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에서 만난 재수생, 그녀와의 특별한 대화

재수와 실패가 두려운 당신에게

등록 2008.03.31 11:08수정 2008.03.3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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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대구에 사는 친구를 만나고 대전으로 돌아오는 열차 안이었다. 오랫만에 떠난 장거리 여행(?)이었기에 열차에서 푹 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대학교 영어 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차 좌석에 앉자마자 책 가방에서 영어 과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나는 주변사람들에게 피해를 안 주기 위해 되도록 조용한 목소리로 영어 과제를 읽어 나갔다. 그런데 몇 분 지났을 즈음, 옆에 앉아 있는 여성이 힐끗 눈치를 준다. 나름대로 작은 목소리로 읽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 것 같다. 괜히 미안한 마음에 조금 더 목소리를 낮춰 나지막하게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세심한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자리의 여성은 손가락을 톡톡치며 내게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시끄럽냐며 한마디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기요… 혹시, 대학생 이세요…?"

핀잔을 건넬 줄 알았던 그 여성은 뜻밖의 말을 전한다. 나는 내가 대학생인 게 너무 당연스러웠기에 "네"라고 짧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 대답에 그 여성은 짧게 혼잣말을 한다.

"와, 좋겠다."


그 말에는 감탄과 부러움 같은 게 섞여 있는 듯 보였다 그런데. 뭐가 좋다는 말일까? 한참 생각해봐도 나는 그 여성이 던진 '좋겠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여성에게 물었다.

"그쪽 분도 대학생 같은데,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럼 직장인?"
"아… 전…."

계속되는 물음에 그 여성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결국 대답할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여성은 어쩔 수 없이 답을 해줬다.

"전, 올해 대학에 떨어졌어요."
"아!"

그때 처음 알았다. 꿈이 깨진 사람의 목소리는 그렇게 작고 희미하다는 것을.

그랬다. 알고보니 그 여성은 올해 대학입시에서 떨어진 수험생이었던 것이다. 그 여성은    내게 잠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여성은 수능점수는 꽤 괜찮게 받았지만 목표로 했던 대학교에 떨어져서 재수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 열차를 타고 타 지방 기숙 학원에 가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그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슬플까? 기숙 학원 가는 열차안에서 옆에 사람이 대학생 티를 냈으니 그 여성 마음에 좀 생채기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무나 당연스럽게 생각했던 대학생이란 이름이 어쩌면 그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러운 특권이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졌다. 좀 미안해 하는 표정을 짓자 그 여성은 괜히 웃는다.

"괜찮아요. 제가 선택한 재수니깐, 열심히 해서 후회없이 하려고요."

힘이 쭉 빠진 그 여성은 애써 당당한 듯이 내게 말을 건넨다. 하지만 그 당당함 속에 감춰진 끝모를 두려움과 걱정이 엿보인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나역시 재수와 입학 사이에서 고민했던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문득 나의 수험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 여성의 마음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수험생이었던 시절, 나 역시 수능점수에서 기대에 못미치는 점수를 받고 재수와 입학사이에서 많이 고민을 했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용기가 없어서 재수를 선택하지 못했고 '지방대 혹은 지방 캠퍼스'라고 하는 대학에서 평범한 대학생으로 사는 방법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그 선택이 옳았기도 했지만, '만약 다시 공부를 했더라면'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 꿈과는 방향이 다른 학과에서 공부하면서, 그래도 그 꿈에 멀어지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달렸던 시간들은 결코 녹록치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런 고민은 지금 기숙학원을 선택한 그 여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재수를 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선택이고, 결국 나중에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무거운 책임감과 싸워야 하는 그 여성에게 나는 내 생각을 말해줬다.

"재수를 한다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려울 거에요. 하지만 잘 견뎌낸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신의 꿈을 향해서 가까이 다가 갈 수 있으니까 어려워도 참고 이겨냈으면 좋겠네요."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에 침울해있던 그 여성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분명 그랬다. 그 여성은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 백제를 연구하는 사학자가 되고 싶어요. 부모님은 사학자는 굶어 죽는다며 농담섞인 핀잔을 주시지만 간직한 꿈을 잃고 싶지는 않아요. 꼭 해내고 싶어요. 그 꿈을 위해 목표로 한 대학을 정했고, 다시금 재수를 선택했어요. 힘든 순간이겠지만 1년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요."

아까의 힘없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 여성의 목소리는 반짝반짝 빛이났다. 그리고 난 그 여성을 보며 다시금 깨달았다. 꿈을 간직한 사람은 작은 실패에 포기하지 않는다는 흔한 진리를 말이다. 한 번의 실패를 겪은 재수생, 아니 실패를 이겨내는 예비 역사가는 그렇게 대화의 끝에서 활짝 웃고 있었다.
#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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