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징용, 한국법원이 재판할 수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 신일본제철 상대 1심 소송 패소... 다만 재판관할권 등 인정해 주목

등록 2008.04.03 16:15수정 2008.04.03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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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보상받는 일은 여전히 요원해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0부(윤준 부장판사)는 3일 오전 지난 2005년 일제 강점기 때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귀국한 여운택(85)씨 등 5명이 "미불 임금과 돌려받지 못한 강제 저축금·위자료 등을 지급하라"며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5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의 시효가 소멸됐다는 점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서로 다른 회사라는 점 등을 들어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기각했다. 다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에 대한 한국법원의 재판관할권을 인정해 주목된다.

일본법원 판결을 수용한 재판부 "위자료 청구 권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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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서울가정법원이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건물.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재판부는 "당시 일본 정부의 조직적인 인력 동원에 일본제철이 적극적으로 참여, 인력 확충에 나선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법인격도 다르고 채무승계 관계에 있지도 않은 만큼 원고들은 피고를 상대로 위자료를 청구할 권리가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여씨 등 2명은 일본에서 최종 패소 확정 판결을 받았고, 일본 법정의 판결이 국내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밖의 사회질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국내에서도 기속력을 갖는 만큼 다시 판결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국의 대법원에 해당하는 일본의 최고 재판소는 지난 2003년 10월 "당시 여씨 등을 강제동원한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의 법적 연속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한 원심을 확정한 바 있다.


다만 재판부는 "원고 중 이씨 등 3명의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협정에 의해 소멸된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며 "우리나라가 일본과 맺은 청구권 협정에 의해 우리나라 국민의 일본국에 대한 청구권 자체가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일제강점기 피해에 대한 일체의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신일본제철측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특히 국가와 국가 사이에 이루어진 협정과 별도로 개별 국민의 청구권은 살아있다고 판결해 주목된다.

그동안 일본 정부와 사법부는 ▲현 회사(신일본제철)는 예전 회사(일본제철)와 다르다 ▲배상의 소멸시효가 지났다 ▲전쟁 피해를 국가가 배상할 수 없다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됐다 등의 이유로 배상을 거부해왔다.

"일본 정부가 불법행위... 한국 법원에 재판관할권"

또한 재판부는 이날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고, 그것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관할권도 인정해 눈길을 끌었다.

재판부는 "일본 정부가 제철소에 인력을 강제 동원하고 구 일본제철도 일본정부의 동원 정책에 가담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며 "원고들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기망에 의해 동원됐고 어린 나이에 구체적 임금도 모른 채 강제노동에 종사했다는 사실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일본정부가 제철소 인력 확보를 위해 어린 나이의 원고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열악한 환경속에서 강제 노역을 하게 한 점, 원고들이 가족과 떨어져 구체적 임금 액수도 모른 채 상시 감시를 당하며 일본 정부의 조직적 기망행위에 이용당한 점 등은 증거 자료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다"고 지적했다.

이어 재판부는 "원고들이 동원돼 강제노동을 했기 때문에 불법행위는 대한민국 내 원고들의 각 거주지역에서 원고들을 동원한 것으로부터 일본에 이르러 강제노동에 종사시키기까지 일련의 계속된 과정에서 이뤄진 것이므로 대한민국은 불법행위지에 해당하고, 우리나라 법원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소송을 제기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소극적 판결"이라고 반발하면서 "향후 항소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소송의 원고로 참여한 김기수씨는 "앞으로 상급법원에 항소할 것인지 아니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것인지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 "우리는 아직도 일본의 사법지배를 받고 있다"

김은식 태평양전쟁 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사무국장은 "강제동원의 불법성을 알면서도 그 책임을 피하기 위해 회사가 서로 다르다는 일본 법원의 판결을 수용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며 "일본 제국의 법률에 따라 내려진 판결을 그대로 인정한 걸 보면서 우리가 아직도 일본의 사법지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꼬집었다.

김 사무국장은 "일본제철이 파산하고 신일본제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본제철의 자본금이 투입되고 임원들도 그대로 옮겨갔다"며 "그런 것을 증명하는 내부자료를 증거로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제철과 신일본제철은 서로 다른 회사다'라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사무국장은 강제동원 피해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관할권 인정, 강제동원의 부당성 인정, 한일협정에 따른 위자료 청구권 소멸 불인정 등을 예로 들며 "몇가지 중요한 판결을 내렸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특히 이날 '일본제철원 징용공재판 지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인 2명이 참석해 1심 재판 결과를 성토해 눈길을 끌었다.   

나카다 마쓰노부는 "한국 사법부가 왜 일본기업의 범죄를 감싸주는지 알 수 없다"며 "(이런 범죄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지 않고 한일간 우호관계가 맺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1심 판결 결과에 대한 소감을 피력했다.

우에다 케이시는 "강제동원의 피해의 시효는 60년 전에 소멸됐다고 인정했는데 이들은 60년 동안 계속 피해를 받아왔다"며 "왜 시효가 소멸됐다는 이유로 기각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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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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