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은 단지 도서관만은 아니었다

[서평]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등록 2008.04.16 08:45수정 2008.04.16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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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규장각 보물로 살펴본 조선시대문화사 ⓒ 책과함께


조선시대에는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중하급 관리들, 즉 언관들의 영향력이 매우 커서 왕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의견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언관들이 모여서 왕의 정책결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토론하던 곳이 바로 ‘대청’이었는데, 따뜻한 온돌이 깔려 있어 사시사철, 밤이고 낮이고 모여 앉아 갑론을박 했던 모양이다.

이런 꼴들이 보기 싫었던 숙종 임금이 드디어 묘안을 짜냈는데 바로 대청의 그 따뜻한 온돌을 거둬내고 마룻바닥으로 바꿔버린 사건이다.

작년쯤엔가 국정홍보처가 종로 정부청사 기자실의 에어컨을 없애버렸다가 기자들의 집단 항의를 받고 다시 설치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숙종 임금을 떠올렸다.

당시 국정홍보처 직원도 아마 이 옛 고사에서 힌트를 얻어 도모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끝까지 그 작전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에어컨을 다시 설치했던 것으로 보아 배짱만큼은 숙종만 못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좀 유치한 해프닝으로 끝난 그 사건도 ‘법고창신’ 정신의 발현이라고 둘러다 붙여보면 어떨까?

숙종 임금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모든 왕들의 이러한 행적들을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 조상들의 철저한 기록정신 덕분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경우 이미 유네스코가 그 가치를 인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한 바 있다.

그밖에도 오늘날의 청와대비서실이라 할 수 있는 승정원에서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기록한 ‘승정원일기’, 실록 제작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실록청의궤’나 ‘실록형지안’ 등 각종 기록유물들은 당시 궁궐을 중심으로 왕들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하루하루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들이다.

규장각은 요즘 TV 드라마 <이산>에서 탤런트 ‘이서진’이 그 역할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정조대왕께서 창덕궁 후원에 세운 궁중도서관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이전, 즉 숙종 시대에 이미 규장각이라는 현판이 존재했지만 그때까지 유명무실한 존재에 불과했던 규장각을 도서관 기능뿐만 아니라 정치개혁과 문화정책을 연구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육성한 것은 전적으로 정조의 치적이라고 한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조선 후기를 얘기하면서 조금이라도 칭송하고 기릴 만한 일들은 모두 다 영·정조 시절의 일 뿐이니 그 두 분 왕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 했나 싶기도 하다.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서책들과 글씨, 그림 등이 멸실되었지만 그나마 규장각에 보관된 사료들은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지고 있다니 다행스럽다고 하겠다.

정조 임금이 규장각으로 썼다는 창덕궁 후원 ‘주합루’에 나도 가서 본 적이 있지만 2층짜리 건물 한 동에 불과하다. 지금은 울타리로 막혀 있어 올라가 볼 수도 없는 저 전각에 그 많은 서책들과 그림들이 보관되어 있었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의 실학자들이 검서관으로 일했고, 도화서 화원들이 규장각과 그 앞 연못 풍경을 화폭에 옮겨 그린 후 품평을 주고받던 문화와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을 떠올리고는 새삼 가슴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밝고 화목한 역사보다는 전쟁이니, 반란이니, 사화니 하는 무겁고 우울한 역사를 더 많이 배웠던 우리들인지라 고궁에서조차 마음이 가벼워지기는 어려운 일. 그러나 그곳 창덕궁 후원 부용지와 주합루 주변에서만큼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다. 바로 아름다운 풍광과 더불어 한때 규장각이었던 주합루가 정조임금을 비롯하여 낯익은 실학자들, 그리고 당시 도화서 화원이었던 김홍도를 떠올려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없어져버린 ‘KBS 역사스페셜’ 팬들은 저자 신병주 선생의 얼굴이 아주 익숙할 것이다. 프로그램의 성격상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유물들이 수시로 거론될 수밖에 없었고, 그 때마다 저자가 규장각의 대표연구원으로 등장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기록 유물 중에서 대표적인 명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름이나 겨우 들어봤거나, 아니면 아주 들어본 적도 없는 기록유물들을 간략히 거론하고, 거기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지식까지 덧붙여 명품이 왜 명품인지 그 가치를 알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책은 규장각 소장도서의 장서목록에 불과하다. 목록에 나열되어 있는 책 중에서 어떤 책을 꺼내 읽느냐는 우리들의 몫이다. 저자의 말대로 무궁무진한 명품들의 보고 규장각의 장서목록을 일별했으니 이제부터는 목록이 아니라 진짜 책을 읽을 차례다.

덧붙이는 글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신병주, 책과함께, 416면, 1만8천5백원


덧붙이는 글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신병주, 책과함께, 416면, 1만8천5백원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 규장각 보물로 살펴보는 조선시대 문화사

신병주 지음,
책과함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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