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역사팩션 제1편 마지막 회]] 내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소

김갑수 역사소설 <제국과 인간> '상해의 영혼들' 편

등록 2008.06.09 09:05수정 2008.06.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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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후 김태수는 낙타 위에서 몽골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울란바트로까지는 1200리의 여정이라고 했다. 낙타는 타박타박 걸었다. 김태수는 수통의 물을 마시며 여유작작하게 낙타를 몰았다. 저녁이 되자 백주원의 얼굴이 먼저 떠오른 다음 달이 따라 올랐다. 그는 3일 낮밤을 부지런히 움직인 끝에 울란바트로 인근에 닿았다.

그는 평원의 나무 밑에서 하룻밤 야영하기로 했다. 단소가 고달픈 밤의 친구가 되어 주었다. 단소 소리는 제향처럼 피어올랐다. 그는 신규식을 단소로 불러냈다. 다음으로는 민제호와 민필호를 등장시켰다. 결국 그는 백주원을 데려다 자기 앞에 앉혔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귀신처럼 단소를 불었다.

김태수는 다음 날에도 기차를 타지 못했다. 그는 역 가까이에 갔다가 일본군 부대와 마주쳤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나자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었다. 그들이 기차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일본 군인 하나가 김태수 쪽으로 막 오고 있었다. 그는 못 본 체하고 서둘러 도망쳤다. 낙타 등에서 휴대품 몇 개가 떨어지는 것 같았지만 그는 마음 쓰지 않고 내달렸다.

다음 날 김태수는 고비사막의 모래 바람을 맞고 있었다. 길은 멀었고 낮은 뜨거웠다. 그는 낮과 밤의 무서운 일교차에 적응하지 못했다. 닷새째 물이 떨어졌고, 신기루가 나타난 것은 엿새째였다. 그리고 한 번 본 신기루는 무시로 출몰하고 있었다.

그 날 밤 그는 길을 잃었다. 그는 나침반을 울란바트로 역전에서 떨어뜨렸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았다. 엄청나게 큰 달이 지평선에 걸려 있었다. 백주원은 달 속에서 웃고 있었고, 김태수는 모래 위에서 지쳐 있었다. 그는 몸을 가누기가 버거웠다. 그는 더 이상 몸을 움직일 의욕마저 잃어버렸다.

한참 후 모래에 얼굴을 묻고 있는 김태수를 낙타가 무연히 보고 있었다. 김태수는 의식의 가닥을 놓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보았다. 그는 백주원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녀를 시각으로 떠올리는 일밖에 없다고 마음먹었다.

늠름하게 활시위를 당기던 백주원, 황강의 안장에 석화처럼 오르던 백주원, 펑라이 암자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던 백주원, 린하이 해변에서 눈물을 씻어주던 백주원, 백주원의 검은 하이힐과 선글라스, 옥빛 두건, 눈동자, 입술, 이마, 귀 들이 두서없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날 생각하시는 거지요?”

그녀의 속삭임이 들렸다.

“그런 것은 변하는 게 아니오.”

그는 고개를 쳐들며 응답했다.

수레바퀴 같은 달이 샛노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자 달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이 김태수의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선녀라도 된다는 듯이 팔을 휘저으며 나타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다시 백주원이었다.

백주원은 김태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녀의 입이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김태수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쑤욱대 머리.”

김태수는 팔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구우신 형용.”

어느덧 김태수는 백주원 앞에 단좌해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북채를 놀리고 있었다. 백주원은 쑥대머리를 서늘하게 불렀고, 신명난 김태수는 건드러지는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어엇쑤!"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김태수의 가랑이에서 소고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장고 가죽을 손바닥으로 감촉하고 있었다. 그것은 실제 촉감이나 진배없었다.

“손가락에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하고.”
“잘헌다!”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 볼까.”

그것이 오래 갈 리는 없었다. 이윽고 백주원의 모습이 아스라해지며 그녀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달은 높이 떠올라 있었다. 주인을 놓고 가 버린 낙타는 화급히 이곳저곳을 물색하며 다니고 있었다.

김태수는 엎드린 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랑, 빛나던 이름이었다. 그에게는 아련히 남은 상처가 있었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그것에 그는 더운 가슴도 아름다운 몸뚱이도 내일 없이 소모해 버렸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남지 않았고 그의 마음에는 온기가 남지 않았다. 가진 것을 모두 허비해 버렸으므로 그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죽었소.”

그는 눈물과 온기 대신 말을 토하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살도 피도 영혼도 남지 않았다고.

신규식과 김태수는 그렇게 세상과 작별했다.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닮은 점이 있었다. 그들은 평생 삶의 신조 같은 것을 두지 않았다. 이데올로기는커녕 지조 같은 것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이 가진 거라고는 단지 영혼뿐이었다.

얼마 후 상해의 민필호는 김태수가 남기고 간 봉투를 뜯었다. 봉투에는 자신의 재산을 민제호와 백주원에게 양도한다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민제호는 9년 후 지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심장병이 있던 백주원은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임시정부를 잠시 떠났던 민필호는 다시 돌아와 김구 주석의 판공실장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는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며 살림을 이끌어 나갔다.

신규식과 김태수가 죽은 해, 민필호는 신규식의 딸 신명호 사이에서 딸을 낳았다. 그 딸은 먼 훗날 중경의 독립군 지대에서 김준엽이라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김준엽은 청년 시절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국이 해방되자 학자와 교육자로 활약하며 아내 민영주와 함께 21세기까지 살았다. 

덧붙이는 글 | 제1편 '상해의 영혼들' 편이 오늘 69회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 회부터는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가 이어집니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제1편 '상해의 영혼들' 편이 오늘 69회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 회부터는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가 이어집니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쑥대머리 #율란바트로 #김준엽 #민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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