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를 삶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라에서

[책읽기가 즐겁다 189] 박인하 <꺼벙이로 웃다, 순악질 여사로 살다>(길창덕 비평)

등록 2008.06.23 14:52수정 2008.06.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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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꺼벙이로 웃다, 순악질 여사로 살다

- 글 : 박인하

- 펴낸곳 : 하늘아래(2002.12.2.)

- 책값 : 12000원

 

(1) 만화와 우리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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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만화를 비평한 책이 드물고, 개별 만화가를 비평한 책은 더 드뭅니다. 길창덕 님을 다룬 이 책은 우리 만화 발자취에서 무척 소중한 책 하나입니다. ⓒ 하늘아래

▲ 겉그림 만화를 비평한 책이 드물고, 개별 만화가를 비평한 책은 더 드뭅니다. 길창덕 님을 다룬 이 책은 우리 만화 발자취에서 무척 소중한 책 하나입니다. ⓒ 하늘아래

만화를 즐기는 사람은 많은 우리 나라이지만, 만화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좀처럼 많지 않았고, 만화를 이야기하는 책도 몇 가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화를 이야기하는 일은 '평론' 대접을 못 받기도 했지만, 만화라는 갈래가 '만화 문화'나 '만화 예술'이나 '만화 삶'으로 우리 사회에 찬찬히 받아들여지지 못한 탓이 조금 더 크지 않으랴 싶습니다.

 

더구나 '만화=나쁜 볼거리'라는 생각이 어느 때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퍼지기도 했습니다. 만화를 그리는 어른은 그리는 사람대로 손가락질과 푸대접을 받는 데에다가 정보·수사 기관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만화를 즐기는 사람(어른 아이 모두)들 또한, 덜 떨어진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에다가 공부는 안 하고 딴 짓이나 한다는 핀잔에다가, 교육에 나쁘다는 엉터리 같은 화살을 맞으면서 고달파야 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만화는 만화라는 고유한 이름을 못 쓰면서 '명랑만화'가 되고, '학습만화'로 갈라지고, '성인만화' 딱지를 받기도 합니다.

 

... 그러나 성인 만화는 1950년, 한국전쟁 이후 5·16쿠데타와 군사정부에 의한 검열로 인해 채 꽃망울도 맺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되었다. 이 야만적인 검열 행위는 대중적 전파력이 뛰어난 만화를 '아동용'이라는 족쇄에 옭아매어 이 땅에서의 만화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 그의 부푼 기대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쳤다. 길창덕을 가장 괴롭힌 것은 대중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신문 만화에 대한 권력의 감시와 탄압이었다. 조금만 비판적인 만화가 나오면 정보 기관(당시는 중앙정보부였다)에서 전화가 오는가 하면, 때로는 임의 동행 형식으로 불려가기도 했다 ..  (94, 109쪽)

 

우리 사회는 예나 이제나 민주주의 나라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자유가 없고 평등이 없으며 평화와 통일은 꿈 같은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빈부차별은 버젓이 일어날 뿐더러, 학교와 집에서도 차별을 가르치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일찍부터 경쟁과 따돌림을 몸에 익히도록 가르칩니다. 동무들과 살가운 벗이 되도록 하려는 집안이 없기에, 아이들이 골목이나 고샅에 나와도 함께 뛰놀며 어깨동무를 할 수 없습니다. 놀 시간이 없는 아이들한테는 동무나 이웃을 돌아볼 마음마저 없어집니다.

 

학교라고 해서 다른 수를 내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지금 우리네 학교에서 아이들을 맡아 가르치는 분들부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 '놀이를 가까이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요. 교과서와 문제집을 붙들고 시험점수와 학과점수 높이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인 분들이 아니었나요.

 

교과서 진도에서 홀가분하지 못하는 가운데, 아이들하고 함께 읽을 책을 스스로 찾아서 읽은 교사가 몇 분이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를 꿈꾸면서 어릴 적부터 어린이책을 꾸준히 찾아 읽으며 마음을 닦은 교사가, 중고등학교 교사를 꿈꾸면서 어릴 적부터 청소년 책을 줄기차게 찾아 읽으며 얼과 넋을 다스린 교사가 몇 분이나 될는지요.

 

오늘날 교사들은 자기가 맡아 가르치는 아이들 삶과 마음을 굽어살피지 못할 뿐더러 아이들이 즐겨 뛰놀 틈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느긋하게 뛰어놀도록 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머리통만 무겁게 합니다. 책과 땀이 고루 어우러질 수 있도록 이끌지 못합니다.

 

... 결국 원고가 누더기가 될 때까지 매달리는 길창덕의 작가정신과 빨리 책 한 권을 뽑아야 하는 단행본 만화의 생리는 도저히 일치할 수 없었다. 결국 길창덕은 1967년도를 끝으로 더 이상 단행본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  (69쪽)

 

집에서 뛰놀지 못하는 아이들이 학교에서라도 뛰놀면 좋으련만, 집에서 뛰놀지 못하는 터전인 사회에서는 학교에서도 뛰놀지 못하리라 봅니다. 부모들 일터가 집하고 거리가 먼 곳에서 오로지 돈버는 데에만 치우쳐 있을 뿐, 이웃과 어울리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벌고 함께 나누는 쪽으로는 가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서로서로 어울리면서 함께 땀흘려 일하고 함께 보람을 거두는 곳이 될 때에는 부모들 일터는 집하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부모들 일터와 가까운 데에서 서로서로 동무를 사귀면서 함께 뛰놀 수 있습니다.

 

... 간단한 선으로 이루어진 캐릭터들은 '간단'하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독자들에게 동질성을 선사한다. 근육질로 멋진 캐릭터들은 배가 나온 평범한 우리들과 동질성을 공유하기 힘들다. 하지만 3등신의 명랑만화의 캐릭터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116쪽)

 

이와 같은 우리 사회에서 만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만화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만화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삶으로 파고들 수 있을는지요.

 

(2) 길창덕님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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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창덕 님 만화책 나중에 재판을 찍은 '기린원' 판 <꺼벙이> 2권. ⓒ 최종규

▲ 길창덕 님 만화책 나중에 재판을 찍은 '기린원' 판 <꺼벙이> 2권. ⓒ 최종규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불 빨래를 합니다. 요사이 장마철이라고는 하지만, 웬걸 비가 아닌 햇볕만 쨍쨍이기에, 겨우내 묵혀 두었던 빨래감을 꺼내어 날마다 한 채씩 빱니다.

 

여느 빨래와 달리 이불 빨래는 힘들고 고단합니다. 이불을 다 빨고 나면 팔힘이 쪼르르 빠집니다. 그렇지만, 후들거리는 팔로 빨래줄에 이불을 척 걸쳐놓고 아랫단 물을 쪽쪽 짜 준 뒤 햇볕에 자글자글 말라 가는 모습을 보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 더없이 개운합니다. 힘이 들어도 이 맛으로 이불을 손으로 빤다고, 나중에 아이하고 이불을 함께 빨면 이 느낌과 맛을 살며시 물려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빨래를 해 주는 기계를 썼다면, 팔힘은 거의 안 듭니다. 꾹꾹 눌러서 짜 주기도 하니, 물짜기 걱정도 없습니다. 널어 놓을 자리로 옮기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빨래기계를 쓰면 이불 한 채를 빨 때 물이 얼마나 드는가를 모릅니다.

 

이불을 빨면서 어디가 더러워져 있는지, 얼마만큼 깨끗해지고 있는지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손빨래를 하면 씻는 방에서 이불을 헹구며 나오는 물로 바닥과 벽도 닦을 수 있으나, 빨래기계를 쓰면서 바닥 청소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팔다리를 부지런히 놀려야 하니 얼마나 큰 운동이 되는지요.

 

시간? 빨래기계를 돌리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기계를 돌리는 만큼 써야 하는 전기값은 따로 일해서 벌어야 하고, 빨래기계 값은 누가 거저로 주지 않습니다. 손빨래는 몸뚱이와 비누 한 장이면 넉넉합니다. 돈도 품도 운동도, 또 삶도 가꾸어 줍니다.

 

... "한번은 운전면허를 따러 자동차 교습소에 가려고 버스를 탔는데, 차장 아가씨가 나에게 아는 체를 하는 거예요. 혹시 만화 꺼벙이를 그리시는 분이 아니냐고. 그렇다고 했더니 그 차장 아가씨가 너무 반가워하더군요. 목적지에 다 와서 내리려고 하는데 그 차장 아가씨가 뭔가를 내 손바닥에 쥐어 주는 거예요. 엉겁결에 받아쥐고 버스에서 내려 손을 펴 보니 토큰 하나가 들려 있어요. 반가운 마음에 뭔가를 주고 싶은데, 줄 게 없으니까 토큰을 되돌려준 거지요. 이게 얼마나 값진 선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격한 의미에서 말하면, 장물이었겠지만, 참 이상하게도 보건소나, 동사무소, 시장 골목 같은 삶의 구비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나를 항상 기억해 주었어요." ...  (길창덕 님 말/26쪽)

 

책꽂이에서 길창덕님 만화 몇 가지를 꺼내어 들춥니다. 만화 이야기를 쓰는 박인하님 책 <꺼벙이로 웃다, 순악질 여사로 살다>에 사이사이 나오는 대목을 살펴봅니다. 길창덕님은 당신이 살아가는 모습과 당신 이웃 삶을 넘겨다본 모습을 만화에 담았습니다. 1960년대 만화에는 1960년대 삶이 묻어납니다. 1970년대 만화에는 1970년대 삶이 담깁니다. 1980년대 만화에는 1980년대 삶이 펼쳐집니다.

 

지난날 도시(서울) 골목길이 어떠한지, 골목집들 살림이 어떠한지, 마당이며 골목이며 부엌이며 마루며 방이며 어떠한지 찬찬히 드러납니다. 아이들 놀이가 만화에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어른들 매무새가 만화에 하나하나 보여집니다. 어머니가 앞치마를 두르고 무릎걸음으로 마루를 걸레로 훔치는 모습 옆으로는 담배를 입에 물고 텔레비전을 켠 채 신문을 보는 아버지가 나옵니다.

 

그때는 이런 삶이었습니다. 이런 삶이 남김없이 만화에 담겼습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삶터에서 자기 깜냥껏, 주제껏, 재주껏, 마음껏 꿈을 꾸면서 생각을 키우고 사람을 만나며 놀이를 즐기고 어수룩하지만 공부도 하는 꺼벙이며 덜렁이며 쭉쟁이며 재동이며 고집세며 이야기를 엮어 갑니다. 다 다른 아이들은 다 다른 삶을 찾아서 다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문득, 사람들은 길창덕님 만화를 놓고 '명랑만화'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명랑'이라는 말보다는 '생활'이라는 말을 붙이는 '생활만화'가 한결 어울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삶이 묻어나는 만화, 삶이 담기는 만화, 삶을 녹여낸 만화, 삶을 가꾸어 가는 만화를 길창덕님이 그려 나가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길창덕님 스스로 '나는 내 삶과 내 이웃 삶과 내 아이 삶을 그렸다'고 내세우지 않더라도 길창덕님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우리 삶이 여기에 다 있군요'하고 느끼면서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삶을 헤아리면서 찾고 가꾸면서 일구어 가면서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면서 살아가는군요'하고 느끼면서 책장을 넘길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2008.06.23 14:52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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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벙이로 웃다, 순악질 여사로 살다 : 길창덕 - 오마주아 총서 004

박인하 지음,
하늘아래, 2002


#만화 #만화책 #길창덕 #박인하 #책읽기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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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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