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왕과 양녕, 누가 먼저 초궁장을 알았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록 2008.03.15 08:34수정 2008.03.15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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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관계에 놓인 세자(양녕대군)-초궁장-상왕(정종). 드라마 <대왕세종>. ⓒ KBS



큰아버지의 애첩을 건드리다니, 간이 부을 대로 부었네

최근 <대왕세종>에서는 세자 이제(양녕대군)와 초궁장의 부적절한 관계가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가 되고 있다.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애첩을 건드린 세자의 '무개념 애정행각'이 그를 파멸의 늪으로 빠뜨리고 있다.

드라마 상으로만 보면, 세자는 간이 부을 대로 부은 사람이다. 아무리 이성에게 미쳤기로서니 이 세상에 큰아버지의 애첩을 건드린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 갖고는 시도하기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사건의 진상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이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일국의 세자인데 과연 그렇게 비상식적인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지를 수 있었을까? 상식적으로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진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세자와 초궁장의 애정관계, 실록은 어떻게 기록했나?

<태종실록>에서 세자와 초궁장의 애정관계를 다룬 것은 태종 15년(1415) 5월 13일자 기사에서다. 여기에는 "상왕이 일찍이 초궁장을 가까이 하였는데, 세자가 이를 알지 못하고 사통하였기 때문에 초궁장을 (궁궐에서) 내쫓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만 놓고 보면, 세자는 큰아버지의 여자를 건드린 부도덕한 사람이 되고 만다. <대왕세종>에서처럼 큰아버지의 첩인 줄을 뻔히 알면서 초궁장과 사귄 것은 아닐지라도, 일단 큰아버지의 애첩을 건드렸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세자를 무조건 비난하고 넘어가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왜냐하면, 그로부터 6개월여 전의 사실을 기록한 태종 14년(1414) 10월 26일자 기록에서는 세자와 초궁장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날짜 <태종실록>에는 부마 이백강의 집에서 열린 왕족 파티(대군들만 참석)에 아버지의 명령으로 참석한 세자가 그곳에서 "기생 초궁장을 끼고" 밤새 놀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관이 그 사실을 아주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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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자와 초궁장. 드라마 <대왕세종>. ⓒ KBS



초궁장, 처음부터 상왕의 애첩은 아니었다

이 날의 연회에 관해서 보고 받은 태종 역시 "너 누구랑 놀다가 왔느냐?"고 나무라지 않고 "너 어쩜 그렇게 방종하게 놀 수 있느냐?"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밤새도록 기생을 끼고 술을 마신 사실을 나무라고 있을 뿐, 어찌 감히 상왕의 애첩과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느냐고 꾸짖지는 않은 것이다.

또 이 날짜 <태종실록>에서는 세자가 연회 도중에 내뱉은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문제 삼고 있을 뿐, 초궁장과 함께 술을 마신 사실 자체에 대해서만큼은 아무런 문제도 삼고 있지 않다.

이 점을 본다면, 초궁장이 궁궐에서 쫓겨나기 6개월여 전인 태종 14년 10월 26일 당시만 해도 초궁장이 아직 상왕의 애첩이 아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상왕의 애첩이 아니었기에 세자가 초궁장과 함께 밤새도록 술을 마신 사실이 실록에서 대수롭지 않게 취급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그때 초궁장이 상왕의 애첩으로 알려져 있었다면, 이백강의 집에서 열린 왕족 파티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초궁장이란 기생을 모임에 초대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또 그를 세자의 옆자리에 앉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까지만 해도 상왕과 초궁장이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기 때문에 세자 역시 왕족 파티장에서 초궁장을 끼고 밤새도록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것이고, 사관 역시 그것이 도덕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자가 먼저 초궁장을 알았다

혹 상왕 정종이 태종 14년 이전부터 초궁장과 은밀히 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매우 낮다. 1414년이면 정종이 58세가 되는 해다. 세자처럼 월담을 해서 기생을 만나러 갈 수는 없는 나이다. 그리고 이후에 초궁장을 궁궐에 불러들인 점을 볼 때에, 상왕은 굳이 월담을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기생을 불러들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상왕이 초궁장을 애첩으로 맞이한 시점은 태종 14년 10월 26일 이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왕족 파티를 통해 초궁장이란 존재가 왕실에 알려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상왕이 그를 궁궐로 불러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먼저 초궁장을 알았느냐?'를 굳이 따진다면, 상왕이 아니라 세자가 먼저 그를 알았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세자가 먼저 육체 관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세자가 먼저 초궁장을 알았던 것만큼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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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초궁장. 드라마 <대왕세종>. ⓒ KBS


세자는 상왕과 초궁장의 관계를 몰랐다

그럼, 초궁장이 궁궐에 들어간 이후에 세자가 그런 사실을 알고도 그와 관계를 가진 것인지 여부를 살펴보기로 한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세자는 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자신이 먼저 초궁장을 알았다고 해도 그저 술을 함께 마신 정도에 불과하다면, 큰아버지의 여자가 된 이후에는 초궁장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유교 사회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아니, 굳이 유교이념을 운운하지 않더라도 어느 사회에서나 그 점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태종실록>의 기록을 볼 때에, 세자는 정말로 상왕과 초궁장의 관계를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앞서 소개한 태종 15년(1415) 5월 13일자 기사가 "세자가 상왕의 기생인 줄 모르고 초궁장과 사통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특별한 반대증거가 없는 한 사료의 기술을 존중하는 게 마땅할 것이다. 이 점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부정하는 쪽에서 입증책임을 부담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세자의 성적 난행에 대해 상당히 엄정한 <태종실록>이 초궁장 스캔들에 대해서만큼은 세자에 대해 호의적인 점을 볼 때에, 세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태종실록>은 태종 17년(1417)에 불거진 세자와 어리(곽선의 첩)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전에 발생한 세자와 초궁장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별로 자세히 기술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상왕이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세자가 그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책임이 없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초궁장이 사실을 밝히지 않는 한 세자가 알기는 어려워

초궁장이 궁궐에 사는 줄을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 세자가 상왕과 초궁장의 관계를 정말로 몰랐겠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개 기생이 상왕의 침전에 들어온 사실을 세자가 반드시 알고 있었으리란 법은 없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대궐 외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세자가 상왕과 초궁장의 관계를 몰랐을 것이라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대궐 밖에 나온 초궁장이 자신과 상왕의 관계를 밝히지 않는 한 세자가 그것을 파악해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사관이 '세자는 상왕의 애첩인 줄 모르고 초궁장을 건드렸다'고 기술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의 애정행각이 궁궐 내부가 아닌 궁궐 외부에서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세자가 궁궐 안에서 초궁장과 잠자리를 함께한 것이라면, 그 같은 명명백백한 상황을 두고서 사관들이 '세자는 정말로 모르고 한 짓'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사관들은 왕이 시키는 대로 사료를 기록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느냐?'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전제왕권 하에서일지라도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양심과 직업의식이 있는 법이다.

세자가 도덕적 비난을 받는 상황 속에서 사관이 세자에게 유리한 내용을 기록했다면, 그렇게 기록할 만한 객관적 정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만약 세자가 상왕과 초궁장의 관계를 알고도 적극적으로 그에게 접근했음을 입증하는 정황이 드러났다면, 사관들의 기록 태도 역시 달라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세자가 아닌 초궁장

위와 같이 실록 기록이나 객관적 정황을 놓고 볼 때, 세자는 상왕과의 관계를 정말로 모르는 상태에서 초궁장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정작 도덕적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세자나 상왕이 아니라 초궁장 쪽일 것이다.

자신이 상왕의 애첩이 되어 궁궐에 들어온 사실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초궁장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실을 밝히든 안 밝히든 간에, 초궁장이 상왕의 거처에서 이탈해 세자가 있는 곳으로 갔다는 사실 역시 결코 가벼이 볼 수 없다. 두 사람의 애정관계에 세자의 강제력이 작용했다기보다는 초궁장의 자유의지가 작용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과거의 왕'과 '미래의 왕' 사이에서 별다른 도덕적 거리낌 없이 애정행각을 벌인 초궁장이 세자나 상왕보다도 더 큰 비난을 받는 게 마땅할 것이다. 만약 그가 상왕이 아닌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졌다면, 태종은 그를 궁궐에서 내쫓는 정도가 아니라 분명히 그보다 훨씬 더 큰 벌을 내렸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대왕세종>에서는 세자에게 강도 높은 도덕적 비난이 집중되고 있지만, 실제로 그는 이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큰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불 안 가리고 이성을 너무 좋아하다가 운수 없게 '지뢰'를 밟았다고 보는 편이 나을 듯하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몸을 마구 굴린 세자의 처신도 문제였지만, 그에게 운이 안 따라준 점도 문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자가 초궁장과 잠자리를 함께 한 날은 '운수 좋은 날'(현진건 소설)이 아니라 그야말로 '운수 없는 날'이었다.
#대왕세종 #대왕 세종 #양녕대군 #정종 #초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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