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이, 죄송합니다

올해도 카네이션 달아 드리지 못합니다

등록 2008.05.08 10:23수정 2008.05.08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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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습니다. 정선의 밤은 아직 차기만 합니다. 기온이 얼마나 떨어지던지 새벽 장터에 나가기 위해 준비하던 '어머이'(어머니의 정선 사투리)가 손이 '시렵다'고 했습니다.

 

새벽 5시 20분, 어머이가 정선 장터에 나가기 위해 아들을 깨운 시간입니다. 이른 시간이지요. 장터에 나간다 한들 아무도 없는 그런 시간이지요. 시계를 보고 한숨이 나왔지만 손이 시렵다는 어머이의 말을 듣고 더이상 누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간 마당으로 나가니 새벽 하늘은 청명합니다. 춥기도 하고요. 겨울에 입던 옷을 챙겨입고 나흘 동안 어머이가 마련한 것들을 차에 실었습니다. 어제 오후에 뜯은 곰취나물도 있고 곤드레 나물도 있습니다. 어제 온 밭을 다니시면서 캔 민들레도 있습니다. 나흘 동안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깐 더덕도 싣습니다.

 

"정선 오는 사람들은 싸게만 살려고 해."

 

어머이가 늘 하시는 말입니다. 그동안 더덕을 까느라 어머이의 손가락은 상처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더덕이 비싸다고만 말한답니다. 그럴 땐 아들이 거듭니다.

 

"직접 까서 먹어 보라지. 더덕 까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장터에서 어머이가 파는 더덕은 인기가 좋습니다. 많이 주기도 하지만 손질을 잘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집에 가져 가서 먹기만 하게 만들어 놓은 그 공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어머이는 그게 속이 상하는 것이지요.

 

오늘 새벽은 날이 춥다 보니 안개도 없습니다. 새벽 시간 어머이 난전을 펼쳐주고 돌아온 아들은 또다시 잠을 잡니다. 전날 자정을 넘겨 잠든 탓입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잠을 오래 잘 수도 없습니다. 아침 시간 이래저래 전화가 빗발칩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아직 더덕을 캐고 있습니다. 날짜를 짚어보니 일주일 넘게 더덕을 캐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에 더덕 캐는 기사를 올렸더니 그간 도시에서 더덕을 사러 온 이도 몇 됩니다. 

 

고요한 정선도 요즘은 바빠집니다. 농부들은 밭을 갈고 나처럼 세상을 꼬나보는 사람은 그 나름대로 바쁩니다. 저녁엔 정선 지역의 생각 있는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정선민중연대와 정선문화연대, 동강살리기운동본부 등이 참여하는 회의입니다.

 

회의 안건은 대운하와 광우병입니다. GMO도 있지만 뒷전에 밀렸습니다. 어느 정부건 간에 할 일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평택미군기지 등으로 사람을 못살게 굴더니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출범 시작과 함께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할 일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전혀 고맙지 않습니다.

 

촌 사람들 편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대한민국입니다. 긴 겨울 나자 짧은 봄도 그나마 가고 있습니다. 바쁘기만 한 정선 사람들도 미친소 때문에 촛불 문화제를 준비해야 하고 대운하 반대 목소리도 내야 합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은 절대 아니지요. 대한민국 국민이면 모두가 나서야 할 일 아니던가요?

 

회의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어머이께서 주무십니다. 장터에서 하루 종일 보낸 어머이지만 아들이 왔다며 일어나시는데 힘들어하십니다. 장터에 나갔던 어머이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저녁 참에 읍내에 나가면서 내일이 어버이날인데, 라는 생각으로 카네이션 한 송이 준비하려고 했었는데 미친소와 대운하 때문에 잊었습니다.

 

할 말 없습니다. 불효자가 따로 없습니다. 3남 1녀 중 남자 형제 막내로 태어난 아들이 어머이와 함께 살면서 아들 노릇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글 쓴다고 떠들어 댔지만 세상을 뒤집는 글도 쓰지 못한 못난 아들입니다. 어버이날인데 전화 걸어주는 자식도 없는 밤입니다. 

 

옛날 같으면 아들 나이에도 카네이션 달고 거리를 활보했는데, 세상은 젊어져만 가서 그런 일도 우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며느리 복도 지지리 없는 어머이. 아들 못나서 헤어진 며느리를 기억하고 있는 것조차 서러운 밤입니다.

 

산촌의 밤이 깊었습니다. 모든 것이 고요한 밤입니다. 먹고살 길 걱정하지 않고 세상 일에 나서는 아들이 어머이는 미덥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마흔은 넘은 나이에 뭐가 무섭다고 세상 일을 두려워한답니까.

 

할 일이 많습니다. 지천으로 널린 산나물도 뜯어 어머이 장터 밑천으로 드려야 하고, 미친소도 막아야 하고, GMO 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대운하도 막아야 하고, 밭에 깔린 풀도 뽑아야 합니다. 할 일은 태산 같지만 생각해보니 돈벌이용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니 어머이께서 아들의 삶을 싫어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어쩌겠는지요. 아직은 피가 뜨겁게 끓고 있는 걸요. 어느 날이고 이 피 뜨겁게 끓어 활화산처럼 터지는 날 있지 않겠는지요. 그 화산 터지면 휴화산 되겠지요. 그런 세상 오길 기다려야 하는 게 요즘을 살아가는 이들의 운명이기도 하지요.

 

내일이 어버이날인데 어머이 카네이션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실은 작년에도 그랬습니다. 이 시기만 되면 이상하게 바빴습니다. 그래도 작년엔 마당가에 핀 민들레꽃을 가슴에 달아 드렸는데 올해는 그마저도 할 수 없을 듯싶습니다. 아들이 바쁜 탓입니다.

 

어머이, 죄송합니다. 미친소와 대운하가 어머이와 아들이 함께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미친소 때문에 촛불을 들고, 대운하 반대를 위해 하염없이 걷고 있는데, 어른이 되어서 구들장 지고 살아서는 안 되겠지요.

 

내일도 바쁩니다. 어버이날 어머이 혼자 계시게 한 점, 어머이께서도 언젠가는 이해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치는 요즘입니다. 죄송합니다. 어머이….

2008.05.08 10:23 ⓒ 2008 OhmyNews
#대운하반대 #정선군 #정선아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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