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고 닳도록 쓴 게 명품이라고?

[서평] 60개의 생활명품과 우리 삶의 아름다움 <윤광준의 생활명품>

등록 2008.06.02 10:42수정 2008.06.02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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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활명품중 하나-감자칼 ⓒ 김현자


<윤광준의 생활명품>(을유문화사 펴냄)이란 책을 통해 저자 윤광준이 선정한 생활명품들을 만나며 떠올린 것은 엉뚱하게도(?) '감자칼'이다. 5년 전에 천 냥 백화점에서 1000원 주고 산 당근 모양의 이 감자칼은 지금도 내겐 썩 유용한 물건이다.

과도로 껍질을 벗기다가 '슥슥~' 왔다갔다 몇 번으로 감자 한 바가지를 쉽게 깔 수 있는 이 감자칼은 쓰임새가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쓰려고 보니 없었다.


길들여진 편리를 어떻게 잊으랴. 3천 몇 백 원을 주고 다시 사게 됐다. 슈퍼에서 파는 감자칼 중 가장 비싼 것을 선택했다. 유명 주방회사의 것이고 스테인리스 재질이 훨씬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 감자칼은 이전 것보다 훨씬 불편했다. 왠지 뻑뻑한 것이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큰 문제는 껍질이 훨씬 두껍게 벗겨진다는 것. 눈으로 볼 때와 직접 쓸 때의 차이가 컸다.

"따뜻한 차 한 잔에 얼마나 큰 행복이 담길 수 있는지 알려준 것도 미로였다. 누군가 약간의 수고를 자처하면 모두의 즐거움은 몇 배나 커지는 것이다. 20년 넘게 사용했던 미로를 최근 몽골여행 도중 도둑맞았다. 배낭에 넣어둔 현금과 귀중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시간과 사연이 담긴 미로와의 인연은 어떻게 하랴. 세상엔 대치되지 못하는 가치가 너무 많다. 미로 주전자는 "애, 쟤"로 인격을 부여해 부를 만큼 좋아했던 물건이다. 떠나가야 새삼 확인되는 사랑의 농도는 사람의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 군용제품 수집상에서 구입 가능한 미로(MIRRO) 주전자 이야기 중에서

'떠나가야 새삼 확인되는 사랑의 농도'란 부분을 읽으며 '나만의 명품'이라고 해도 좋을 감자칼이 떠올랐다. 남들이야 "그까짓 감자칼 하나 가지고"라며 하찮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게는 이후 다른 생활용품들을 고를 때 염두에 둘 만큼 중요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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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중 하나-미로 주전자 ⓒ 윤광준


저자가 몽골여행 중 낡은 미로주전자를 잃어 버렸을 때의 섭섭함이 내게도 있었다. 당연한 줄 알고 쓰던 것이 막상 없어졌을 때의 그 답답함이라니! 새 것을 산 지 며칠 지나 대청소 중 싱크대 모퉁이에서 나타난 감자칼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돈을 세 배나 더 주고 산 유명 회사의 제품이 어떻게 더 불편할 수 있어?'

결국 어느 날 '1천원:3천 몇 백 원', '무명: 유명'을 비교해 보았다. 비슷한 크기의 감자도 번갈아 깎아보고, 껍질이 미끄러운 사과도 깎아보았다(당시 초등학교 3년생인 딸이 내가 없을 때 사과를 깎아 먹는 용도로 썩 즐기던 거라).

둘을 나란히 놓고 보니 차이가 확실했다. 스테인리스의 질이 더 좋아 보이는 유명회사의 제품은 언뜻 훨씬 잘 깎일 것 같지만 날의 각도가 더 급하고 날카로워 감자의 속살 깊이 파고 들어가 껍질을 두껍게 깎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력의 이 감자칼은 남이 몰라줘도 내게는 명품 중에 명품이다. <윤광준의 생활명품>의 저자 윤광준이 말하는 그 생활명품인 것이다.

<윤광준의 생활명품>은 60가지 명품 이야기다. 사진작가이자 오디오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유용하게 쓰고 있는 물건들이 주인공이다. 저자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모를 그 물건만의 장점과 가치, 숨은 이야기 등을 생활 속의 소소한 일화와 함께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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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겉그림 ⓒ 을유문화사


저자가 '생활명품'이라고 찜한 것, 좋은 줄 미처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잘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려 아쉬움과 섭섭함을 느끼는 물건들, 저자의 삶을 건강하고 빛나게 하는 '남다른 물건들'은 어떤 것들일까?

수첩, 연필, 만년필, 등산화, 돋보기, 칼, 헬멧, 삼각대, 의자, 3M 포스트잇·홀더, 버너, 면도기, 손톱깎이, 이불, 유리잔, 와인따개, 자, 가위, 전기장판, 벽시계, 타이머, 온습도계, 종이, 오렌지, 막걸리, 골뱅이, 호두과자 등이다.

우리들이 흔히 명품이라 말하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등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들이 명품인 이유가 있다. 

수첩이라고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저자가 수많은 수첩 중 명품이라고 선택한 '몰스킨 수첩'은 '온갖 약은 수를 써 봐도 전원이 끊기면 무용지물로 변하는 최첨단 디지털 기계들을 웃도는 쓰임새가 있다.

'신발이 좋으면 목숨도 건진다'라고 표현한 트렉스타 등산화는 어떤가. "턱없이 비싼 등산화에 비해 가격은 저렴하고 땀으로 찌든 깔창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이내 뽀송뽀송한 감촉으로" 바뀌거니와 엄홍길(등반가)씨가 해발 8000m 이상의 고봉을 등산할 때 신었을 만큼 품질이 입증되었기 때문. 저자는 이 등산화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도 있단다.

'단돈 1000원으로 누리는 행복'의 장수 막걸리(서울 막걸리로도 알려져 있다)는 밥 먹기 싫은 날의 요깃거리. '세상에서 가장 아픈 음식'이라 표현한 을지로 골뱅이, 20년째 찾고 있다는 을지로 2가 영락 골뱅이 무침에 대한 찬사는 미식가가 아닌 내게도 지독한 유혹이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60가지는 명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새로 생각하게 한다. 자주 쓰고 있지만 진지하게 바라본 적이 없는 물건들, 없으면 생활이 불편해지는 물건들을 다시 바라보게 한달까? 저자 윤광준이 말하는 명품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물건은 살기 위해 필요한 만큼이면 족하다. 명품보단 명품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 명품 인간은 입고 먹고 쓰는 물건을 모두 명품으로 만든다.… 소유의 쾌감보다 중요한 점은 물건의 존재감에 어울리는 의식의 환기다. 비싼 값을 주고 힘들게 구한 명품이라 자랑만 하는 것은 천박한 행동이다.… 원조의 가치를 진심으로 인정해주는 마음이 명품을 만든다.… 좋은 상품은 좋은 사람의 철학을 담고 있다.… 물건은 자신을 위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곁들일 때 비로소 살아난다.…당신의 취향과 가치관에 따라 선택된 바로 그 물건이 생활명품이다."
- 책 속에서 부분부분 발췌

<윤광준의 생활명품>이 재미있는 이유 또 하나, 저자 자신에게 명품인 이유만이 아니라 그 물건에 깃들어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박하게 담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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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둘-몰스킨 수첩 ⓒ 윤광준

가난한 고흐마저 애용했으며 톨스토이가 <해는 또 다시 떠오른다>를 썼다는 몰스킨 수첩, 필기구 수집가인 단테 베키오와 루이지 폴리가 디지털 시대에 만든 비스콘티사의 만년필 고흐 시리즈, BC 4천년 경에 만들어 쓴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섬유인 쐐기풀 직물, 일제강점기에 천안역 부근에서 제빵 기술자였던 남편과 구워 팔기 시작한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 학화 할머니 호두과자 등 각 물건에 숨어 있는 일화도 재미있다.

트렉스타 신발칼럼, 사용자가 직접 말한다, 테벤 콘센트 타이머 작동방법,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패션철학, 새콤달콤 한국 오렌지 4형제, 카페 뮤제오가 전하는 비알레띠-커피포트의 원리, 쓰리세븐 777 VS 보잉 777, 슬픔을 마시고 사랑에 취하고-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등과 같은 별도 페이지 이야기들 또한 책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면?

"명품은 상표가 아닌, '닳고 닳도록'의 절실한 쓰임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을 읽은 나, 저자 덕분에 이와 같은 멋진 말 하나 만들어 보았다. 이제까지 알고 있던 명품을 고쳐 생각하고 내 삶의 '어쩐지 끌리는, 그래서 집착하는 물건들'을 처음으로 진진하게 바라보게 하는 말이다. 궁색하여 이렇다 할 유명한 메이커 물건 하나 가지지 못한 내가 스스로 폼 내고 어깨 펴고 좀 더 즐겁게 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또한, '쩨(-제)'라면 끔벅 죽을 만큼 좋아하여 "짝퉁이라도 좋다!"는 친구에게 "명품이 뭐 별거 있어? 내게 꼭 필요한 것들이 명품이지. 아무리 유명한 명품이래도 내게 맞지 않는다면 상표에 불과한 거야. 그러게, 난 명품 짝퉁도 싫다고!"란 말도 함께 꼭 해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윤광준의 생활명품>(윤광준/을유문화사/2008년 5월 20일/12,000)
사진가이자 오디오칼럼니스트인 저자의 또 다른 책으로 <소리의 황홀>, <잘 찍은 사진 한 장>,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내 인생의 친구>,<찰칵, 짜릿한 순간>이 있다.


덧붙이는 글 <윤광준의 생활명품>(윤광준/을유문화사/2008년 5월 20일/12,000)
사진가이자 오디오칼럼니스트인 저자의 또 다른 책으로 <소리의 황홀>, <잘 찍은 사진 한 장>, <윤광준의 아름다운 디카 세상>, <내 인생의 친구>,<찰칵, 짜릿한 순간>이 있다.

윤광준의 생활명품

윤광준 글 사진,
을유문화사, 2008


#명품 #윤광준 #생활명품 #을유문화사 #인문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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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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