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곡리에서 아시아 구석기의 새 시대가 열렸다는데

[임진강과 한탄강 자락의 연천지역 문화유산 답사] ④ 당포성과 전곡리 선사유적지

등록 2008.09.11 10:24수정 2008.09.11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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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은 당개 나루터 동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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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내부와 동벽 ⓒ 이상기


차는 이제 숭의전을 떠나 가까운 곳에 있는 당포성(堂浦城)으로 향한다. 당포성은 미산면 삼화리와 마전리를 잇는 삼화교 오른쪽 임진강 현무암 단애 위에 위치한다. 전체적인 모양은 삼각형으로 호로고루와 비슷하다. 남벽과 북벽의 길이가 각각 200m이며, 동벽의 길이는 50m이다. 남북의 두 벽은 10m가 넘는 단애로 천연의 요새를 형성하고 있다. 동쪽에는 성벽을 쌓았는데 높이가 6m이다.


당포성의 접근은 호로고루와 마찬가지로 동벽으로만 가능하다. 동쪽으로 접근을 하니 역시 언덕처럼 보이는 성벽이 나타난다. 성벽 위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자라 성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좀 더 가까이 가 보니 언덕 속으로 축성된 돌들이 보인다. 그런데 호로고루처럼 정교해 보이지 않는다. 여러 가지 면에서 호로고루보다는 덜 중요했던 성으로 보인다.

동벽을 돌아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역시 넓은 공간이 나타난다. 강변 언덕에 만든 평지성임을 알 수 있다. 2003년 발굴을 통해 성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수직홈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벽 상단부에 구멍기둥(柱洞)을 확인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포성이 고구려성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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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에서 바라 본 임진강 ⓒ 이상기


성 내부에서는 고구려와 신라, 고려와 조선시대 기와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고구려 기와보다 신라의 기와가 더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시대 호로고루보다 그 활용도가 훨씬 낮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기와편 외에 토기편도 발견된다. 이것 역시 신라계의 유물이 더 많다.

당포성이 관할하는 당개나루는 임진강 상류로 올라가는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이다. 이 당개나루 바로 옆에 쌓은 당포성은 과거 양주에서 북상하는 세력을 막는데 중요한 성곽이었다. 북쪽으로 잔출하던 신라의 본진은 대부분 호로고루가 있는 고랑포 나루를 건넜을 테지만 일부는 당포성을 공격하여 임진강 북쪽의 교두보를 확보했을 수도 있다.

성 안 있는 녹슨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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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 안의 탱크 ⓒ 이상기


우리는 임진강을 따라 나 있는 남쪽 단애를 따라 성안을 살펴본다. 남쪽을 어느 정도 구경을 하고는 발길을 북쪽으로 돌린다. 뭐 특별한 것을 찾을 수 없다. 다시 발길을 동벽쪽으로 돌린다. 그런데 중간쯤 철조망이 쳐 있고 그 안에 녹이 슨 탱크가 서 있다. 탱크 위로는 위장망이 쳐 있다. 군사시설 지역으로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능하다. 3357부대장 명의의 접근금지 표지판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동벽으로 가 본다. 동벽은 현재 흙이 덮여 있지만 그 흙 속에는 석축이 쌓여 있다. 호로고루가 판축 위에 석축을 했다면 당포성은 석축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과거 성 안에서 경작이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최근에는 군부대의 훈련시설로 쓰이는 것 같다. 조선시대에는 이곳 당포성에 성황사라는 절이 있었음이 미수 허목의 시를 통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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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포성의 석축 ⓒ 이상기


당포성 동쪽 성벽을 나오면서 동벽의 석축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사실 정교하게 쌓은 성은 아니다. 자연석을 약간 다듬어 쌓아올린 모습이 보인다. 이들 석축 위로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알 수 있다. 길가로 나오니 주변에 인삼밭이 펼쳐진다. 길옆으로는 망초대가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여름은 그렇게 깊어가고 있다.

연천 현감을 지낸 신유한의 기행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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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해설사가 설명하는 겸재 정선의 '적벽강' ⓒ 이상기


우리의 다음 답사 코스는 은대리 성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은대리성은 다음 기회에 보기로 하고 바로 전곡리 선사유적지로 향한다. 가는 차 안에서 최병수 해설사는 연천 현감을 지낸 신유한(1681-1752)이 겸재 정선(1676-1759)과 적벽강을 유람하며 지은 시와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은 밀양 사람으로 33살의 늦은 나이에 증광시 갑과에 장원을 하여 벼슬길에 나선 사람이다. 그러나 큰 벼슬을 못하고 1719년 39세의 나이로 일본 통신사 제술관으로 정사인 홍치중을 따라 간다. 이때 기록한 사행록(使行錄)이 <해유록(海遊錄)>이다. 그 후 그는 지방의 현감과 군수 그리고 중앙의 봉상시 첨정 등을 거친다.

신유한이 이처럼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한 것은 그가 서출이기 때문이다. 59세 때인 1739년 그는 경기도 연천 현감으로 부임한다. 그는 연천에서 4년 동안 지방관으로 상당히 즐겁게 지냈던 것 같다. 미수 허목의 구택을 방문하기도 하고 주변의 아름다운 산천을 유람하기도 했다. 62세가 되는 1742년 10월 신유한은 양천 현감이었던 겸재 정선, 관찰사였던 홍경보와 함께 연천의 적벽강을 유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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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군 3D 지도 ⓒ 이상기


이때 남긴 글이 『의적벽부(擬赤壁賦)』이며, 신유한이 부(賦)를, 정선이 그림을, 홍경보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의적벽부』를 보니 적벽강 주변의 "나뭇잎은 떨어지고 산은 맑으며, 강은 소리 내어 흐르고 돌은 튀어나왔다. (木落山淸 江鳴石出)" 그들은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즐기면서 "강산과 풍월은 본시 나누어질 수 없음과 세상을 만든 조물주의 신묘함(江山風月 本無分域 是造物者化成之妙)"을 알게 된다.

겸재 정선과 청천 신유한은 그림과 글에서 뛰어난 재주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서출이어서 높은 벼슬은 하지 못했다. 당시 서출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은 군수와 현감 정도였다. 이들 두 사람은 상대방의 뛰어난 재능을 서로 알아보고 오랜 기간 교류한 대표적인 화공이며 글쟁이였다. 그러나 정선에 비해 신유한은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아직 신유한에 대한 연구와 소개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어떤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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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롱이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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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롱이 ⓒ 이상기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지이다.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 전곡리 유적의 규모가 가장 크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1978년 미군 병사 그렉 보웬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다. 그에 의해 채집된 4점의 석기가 아슐리안 석기로 밝혀졌고, 1979년 이후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 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주목을 받았다. 이 석기의 발견으로 당시까지 통용되던 모비우스 학설이 뒤집히게 되었다. 모비우스 학설이란 유럽과 아프리카의 구석기시대는 아슐리안 석기문화이고, 동아시아의 구석기시대는 찍개문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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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도끼 ⓒ 이상기


이처럼 전곡리 선사 유적지는 구석기 연구의 틀을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는 우리나라 구석기시대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곳 중 하나이다. 당포성을 떠난 지 20분 후 차는 이곳 전곡리 선사유적지(사적 제268호) 주차장에 닿는다. 주차장에서 유적지로 가기 위해서는 미롱이와 고롱이라는 두 마스코트를 지나야 한다. 미롱이의 미는 미래를, 고롱이의 고는 고대를 상징한다고 쓰여 있다.

전곡 구석기유적관에는 모조품만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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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 구석기유적관 ⓒ 이상기

이곳을 지나 길을 따라 가면 좌우로 과거 구석기시대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재현물들이 있다. 왼쪽으로는 짚으로 만든 움집이 있다. 이 움집은 옛날 집 뒤에 만들어놓던 김치꽝을 생각나게 한다.

오른쪽에는 조립식 건물로 된 전곡구석기유적관(全谷舊石器遺蹟館)이 있다. 유적관 안으로 들어가니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찍개류도 보인다. 그런데 이것들이 모두 모조품이다.

알고 보니 진품은 모두 국립 중앙박물관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전곡리에서 발견된 석기만이 아니고 호로고루, 공주 석장리, 단양 수양개 등에서 발견된 석기의 모조품도 있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없다. 원형, 모조품, 교육용 자료를 분명히 구분해야 하고, 박물관의 건립 의도나 목적도 분명해야 하는데 정말 아쉽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지명도와 의미는 대단한데 현장은 실망스럽다. 껍데기 뿐이기 때문이다.

유적관을 나와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왼쪽으로 연못이 보인다. 그곳에서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고 멧돼지들이 노닐고 있다. 그 옆에는 관리인들이 제초작업을 하고 있다. 이곳을 지나 약간 언덕진 곳에 이르면 왼쪽으로 구석기인들의 기술을 보여주는 돌들이 널려 있다. 그리고 앞 쪽으로 토층전시관이 보인다.

전곡리 토층전시관은 그나마 학술성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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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 유적 발굴 도표 ⓒ 이상기


토층전시관 1층에는 발굴과 관련된 기록과 자료가 있고, 한층 아래 지하에는 토층을 수직으로 보여주는 전시공간이 있다. 1층에 보니 '전곡리 구석기유적 연도별 발굴기간 및 출토유물 통계'가 나와 있다. 1979년 3월부터 2001년 2월까지 무려 11차례나 발굴 조사를 했다. 전곡리 선사유적지 4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을 했으며, 11번 중 두 번은 사적구역 외곽을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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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층전시관 내부 ⓒ 이상기

1979년(1차)부터 1983년(6차)까지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대학연합 발굴조사팀이 작업을 했다. 나중에는 국립 중앙박물관과 국립 문화재 연구소도 참여했다.

당시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유물은 1,082점이다. 1986년에 이루어진 7차 발굴은 서울대학교 박물관이 했으며 509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1990년의 8차 발굴부터는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가 주도해 2001년 11차까지 이루어졌으며, 이때 출토된 유물은 모두 1,959점이다.

전시관에는 발굴 당시 사용하던 호미, 모종삽, 망치, 체, 측정기구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공간에는 1979년 4월에 수습된 주먹도끼가 전시되어 있다. 석영이 많이 들어간 돌도끼로 사진에서 자주 보던 것이다.

토층전시공간에는 수직으로 토층을 구별해 설명하고 있다. 또 수평 공간에는 이곳에서 수습된 석기들을 그대로 전시하고 있다. 구석기시대를 전공한 고고학자들은 그 내용을 잘 이해할지 모르지만 보통사람들은 돌과 흙만으로는 내용을 이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이곳 역시 전시관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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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주먹도끼 상징물 ⓒ 이상기


토층전시관을 보고 나오면 한쪽으로는 넓은 공간에 선사체험마을이 있다. 4개의 체험동이 있어, 석기를 만들고 토기를 빚고 선서놀이 체험 등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 여유가 없어 그곳에 들를 수가 없다. 애들의 교육장으로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나오다 보니 화강석으로 만들어 놓은 큰 주먹도끼 복제품이 보인다. 주먹도끼는 역시 전곡리 선사유적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당포성 #한탄강 #신유한 #전곡리 선사유적지 #주먹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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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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