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팩션 60] 임시정부에 지펴지는 이념의 연기

김갑수 역사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5.16 19:37수정 2008.05.1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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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 제국주의 소련의 탄생

3일 동안 신규식의 집에서 숙식하며 지낸 민제호 일행은 신규식에게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한 소련에 관한 사항이었다.

"소련의 사회주의 혁명이란 제국주의 경쟁에서 세력이 밀린 러시아가 자구책을 강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제국주의 경쟁에서 러시아가 뒤진 것에는 내외적으로 여러 요인이 복합되어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1차대전을 계기로 러시아는 2류 국가로 전락했다는 점입니다. 1917년 러시아의 2월혁명은 이에 대한 반발로 성사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새로운 방법으로 제국주의 경쟁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럼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란 것도 제국주의의 다른 방편이란 것이오?"

"최소한 대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미국처럼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약간 차이가 있는 나라입니다. 유럽인들이 말하는 현대화의 개념으로 볼 때, 미국은 유럽의 모든 국가보다 앞서 있습니다. 역사가 짧고 전통문화가 없다시피 하니, 새로운 것을 효율적으로 받아들여 발전시킬 수가 있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이 유럽 국가들과 약간의 차이가 있는 반면 러시아는 역사도 유구할 뿐더러 다양하고 깊이 있는 전통 문화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과 다소의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유로 러시아는 현대화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대화에 발목을 잡는 수구 세력이 러시아에는 엄존했던 것입니다. 이제 소련은 그런 세력을 부정하고 시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이용하여 대내외적인 투쟁을 전개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는 능률적으로 체계가 잡힌 제국주의 강국을 새로이 만난 셈이 됩니다. 다시는 소련이 러일전쟁의 패배와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소련은 미국과 대항하는 외교 정책을 구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1920년 여름에 카스피해 유전 송유관의 기점인 아제르바이젠 바쿠에서 중동 피압박민족대회를 주선했다. 이어 그들은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중동민족근로자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약소민족을 동정하고 원조할 나라는 소련밖에 없다는 인식을 심어 주려고 기획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임시정부에 감돌기 시작하는 이념 대립

그러나 여운형은 김규식을 데리고 신한청년당의 대표 자격으로 이 대회에 참석했다. 여운형의 대회 참석에는 임시정부의 반대가 있었지만 그는 참석을 강행한 것이었다.

민제호는 여운형과 이동휘를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을 했다. 그는 신규식의 평소 당부대로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문제 제기는 날카롭고 신랄했다.

"어떠한 경우든 외국 정부에게 돈을 받는 것은 매국 행위나 진배없는 결과를 치르게 됩니다. 미국에 의존하는 외교 정책이 교착 상태에 있다고 해도 소련의 돈을 받는 것은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간 고종의 행태나 같은 것입니다. 제국주의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단 한 번이라도 선의로 타인을 도운 적이 있습니까? 미국의 알렌을 보십시오. 그가 고종을 꼬드겨 얻어낸 운산 금광에서 지금까지 실현한 이득금은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서 쓴 자금의 100배가 넘습니다. 소련이 한국에 왜 돈을 주겠습니까? 만약 지금 어렵다고 제국주의의 돈을 받는다면 한국은 장차 혹독하고도 무서운 대가를 소련에게 치르게 될 것입니다."

신규식은 돈의 속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상해에 온 초기, 중국 혁명의 핵심 인사인 진기미와 송교인 등이 창립한 <민권보>에 쌀 5000가마에 달하는 거액을 기부한 뜻을 민제호는 잘 알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찍부터 사회주의 성향을 지녔던 이동휘와 함께 소련의 자금 지원을 받아 활동의 영역을 넓히면서 임시정부의 개조를 주장했다. 그들은 대외 관계를 미국 중심에서 소련 중심으로 전환하자고 하면서 이를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제 임시정부에도 이념 대립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규식은 민제호의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이제 한국을 본격적으로 이용할 제국주의 국가는 소련입니다. 당분간 소련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일본 편을 들 것입니다. 이미 일본과 미국은 더 이상 우방 관계가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열강 중에서 가장 왔다갔다가 심한 나라였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독립군이 러시아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결론인데..."

얼굴이 어두워진 것은 신규식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쫓기는 광복군이 마땅히 갈 곳은 없었다.

청산리 전투 전에 김좌진과 이범석을 만나고 온 백주원이 말했다.

"오죽했으면 그들이 러시아 령을 택했겠습니까?"

김태수는 슬픈 표정으로 백주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민필호는 독립군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깝고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그러기에 말입니다"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데 민제호는 약간 다른 관점의 말을 했다.

"독립군이 러시아 령을 택한 것은 물론 지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독립군 내에 친소파의 영향력이 미친 것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민족보다는 이념이 우선입니다. 말하자면 북로도둑부 독립군이 거기에 속한다고 저는 봅니다."
"홍범도 장군 말인가?"

민제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름을 직접 말하며 한국 독립운동가끼리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신규식의 평소 당부 때문이었다.

"그래도 서 일, 김좌진, 이범석은 그곳에 안 갔으면 하는데."
"물론입니다. 사회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이제 소련에서 위험합니다."
"아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군."

신규식은 함께 연구해 보자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민필호에게 물었다.

"광동정부 예방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아직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자네도 수행할 준비를 해야 하네."
"제가요?"

"그럼. 자네도 이제 중견 독립 운동가가 되어 있다네. 그리고 상해에서 자네 중국어 회화 실력이 최고라는 평이 있어. 물론 중국인은 빼고."

민필호는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 비하여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겸손한 청년이었다. 그의 겸손은 그를 성실하고 실력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고 있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생각이 차츰 깊어지고 도량이 넓어지는 대기만성형의 인격을 갖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독립운동가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독립운동가들의 매혹적인 삶과 사랑을 이야기함으로써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소설입니다.
#여운형 #홍범도 # 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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