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 작가'의 세계 최고 여행기

[서평]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고미숙 외 옮김)

등록 2008.04.26 22:36수정 2008.04.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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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가 옮기고 그린비가 펴낸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권) ⓒ 그린비



연암 박지원. 그는 <열하일기> <연암집> <허생전> 등을 쓴 조선후기 실학자 겸 소설가이다.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했으며, 자유롭고 기발한 문체를 구사해 여러 편의 한문소설을 발표했다. 그중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청나라 고종의 칠순연에 사신단으로 가는 팔촌형 박명원을 따라가 열하(熱河)의 문인들,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사귀며 그 곳 문물제도를 보고 배운 것을 기록한 여행기다.


그 열하일기를 본격적으로 국역한 책이 나왔다 해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었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상·하)>는 '연구공간 수유+너머' 선후배 사이인 고미숙·길진숙·김풍기가 옮기고 그린비가 상하권으로 펴냈다.

정조가 임금 자리에 오른 지 5년째 되는 해인 1780년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장장 6달 동안 '당대의 천재'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대장정이 있었다. 애초 목적지인 청나라 서울 연경(북경)까지 2300여 리를 한여름 무더위와 폭우 뒤 무섭게 흐르는 강물과 싸우며 가고 또 간다.

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연경에 황제는 없다. 그래서 열하의 '피서산장'에 머물고 있었던 황제를 만나려고 다시 목숨을 건 700리 길을 더 간다. 서둘러 오라는 황제의 닥달에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나흘을 꼬박 눈을 뜬 채 가고 또 가 당도한 열하. 드디어 18세기를 빛낸 <열하일기>가 탄생하는 운명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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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도 박지원이 사신단을 따라 갔던 열하일기의 여정도 ⓒ 그린비


그 <열하일기>에 옮긴 이들은 감히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훈장을 달아주었다. 어째서일까?

여행을 해본 사람은 안다. 그것도 6달 동안 긴 여행, 지금처럼 교통편이 편한 세상도 아니고 목숨을 건 고행길에 남들보다 하나를 더 보고, 꼼꼼하게 살펴보고, 다양한 사람을 사귀는 창조의 여행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연암은 늘 새벽에 일어난다. 그리고 일행보다 먼저 떠나 더 많은 견문을 시도한다. 말도 통하지 않은 청나라 사람들을 향해 수없이 필담을 던지고, 밤새 만남의 향연을 펼치는 그는 그저 부지런한 사람일 뿐인가? 아니다. 그는 없는 공간을 새롭게 만들고 그 공간을 채워나가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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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북구 연경에서 열하로 들어가는 관문 고북구의 험한 정경 ⓒ 그린비


열하는 중국인들이 '천하의 두뇌'로 여긴 곳이다. 두뇌를 누르고 있으면 오랑캐인 몽골의 목구멍을 틀어막는 셈이라고 여긴 황제가 자주 머문 '제2의 황성'이다. 그리고 연암의 세기의 작품이 탄생한 주요 공간이다.

여기서 그는 몽골·위구르·티베트 등 변방의 이민족들, 코끼리·낙타 등 기이한 동물, 화려한 불꽃놀이와 연회, 요술 행렬 등 이질적인 문화의 장면을 모두 섭렵하고 눈을 부릅뜨며 바라본다. 그리고 기록한다. 또 그는 밤마다 숙소를 몰래 빠져나와 한족 선비들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즐긴다. 비록 필담이지만 연암은 세상을 담은 가볍고도 무거운 이야기, 주자학과 불교 문제, 우주관 따위의 깊이있는 주제를 중국인들에게 당당하게 펼친다.

또 이 책에서 연암의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파다운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롭게 할 수 없는데도 삶을 도탑게 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드물다. 그리고 생활이 넉넉지 못하다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라는 연암의 말을 소개한다.

또 중국의 수레를 상세히 소개하면서 백성의 이익을 위해 조선에서도 수레를 써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중국과 조선의 말에 대한 관리를 견주면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말하는 것을 제대로 옮겨 연암의 철학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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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수레 연암이 연경에서 본 수레의 모습. 연암은 이 수레들을 조선에서 적극적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 그린비


난 처음 이름난 인문학 책을 수없이 펴낸 고미숙씨의 명성이 두려워서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읽으면서 점차 그것은 기우일 뿐임을 알 수 있었다. 맛깔스럽게 옮긴 역자들의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옮긴이들은 머릿말에서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연암의 문장은 미끄럽다, 막 잡아올린 물고기처럼 펄펄 살아있어 잡았는가 싶으면 순식간에 손아귀를 벗어난다"라고 연암의 글을 평가했다. 하지만 옮긴이들의 글솜씨가 모자랐다면 연암의 그렇듯 생생한 문장을 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맛깔스러운 토박이말로 옮기려 애쓴 점이 훌륭하다. 한문을 우리말로 옮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구나 수백년 전의 글을 현대어로 바꾸는 게 그렇게 녹록하지 않을 텐데 대단한 내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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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서산장 청 황제가 많이 머물렀던 열하의 피서산장 모습 ⓒ 그린비



다만, 이 책에도 어김없이 옥에 티는 있다. '북경도성도' 같은 그림이 누가 그렸고 어디에 소장됐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는 점이 그렇고, 18세기 중국의 문물을 접하면서 우리에겐 생소한 낱말들을 미처 다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하권의 "때마침 대추가 반쯤 익어 마을마다 대추나무로 울타리를 쳤다"라는 구절은 몇 번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몇 가지 옥에 티가 있음에도 이 책을 진가를 결코 깎아내릴 수가 없다. 앞에서 얘기한 맛깔스러운 문체 말고도 다양한 그리고 상세한 설명과 자료는 독자들을 18세기 열하 여행에 지치지 않도록 돕는다는 점과 수준높은 편집도 칭찬하고 싶다.

그동안 우리는 열하일기의 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은 현대인에게 다가올 수 있게 옮긴 책이 아직 없었다는 데 그 까닭이 있었다. 이제 고미숙씨 등이 옮긴 이 책은 그동안의 갈증을 한꺼번에 씻어내는 쾌거를 이룬 것이란 생각이 든다. 꽃보라 흩날리는 봄날을 서럽게 보내지 말고 이 책을 읽어 연암의 철학을 내 것으로 만드는 행복을 누리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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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를 옮기고 엮은 고미숙. ⓒ 김영조


인문학 책의 대가 고미숙씨와 대담을 시작하면서 먼저 대다수 인문학 책 작가들이 글을 어렵게 쓰는데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고씨는 명쾌한 대담으로 말문을 열었다.

"많은 인문학 작가들이 어렵게 써야 더 전문적이거나 깊이가 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물론 모든 대상을 독자로 붙잡아 둘 수는 없지만 작가는 독자와 소통을 고민해야 한다. 전문적인 책은 사실 전문가에게도 잘 소통이 안 된다. 옷을 잘 만들지는 몰라도 좋은 생활을 하고 있지는 못하는 일부 한복 전문가와 같은 이치 아닐까?"

- 어떤 계기로 <열하일기>를 사랑하게 되었나?
"대학 때 분과학을 넘어서 서양·중세·동양 사상을 함께 배우면서 텍스트를 통째로 만날 수 있었다. <열하일기>도 그런 방향에서 만나게 됐는데 지식의 새로운 공간이 열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연암은 내게 스승·친구·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 <열하일기>를 국역하면서 연암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연암은 작은 일도 이야기로 만드는 재주를 지닌 사람이었고, 모든 것을 하나로 녹여 날마다 기록했던 대단한 사람이다. 또 연암은 최고의 고담준론을 나누는 것은 물론 사기 치는 모리배까지 사귐을 나눌 수 있었던 열린 사람이며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더욱이 그는 앎과 삶이 하나가 됐던 지식인이고, 아는 만큼 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사랑한다."

- 연암은 비교적 조선 문화에 견주어 중국 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보는 듯했다. 특히 학자들이 온돌은 우리가 종주국이라고 하는데 연암은 중국 캉이 더 우수한 것으로 보는 듯 했다. 과연 그가 그런 생각을 했을까?
"당시 청나라는 세계 문명의 중심이었다. 조선은 그에 견주면 외부와 교역이 차단되어 어떤 면에서는 낙후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백성의 이용후생을 위해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소통할지 고민했다고 보아야 한다. 또 그는 시대적 조건에서 문화를 본 것이지 중국의 문화가 절대적 우위에 있다고 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디서나 좋은 건 없다. 그는 모든 것을 보통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고민했다."

- 이 책에서 <호질>은 연암의 작품이 아니라는 게 드러난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호질>을 왜 연암 것으로 보았을까?
"한문은 중국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이 다 같이 썼기 때문에 한문소설을 동아시아 공동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한문학은 오로지 중국 것이라는 민족적 열등감으로 논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 <호질>은 조선 소설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연암의 소설임을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지 그렇게 않았을까?"

- 우리가 연암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종요로운 것은 무엇일까?
"연암은 낯설고 말도 통하지 않는 어느 곳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삶의 공간을 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몸 건강하고 마음이 열려 자유 공간을 만들어 낸 다음 그 공간을 꽉 채우는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시대에 어쩌면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 또 다른 책을 내는가?
"영화에 관한 책을 탈고했으니 곧 선을 보일 것이다. 지금 노신을 공부하고 있으며, 근대 이후 우리 겨레에게 다산을 맹목적 우상으로 만들어 주었던 '다산학'에 대한 비판서를 쓸 계획이다. 다산의 지혜가 뭔지 제대로 알아야 한국학의 중요한 지점인 다산을 제대로 만날 수 있다."

고미숙씨는 모든 게 명쾌했다. 모든 질문에 한 마디 주저함 없이 생각을 털어놓았다. 내가 잘못 그에게 가졌던 선입관처럼 어려운 얘기도 하지 않았고, 그저 소탈한 얘기뿐이었다. 대담을 하고 오면서 나는 한편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 상 - 개정신판

박지원 지음, 길진숙.고미숙.김풍기 옮김,
북드라망, 2013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 #그린비 #고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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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으로 우리문화를 쉽고 재미있게 알리는 글쓰기와 강연을 한다. 전 참교육학부모회 서울동북부지회장, 한겨레신문독자주주모임 서울공동대표, 서울동대문중랑시민회의 공동대표를 지냈다. 전통한복을 올바로 계승한 소량, 고품격의 생활한복을 생산판매하는 '솔아솔아푸르른솔아'의 대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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