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고 하지 않으면 위험해 보인다

[서평] 아모스 오즈의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 <숲의 가족>

등록 2008.09.08 10:31수정 2008.09.0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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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어부 알몬을 깔보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현실이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손으로 만져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마을에는 없었다. 누구나 마음의 눈으로 보고 귀기울여 들을 줄 알면 그 생각을 손가락으로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누가 진정으로 알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싶어 할까? 그는 수다스럽고 눈은 거의 실명한데다 못생긴 허수아비와 마주 서서 끝없이 논쟁을 벌이는 늙은이였다."

- <숲의 가족>,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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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가족> 겉그림. 아모스 오즈 지음. ⓒ 창비

▲ <숲의 가족> 겉그림. 아모스 오즈 지음. ⓒ 창비

내가 모르는 사람은 다 위험한 사람일까? 내가 모르는 세상은 다 위험한 세상일까? 나 혼자 여유롭게 사는 마을은 행복한 곳일까? 아무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스며드는 것이 더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되묻고 싶어진다.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모든 것이 조용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한 엄숙한 마을. 어른들은 그런 마을에 익숙한 듯 도리어 마을 밖 세상, 그러니까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숲을 애써 외면하고 산다. 숲속에서 들리는 '위험한 소리'와 '위험한 움직임'들을 애써 외면한 채 살아가는 마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는 그것을 애써 감추려한다.

 

아이들은 그저 어른들이 들려주는 마을 이야기를 무슨 무서운 동화처럼 듣곤 한다. 물론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이 마을은 서쪽으로 난 길 하나가 있을 뿐인데, 그 길마저 어떤 다른 마을과 연결된 길일 뿐 열린 길이 아니다. 그 마을은 어느덧 산과 숲에 사는 '이웃들'을 잃어 버린 채 홀로 외로이 지내고 있다.

 

시오니스트 가정에서 태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는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 그가 <숲의 가족>(박미영 옮김, 창비 펴냄)과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그가 말하는 '숲의 가족'은 조용하고도 외로운 마을 사람들에게서 오해와 외면과 놀림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숲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곱 색깔 무지개가 아름다운 이유는 각 색이 따로 있어서는 이룰 수 없는 독특한 빛깔을 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다양한 색과 움직임을 품고 있는 숲속을 '어두운 곳'으로 여기고 외면하는 것은 도리어 그들이 '어두운 사람들'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절대 가서는 안 될 곳처럼 말하는 어른들의 메아리를 뒤로 하고 용기 있게 산과 숲을 찾아들어간 마야와 마티는 무엇을 발견했을까. 어른들이 말하는 숲속은 정말 '어두운 곳'이거나 '위험한 곳'이었을까. 위험천만한 도전을 시도한 아이들 앞길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들으려 하지 않고 알려 하지 않으면 '위험한 곳'이 될 수밖에...

 

"어떻게 너는 숲을 무서워하지 않니? 네히가 무섭지 않니?"

 

니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야, 나도 무서워. 나도 가끔 무서울 때가 있어. 특히 밤이 무서워. 네히는 무섭지 않아. 사실은 동굴에 있을 때보다 나를 미워하는 아이들 속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이 내게 소리를 지르고 돌과 기왓장을 던질 때가 더 무서워. 어른들이 내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좀 봐, 저기 소리지르는 병에 걸린 불쌍한 아이가 오네, 정말 안됐어, 하고 말하면서 항상 어린아이들에게 내 곁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지. 난 그게 두렵고 무서워."(70~71쪽)

 

마을에서는 숲에서나 들을 수 있는 소리와 행동을 하는 모든 것에 경계심을 품는다. 언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마을의 동물들에 대해 아이들이 궁금해 할라치면 어른들은 쉬쉬 할 뿐이다.

 

한 번은 마티 아버지가 애써 눈물을 참는 듯한 모습으로 마티에게 "그렇게 자랑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는 여러 종류의 창조물이 있었지"하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아이들은 모르는 지난 날의 '죄'를 애써 감추는 듯 보였다. 그러면서 "너는 아직 어려.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는 알 수 없는 경고를 덧붙였다. 게다가 마티를 옆에 두고서 한 말을 없던 이야기로 하자고 하니 그저 궁금증만 더 쌓일 뿐이다.

 

마야와 마티의 궁금증은 더해만 간다. 코흘리개에다 숲에나 어울리는 이상한 소리를 내는 '이상한 아이' 니미 같은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단골 놀림 대상이 될 뿐이지만 왠지 숲과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왜 마을 사람들은 숲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위험하다는 말만 반복할까. 거기서 들려오는 소리와 움직임들은 그럼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일까.

 

분명 숲은 마을 주위에, 마을은 숲 사이에 있다. 그래서 서로 알아야 하고 만나야 하는 사이이다. 게다가, 동물들이 사라진 마을의 고요함은 결코 자연스럽지도 행복하지도 않다. 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것에는 의문을 품지도 않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을까. 아니, 알면서도 왜 감추려는 것처럼 보일까. 정말이지, 이상한 건 마을 사람들 특히 마을의 옛 이야기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어른들이다.

 

이제 아이들은 임마누엘라 선생님이 그려주는 그림으로만 보아온 숲속 세상을 직접 만나보게 될 터였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연인이 없어 외로움이 짙어 보이는 임마누엘라 선생님은 알 수 없는, 그런 '숲의 가족'을 이 아이들은 직접 보고 느끼고 만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세상은 결코 '어두운 곳'도 '위험한 곳'도 아닌 곳으로 밝혀질 터였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새로운 세상(!)을 찾을 주인공이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라는 사실이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그러나 절대 이상한 아이가 아닌 니미. 그리고 어둔 숲속을 휘감고 지배한다고 여겨지는 산귀신 네히. 그리고 마을 사람들(어른들)은 아는 것부터 꺼려하는 여러 '숲의 가족'들. 마을의 과거와 숲의 현실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던 마야와 마티는 그래서 더 솔직하고 용기 있게 '숲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두 아이의 걸음걸이가 새삼 경쾌해 보이고 멋있어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발견한, 오래된 새 희망

 

"숲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어렴풋이 마을의 집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네히가 그들에게 말했다. (…) 자, 이제 너희는 가서 평화롭게 지내. 그리고 잊지 마. 너희가 커서 어른이 되고 나이가 들어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서도 잊지 마. 마야, 마티, 잘 가. 안녕."(136~137쪽)

 

마야와 마티는 아이들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다며 늘 음산한 낯빛을 띠곤 하는 어른들은 결코 알 수 없었을 진짜 세상을 만났다. 이상한 아이라 놀림 받던 니미와 모닥불 옆에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산귀신 네히에게서 숲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네히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며, 마을에서 사라진 동물과 '산귀신'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가만, 네히는 정말 '산귀신'이었을까?)

 

아이들은 어른들이 알면 소스라치게 놀랄 네히의 요새에 들어가 그와 직접 마주보고 얘기했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두 아이는 나중에 네히의 배웅을 받으며 산을 내려오게 된다. 그리고 마을로 다시 돌아간다. 임마누엘라 선생님을 비롯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본 것을 빨리 말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결국, 두 아이는 '산귀신'으로 불린 네히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알게 되었고, 네히의 요새를 보고 숲의 진실을 알게되었으며, 네히의 희망 곧 아이들 자신의 미래가 되어야 할 세상을 보았다.

 

아 참, 아이들은 "사람들은 우리가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할 거야"라는 걱정마저 다 떨쳐 버리진 못한 듯하다. 어른들이 지배하는 현실이 주는 두려움을 상징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직접 보고 느끼고 만난 숲속 세상을 마을에 이어주고 싶어했다. 니미부터 다시 찾기로 약속하며 마을에 들어서는 아이들 마음은 이미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했다.

 

숲을 잃어 버린 마을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 아이들을 보며, 외로운 섬들이 서로 경계하며 사는 것 같은 우리네 세상을 떠올린다. 지금껏 알고 있는 세상과 지금껏 만난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더 다시 보려 하지 않는 우리네 모습이 눈앞을 계속해서 스쳐간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바로 마티와 마야의 꽁무니를 뒤쫓아서만 숲에 들어갈 용기를 얻는 내 모습이라는 무언의 질책도 들려온다.

 

마야와 마티는 도대체 숲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또 다시 궁금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정말 제대로 숨 쉬고 있는 걸까?

 

이 책(한국어판)은 이스라엘 작가 아모스 오즈의 히브어판 원서를 중심으로 하여 그 번역본인 독일어판과 영어판을 대조하는 과정을 거쳐 태어났다. 짧게 말해, <숲의 가족>은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어서 그것만으로도 색다른 느낌을 준다.

 

'산귀신' 네히가 사는 숲속은 어른들 시각으로는 그저 먹고 먹히는 관계일 수밖에 없는 동물들이 서로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이곳은 마치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충분하고 모두 함께 자유롭고 화목하게 사는 에덴동산인 것만 같다. "암소는 점잖을 빼며 졸고 있는 표범들 사이로 느릿느릿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는 일이 이곳에선 정말이지 자연스럽다. 어른들이 쉬쉬하는 '어두운 곳' 숲속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더욱 희한한 것은 이 모든 모습들이 마야와 마티 눈에는 낯설지 않고 오히려 낯익다는 사실이다!

 

'어두운 곳'으로 낙인찍힌 숲속에 들어가 진실을 알게된 마야와 마티. 이 두 아이에게 마을에서 사라진 동물들과 자신에게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 '산귀신' 네히. 이들은 '숲의 가족'을 세상에 드러내고 그 진실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가만 보면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 속에는 지은이의 신앙, 세계관, 평화를 향한 희망이 어우러져 있다.

 

어찌보면 지은이는, 외면당하는 진실 또는 애써 감추는 진실 사이에서 어찌보면 무덤덤하다 할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복잡한 현실을 <숲의 가족>에 비춘 셈이다. 그렇게 보면 문득, 구체적인 배경은 달라도 이스라엘 못지 않은 복잡한 현실을 안고 사는 우리 모습도 여기 <숲의 가족>에 비춰질지 모른다.

 

몰라서 지나치고 있는 현실. 알고도 모른 척하는 진실. 애써 외면하는 관계. 이렇듯 꽉 막힌 세상의 숨통을 터줄 이들이 또 누가 있을지. 아모스 오즈가 말없는 질문을 쏟아낸다.

덧붙이는 글 |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창비, 2008.

2008.09.08 10:31 ⓒ 2008 OhmyNews
덧붙이는 글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창비, 2008.

숲의 가족

아모스 오즈 지음, 박미영 옮김,
창비, 2008


#숲의 가족 #평화 #아모스 오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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