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뭐라고? 나랑 같이 외박을 했다고요?"

친구의 부부관계를 지켜주기 위해 한 어쩔 수 없었던 거짓말

등록 2008.08.15 11:19수정 2008.08.26 13:5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야! 이 친구야!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이야, 도대체 왜 나를 끌어들여 거짓말 하게 만드는 거야?"
"아, 미안, 정말 미안해, 한 번만 봐줘, 마누라가 알게 되면 정말 큰일 나거든, 어쩌면 나 쫓겨날지도 몰라."


내가 자신의 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친구가 내게 거듭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있었다. 이번 경우에는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친구를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자위를 하고 있었지만 뒤끝이 결코 개운할 수는 없었다.

a

여행객들의 숙소로 뿐만 아니라 연인들 또는 부적절한 관계의 밀회장소로도 이용되고 있다는 모텔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직접 관계가 없음) ⓒ 이승철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확실한 거짓말이 "나는 평생에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라는 말이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어떤 이유에서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선한 뜻에서 한 거짓말이라고 거짓이 아닌 건 아니다. 선의의 거짓말이든 악의의 거짓말이든 거짓말은 거짓말인 것이다.

거짓말, 핑계는 많지만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고 불평을 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한 것이 어디 그때뿐이었겠는가. 어쩌면 살아오면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거짓말을 하면서 살아왔을 것이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면서 아내를 위로하기 위해 띄웠던 희망의 애드벌룬들은 악의 없는 거짓말들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을 충분히 이해시키지 못해 했던 거짓말들도 역시 악의 없는 거짓말들이었다. 곤경에 처한 친구를 돕기 위해 다른 친구들에게 조금 과장해서 한 거짓말은 어쩌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내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부끄러운 내 치부를 덮기 위해 내뱉은 거짓말도 결코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이건 분명히 선하지 못한 악의의 거짓말들이었고 부끄러운 내 자화상이기도 하다.

수많은 거짓말을 하며 살아오던 이십 몇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질 무렵 가까이 지내는 친구부부가 사무실 근처로 찾아왔다. 지나던 길에 점심을 함께하고 싶어서 왔다는 것이었다. 근처의 식당을 찾아 친구부부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 선생님은 안 그러실 분 같은데 요즘 웬 외박을 그렇게 자주 하세요?"
"???"

이게 무슨 소린가? 내가 외박을 자주하다니.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친구 부인이 뜬금없이 내게 웬 외박을 그렇게 자주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농담처럼 던진 질문이었지만 결코 가볍게 지나칠 말이 아니었다.

갑자기 찾아온 친구부부와 나를 당황케 한 질문

순간 나는 아연할 수밖에 없었다. 외박이라니, 내가 언제 외박을 했단 말인가. 더구나 내가 외박을 했다 하더라도 친구부인이 어떻게 그걸 알고 내게 물을 수 있단 말인가. 섣불리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얼굴색이 변한 친구가 내게 끔뻑 눈짓을 했다. 빤히 쳐다보는 눈빛에도 간절한 그 무엇이 담겨 있었다. 분명히 뭔가 있었다.

"아! 예,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무슨 구체적인 대답을 할 수 없어서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정확한 사태파악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로 말했다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때 친구가 거들고 나섰다.

"지난달과 이달 들어 우리 같이 술 먹다가 늦어지고 만취해서 몇 번 모텔 신세를 졌었잖아? 이 사람이 그게 못마땅해서 이러는 거야."

사실 나는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당시는 술을 매우 즐기던 시절이어서 술자리는 많았지만 이 친구와 술을 마신 것은 한두 번뿐이었다. 더구나 취하고 늦어서 모텔에 들었다는 말은 정말 황당한 말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짐작이 되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아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너무 즐기다보니 그만 이 친구까지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붙들어서 아주머니께 걱정을 끼치고 말았네요. 술을 좀 줄여야 하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어떻게 그런 능청스러운 거짓말이 술술 나올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은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때까지 상당히 굳은 표정이던 친구부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밝아진 것이다.

"아닙니다. 이 선생님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다 이이 때문이지요. 그래도 이 선생님이랑 함께 술 마시고 쉬었다니 안심이 됩니다. 요즘 전에 안 하던 외박이 잦아서 신경이 쓰였거든요, 오늘 점심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당치 않은 내 거짓말 한 마디에 친구부인은 의심의 먹구름이 싹 개인 모양이었다. 그들 부부는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몇 번인가 함께 만나 식사를 했을 정도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만에 만난 친구부인의 난데없는 질문이 나를 몹시 당황하게 했던 것이다. 점심을 대접하여 그들 부부를 돌려보낸 다음 날 저녁 친구를 다시 만났다. 친구가 술 한잔 하자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친구부부 내 거짓말로 위기의 순간을 넘기다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마누라가 그런 질문을 하리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는데, 자네가 어떤 대답을 할지 몰라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더구먼."

내게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다고 푸념하는 내 투정을 들어 주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한 친구가 저간의 일을 내게 털어놨다.

지난 몇 달간 친구는 다른 여성에게 빠져 있었다고 했다. 불혹의 나이 전후에 겪게 된 방황이었다. 몇 번인가 외박을 하게 되었고 그때마다 친구는 내 핑계를 댔다는 것이었다. 그의 부인이 나와 함께 있었다고만 하면 군말 없이 믿어주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친구부인의 그런 믿음을 배신한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그런데 어제 점심 무렵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온 부인이 "이 선생님 얼굴 본 지도 오래 되었는데 같이 만나서 점심이나 하자"며 핑계 댈 겨를도 없이 내게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동안 몇 번 있었던 외박을 의심하고 있다가 확인하고 싶어서 나를 찾은 것 같다는 것이 친구의 판단이었다.

"내가 그동안 무엇에 홀렸던 모양이야, 어제는 얼마나 놀라고 식은땀을 흘렸던지, 원! 십년은 감수한 것 같아."

그는 이제 다시는 외도를 하지 않겠다면서 몇 달 동안의 일을 악몽처럼 떠올리고 있었다. 만일 내가 "아니, 뭐라고요? 외박은 무슨 외박이냐"고 했더라면 결벽증까지 조금 있는 부인으로부터 끈질긴 추궁을 받았을 것이고, 결코 무사히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 친구의 결론이었다.

지금은 외국에 취업 이민한 아들을 따라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이들 친구부부는 이민을 갈 때까지 별 탈 없이 잘 살았다. 물론 부부관계도 원만했다. 친구가 그 후로는 부인 아닌 다른 여성에게 결코 마음을 주거나 소위 바람을 피우는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평범한 부부들에게도 평생에 위기의 순간이 한 번쯤은 있다고 한다. 이들 부부에게는 바로 내게 거짓말을 하게 했던 당시가 위기의 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지금도 부부관계는 좋지만 심한 당뇨병과 합병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친구부인이 속히 건강을 회복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다.

덧붙이는 글 | 잊을수 없는 거짓말 응모글


덧붙이는 글 잊을수 없는 거짓말 응모글
#이승철 #모텔 #거짓말 #부부관계 #친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 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AD

AD

AD

인기기사

  1. 1 100만 해병전우회 "군 통수권" 언급하며 윤 대통령 압박
  2. 2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3. 3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4. 4 시속 370km, 한국형 고속철도... '전국 2시간 생활권' 곧 온다
  5. 5 "일본정치가 큰 위험에 빠질 것 우려해..." 역대급 내부고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