴 겨울 지나고 새싹을 내고 있다. 정확한 명칭은 졸참나무의 열매지만 이 글에서는 '도토리'라고 부른다. ⓒ 김민수
콩 세 알의 마음
 
콩의 종류에 따라 심는 방법도 다르지만 대체로 콩을 심을 때면 자그마한 흙구덩에 서너알씩 넣고 묻어준다. 완두콩 같은 것은 밭을 곱게 갈아준 후에 훌훌 뿌리고 대충 흙을 덮어주면 흙냄새를 맡고 새싹을 내기도 한다.
 
씨앗을 훌훌 뿌리고 나면 어떻게 알았는지 날짐승들이 날아와 씨앗을 쪼아 먹는데 남의 수고를 가로채는 것 같아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옥상 텃밭에 흙구덩을 파고 심은 것도 비둘기가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니, 씨앗을 뿌린 뒤 들짐승이나 날짐승이 얼씬거리면 그것들을 쫓아내곤 한다.
 
메주콩을 심을 때에 서너 알씩 심는다. 나는 그 이유를 혹시라도 싹을 틔우지 못하는 놈들이 있을까봐 그런가보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하나는 날짐승의 몫으로, 하나는 흙 속의 벌레들의 몫으로, 하나는 땀흘린 자신의 몫으로 콩 세 알을 심는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그럴듯하게 만들어낸 이야기라도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긴가! 그런 심성이 없었다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었을 것이며, 그런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일상적인 나눔의 삶이 들어있다.
 
그랬다. 그렇게 살았기에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못했을지언정 행복하게 살았다. 오늘 우리가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만 행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콩 세 알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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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참나무의 새싹 나무가 될 싹은 확실히 다르다. ⓒ 김민수

▲ 졸참나무의 새싹 나무가 될 싹은 확실히 다르다. ⓒ 김민수
 
도토리 새싹에서 콩 세 알의 마음을 보다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따스한 햇살이 도시로 향하는 발걸음을 붙잡는다. 23번 국도를 타고 오다가 가까운 야산자락을 거닐며 혹시나 피어난 꽃이 있을까 눈길을 주며 걸었다.
 
맑고 따스한 봄햇살, 꽃이 없어도 좋은 날이다. 그저 자연의 품에 안겨 부드러운 흙의 느낌을 저 발바닥으로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날이다. 아직 풀꽃들의 행렬은 더 남녘땅에서 진행형인가 보다 생각하며 봄햇살 흠뻑 맞자 생각하고 걷는데 제법 커다란 새싹이 보인다.
 
그것은 어릴 적 가을이면 산으로 다니며 도토리묵을 쑤어먹는다고 줍고 따던 도토리의 새싹이었다. 하나 둘 주워 따스한 햇살에 잘 말려두었다가 껍찔을 까고, 잘 불려서 멧돌에 갈아 물에 담가두면 묵가루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먹고 싶을 때마다 묵가루와 물을 잘 섞어 끓여주면 맛난 도토리묵이 되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의 욕심이 과했는지 산짐승들의 몫으로 돌아가야 할 것까지도 말끔히 주워오는 바람에 '다람쥐의 몫'을 남겨두자는 캠페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젊은 사람들이야 도토리가 떨어져 있어도 별 관심이 없지만 도토리를 줍거나 따본 세대들에게는 줍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유혹을 뿌리치기가 힘든가보다. '산짐승의 몫으로 남겨둬야지' 생각하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줍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 산짐승의 몫으로, 흙에 사는 벌레의 몫으로, 사람의 몫으로 아낌없이 나눠주고도 자신의 몫으로 새싹을 낸 졸참나무의 새싹을 보니 참으로 신비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마음이 갸륵해서 하늘님이 남겨두었다가 새 봄에 피어나게 하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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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참나무의 새싹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우뚝 일어섯다. ⓒ 김민수

▲ 졸참나무의 새싹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우뚝 일어섯다. ⓒ 김민수
 
그리운 콩 세 알의 마음
 
그리워하지만은 말자, 내가 그리우면 다른 이들도 그리운 것이니 내가 그 그림움이 되자 생각하며 살아도 쉽지가 않다. 그래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래서 사람이다.
 
5월 GMO(유전자조작식품)옥수수를 수입하겠단 보도로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생명의 밥상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밥상을 대하게 된 근원적인 이유는 결국 '콩 세 알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전 세계인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량보다도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면서도 기아선상에서 굶어죽어가는 이들이 있는 현실, 그들의 식량을 인간의 편리를 위한 기계가 먹어치우는 현실, 넘쳐나는 식량에도 불구하고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GMO 식품의 범람….
 
지구라는 작은 별. 그 곳에 오로지 인간만 남아 살아갈 수 있는가? 강자와 일등만 살아갈 수 있는가? 오로지 강자 혹은 강대국과 일등만을 위해서 모든 것이 봉사하는 현실, 그 속에서 소시민들은 그저 '콩 세알의 마음'을 그리워만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 '나도 강자가 되겠다 혹은 일등이 되겠다'는 경쟁대열에서 용감하게 빠져나오는 사람, 최소한 내가 왜 뛰어가고 있는지 묻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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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발톱의 새싹 이 작은 새싹을 담으려면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며 담아야 한다. 새싹에 대한 경의를 보내지 않으면 그들을 볼 수 없다. ⓒ 김민수

▲ 매발톱의 새싹 이 작은 새싹을 담으려면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며 담아야 한다. 새싹에 대한 경의를 보내지 않으면 그들을 볼 수 없다. ⓒ 김민수

 

새싹을 보는 마음처럼  

 

작은 새싹이 봄햇살에 반짝인다. 매발톱 새싹이다. 그를 카메라에 담으려니 최소한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게 최소한이고 좀더 적극적으로는 배를 땅에 붙이고 엎드려야 한다. 무릎을 꿇고 뷰파인더를 보자니 큰절을 하는 형상이 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이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최소한 그들과 같은 눈높이가 되어야만 그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깨달음. 우리 사람이 새싹에 대한 경의로움을 보려면 그렇게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해야 하는 것이구나. 그것이 본래 우리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기본자세였구나.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리고 군림하다보니 결국 이렇게 강퍅한 세상이 된 것이구나.

 

날짐승과 심지어는 땅 속의 벌레까지 배려하는 마음, 거기에 사람에 산짐승들까지 가을인면 떨어지는 도토리를 먹지만 마침내 새 봄에 이렇게 피어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긴 겨울 맨 몸으로 오돌오돌 떨다가 봄 햇살 한 줌에 온 몸 벌겋게 상기되어 올라오는 저 새싹의 신비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아낌없이 주고도 새로운 생명을 피워내는 저 도토리처럼 신비스러운 삶을 살아가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카페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8.03.08 10:08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카페 <달팽이 목사님의 들꽃교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새싹 #도토리 #매발톱 #완두콩 #졸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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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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