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한 장만 찍든 백 장을 찍든

[사진말 (12) 사진에 말을 걸다 59∼65] 사진 찍는 사람 많이 늘어난 요즘

등록 2008.08.04 16:26수정 2008.08.04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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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는 마음 다녀야 찍을 수 있는 사진입니다. 다니지 않고서는 찍을 수 없는 사진입니다. 알맞는 때를 기다려야 하고, 알맞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를 때까지 찾아보아야 합니다. 골목길을 찍든, 헌책방을 찍든, 연예인을 찍든, 꽃을 찍든, 자기 스스로 ‘사진으로 담아낼 님’이 어떻게 있는가를 알아보고 몸으로 삭인 다음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 최종규


[59] 고생 않고 찍은 사진기자와 작가들 : 가끔 기운이 쭉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을 때에는 '자세' 한 번 잡아 주지 않던 헌책방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낯선 사진기자 앞에서는 이런저런 모습을 잡고 찍혀 주었을 때입니다. 한편으로는 기분이 나쁘고 사진 찍을 마음이 줄어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 사진기자들은 '사진을 찍어서 돈을 벌어야 할 사람'이니 딱 한 번 찾아간 이곳에서 바로 이날 '자기 마음에 가장 드는 사진 하나'를 찍어야 할 사람입니다.

저는 다르지요. 어느 헌책방 한 곳을 딱 한 번만 찾아가서 신문이든 잡지에 쓸 사진 한 장만 얻으려고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꾸준하게 여러 헌책방을 골고루 찾아가는 가운데 헌책방마다 다 다른 모습을 담습니다. 헌책방마다 세월 따라 조금씩 바뀌고 달라져 가는 모습을 담습니다. 좋은 그림, 그럴싸한 그림이 아니라 세월이 묻어난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헌책방 한 곳에서 부대낄 수 있는 모든 모습을 차곡차곡 찍고 싶습니다.


예전에는 고생 않는 사진기자와 작가들이 참 밉고 싫었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고생하지도 않고 그럴싸한 그림이 나오는 헌책방 사진'을 찍어대는 사진기자나 작가가 있어도 홀가분합니다. 때로는 퍽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럴싸한 사진을 찍느라, 정작 헌책방 속맛과 참맛은 조금도 살피지 못하거든요. 이리하여, 요즘은 '저희들은 저희들대로 찍으라지' 하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사진을 찍으면 되니까요. 또한, 앞으로 헌책방을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사람들 사진과 제 사진을 한 자리에 놓거나 견주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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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담는 빛 하루에 한 번, 아니 날이 아주 맑을 때에만 한 번, 게다가 꼭 일 분쯤만 볼 수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으면, 그날을 맞추어 그 자리에 가 있어야 합니다. (서울 종로구 평동에 자리한 옛책방 〈연구서원〉에서) ⓒ 최종규


[60] 빛을 재면서 : 빛을 잽니다. 빛이 얼마나 헌책방에 들어오는지 살핍니다. 사진기 눈으로 재고 제 눈으로 바라봅니다. 빛이 골고루 들어오는 자리도 있지만, 더 환한 곳이 있고 더 어두운 곳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사진기 눈을 어디에 맞춰야 좋을까요. 더 환한 곳에? 더 어두운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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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은 어디에 맑은 날에도 안쪽은 어둡기 마련인 헌책방에서 사진을 찍을 때에는 형광등 불빛에 기댑니다. 이 형광등 불빛은 책꽂이 아래쪽까지 밝게 비추지 못합니다. 내 눈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서 형광등과 가까운 쪽은 너무 밝게 찍힐 수 있고, 형광등과 먼 쪽은 어둡게 나올 수 있습니다. ⓒ 최종규



[61] 사진 한 장과 100장 : 집안에 마련한 뜰을 사진으로 찍어서 엮은 책을 봅니다. 사진 한 장으로 한 곳을 보여줍니다. 사진 한 장으로 집안에 꾸민 뜰이 다 다름을 보여줍니다. 한 장 한 장 넘기며 보다가 책을 덮습니다. 아무래도 사진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비로소 사진 10장으로든 100장으로든 보여줄 수 있지 싶습니다. 한 장으로 보여줄 수 없으면 100장이 아닌 1000장으로도 무엇이 무엇이며,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지 못하겠구나 싶고, 사진을 보는 우리들도 알아보지 못하겠습니다.

[62] 사진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 사진을 아무리 많이 찍어도 사진을 볼 줄 모르면 늘 제자리걸음이기 일쑤입니다. 사진을 아무리 잘 찍어도 사진을 느낄 줄 모르면 팔굽혀펴기만 잘하는 셈이겠지요.


자기가 찍어 놓고도 자기 사진 가운데 좋은 사진이 있음을 볼 줄 모른다면, 좋은 사진을 키우는 쪽이 아니라 좋지 못한 사진을 키우는 쪽으로 빠지기 쉽습니다. 자기가 참으로 잘 찍은 사진인데도 무엇을 어떻게 잘 찍었는지 느끼지 못한다면, 한두 장 기막힌 사진은 있을지라도 사진책 한 권으로 묶을 만한 훌륭한 사진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맙니다.

[63] 책 보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내 '헌책방 사진' : 날이 갈수록 헌책방을 찾아가는 책손이 줄어들기 때문일까요? 요즘은 헌책방에서 사진을 찍을 때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찾는 사람' 모습을 담기가 몹시 어렵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헌책방 사진을 찍던 때를 떠올려 보면, 그때는 마음을 졸이며 도둑 사진을 곧잘 찍었는데, 요새는 아무리 큰마음먹고 있어도 도둑 사진 찍기 어렵습니다.

책을 조용하게 찾으면서 즐기는 분들에게 껄끄러움이나 번거로움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서 있는 모습을 그대로 담으려 하다 보니 늘 도둑사진을 찍는 셈인데, 도둑사진이 아니라 '미리 말하고 찍는 사진'을 찍고 싶어도, 책손 만나기가 어려워요. 널리 알려진 여러 헌책방에는 늘 사람이 얼만큼 있고 북적거리기도 해서, 이런 곳에서는 '사람 있는 헌책방 사진'을 곧잘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 있는 헌책방 사진이 요 몇 군데에 몰리곤 해요. 서울 시내 곳곳, 전국 곳곳에 있는 모든 헌책방에 이처럼 책손이 있다면 좋을 텐데, 훨씬 더 많은 헌책방에서는 '사람 없는 풍경 사진'을 찍을밖에 없기 일쑤입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헌책방 책손이 줄어들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억지로 사람 있는 모습을 찍으려 할 일이 아니라, 지금은 줄어들고 만 책손 모습,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책만 있는 모습을 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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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못 찍어도 헌책방뿐 아니라 새책방에도, 또 도서관에도 손수 찾아가서 책을 찾아서 읽는 발길이 줄어듭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인터넷 화면을 들여다보며 정보를 찾거나 책을 사는 사람이 늘어납니다. 헌책방도 하나둘 인터넷으로 장사길을 넓히지만, 헌책방 일꾼은 몸으로 뛰면서 책을 사들여 갖추어 놓습니다. (서울 낙성대 앞에 있다가 문을 닫은 헌책방 〈삼우서적〉에서) ⓒ 최종규


[64] 사진책 하나 느긋하게 보고자 : 오늘 산 사진책 하나 느긋하게 보고자 단골술집에 와서 혼자 술 한잔 마시면서 아주 지긋이 책장을 넘깁니다. 이럴 때면 광고 하나, 엮음새 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고 눈과 머리와 가슴에 쏙쏙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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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 보기 사진책을 묶어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진감’을, 적어도 수천 장, 많으면 수만 수십만 장을 찍습니다. 이 가운데 고작 백 장쯤만 추려서 책을 냅니다. 적어도 1/10, 으레 1/100, 많으면 1/1000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을 텐데, 사진쟁이들은 천 손가락을 깨물며 안 아픈 손가락을 찾듯 사진을 골라냅니다. ⓒ 최종규


[65] 사진 찍는 사람 많이 늘어난 요즘 : 사진 찍는 사람이 많이 늘어난 요즘입니다. 사진책도 곧잘 나오는 요즘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에 끌리는 사진쟁이가 좀처럼 안 보이고 선뜻 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진책도 잘 안 보입니다. 그저 찍어댈 줄만 알아서일까요? 무언가 그림은 그럴싸한데 사진을 찍은 그 사람한테는 그다지 소중한 대상을 안 찍었기 때문일까요? 그냥 구경꾼 사진 찍듯 말입니다.

제가 참 싫어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는 '강 건너 불 구경' 사진입니다. 강 건너에서 좋은 장비로 아주 기막힌 사진을 찍는단 말이에요. 이 사람은 그림으로 보기에 그럴싸하거나 멋들어진 사진을 찍은 것 같지만, 자기가 찍은 대상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그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도무지 모릅니다.

끙끙 앓으며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 사진을 '그림 좋게(불쌍하고 안타까워 보이도록,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담아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리따운 아가씨 알몸을 사진으로 곱게 담아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온갖 재주를 부려서 예술 사진을 빚어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다큐멘타리 사진은 왜 찍습니까? 보도사진은 어디에 씁니까? 연예인 찍는 사진도, 졸업사진도, 식구들 기념사진도, 사진관 명함판 사진도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 다 지난날 자취가 되고 생활역사가 됩니다.

자, 한마디 묻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생활역사가 되는 사진을 찍자면 1회용 사진기로도 넉넉합니다. 싸구려필름을 써도 되고, 디지털사진기로도 넉넉합니다. 사진을 왜 찍습니까? 사진책을 왜 펴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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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사진’ 많이도 찍으나 요사이 들어 ‘골목 사진’ 찍는 분이 꽤 많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골목을 찍는 분들 작품을 볼 때마다 ‘왜 찍었지?’ 하는 생각과 ‘뭘 찍었지?’ 하는 생각에다가 ‘어디를 찍었지?’ 하는 생각이 자꾸자꾸 듭니다. 골목길 깊숙한 데까지 들어가는 일은, 깊은 골목 안쪽을 거닐어 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골목길에 깃들어 사는 사람을 꼭 만나서 웃는 얼굴을 찍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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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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