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 비밀경찰'로 환생하려는 국정원

[주장] 국정원의 전방위 사찰은 민주주의 위기의 징조

등록 2008.10.26 16:27수정 2008.10.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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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 국정원 홍보브로셔


독재 권력과 비밀경찰은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하는 관계다. 정통성 없는 정치권력은 필경 반정부 세력을 낳는다. 이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 독재 권력은 비밀경찰을 필요로 한다. 역사로 볼 때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경찰과 독일 프로이센의 경찰이 비밀경찰의 원조 격이고, 독일의 게슈타포와 소련의 KGB 등은 비밀경찰의 대명사 격이다. 요컨대 비밀경찰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다.

일제하에서 악명 높던 고등경찰도 비밀경찰의 한 유형이었다. 국정원은 과거 박정희의 중앙정보부(중정)에서 전두환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를 거쳐 오늘에 이른 정보기관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중정과 안기부는 비밀경찰이라는 성질 면에서 일제 고등경찰이나 진배없었다. 따라서 오늘의 국정원은 가까이는 안기부와 중앙정보부 그리고 멀리는 일제의 고등경찰에까지 연맥이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이 있듯이 국정원의 전신인 안기부는 민선정부였던 김영삼 시절까지도 음습한 비밀경찰의 작태를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대통령의 아들을 호가호위하며 국정을 농단했다. IMF 환난은 달리 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안기부의 국정 농단은 정경유착을 낳았고 정경유착은 거품경제를 비호했다. 나라가 망가지는 데에는 이런저런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10년 전으로 돌아갈 바에는 아예 이름도 '안기부'로 바꿔라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 이것이 중앙정보부 이래 안기부의 부훈이었다. 오죽했으면 김대중 대통령이 안기부를 국가정보원으로 개명하고 원훈도 '정보는 국력이다'처럼 매가리 없는 것으로 바꾸었겠는가? 그것은 물론 과거 비밀경찰의 음습한 이미지를 쇄신해보기 위함이었다.

이런 노력은 노무현 정부 시대에도 일정하게 이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장의 독대 보고를 폐지하는 고육책을 쓰기도 하면서 이런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이명박 대통령도 후보 시절에는 국정원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국정원은 해외 경제 정보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 대통령의 후보 시절 말과 당선 후의 행동이 다르게 나타난 데에 문제가 있다. 이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폐지했던 국정원장 독대 보고를 부활시켰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국정원은 끊임없이 대통령의 통치기관임을 자임하며 독대 보고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대통령이 바뀌자 냉큼 뜻을 이룬 셈이다. 이로 보아 국정원 사람들의 권력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가 있다.


국정원의 전방위 사찰은 민주주의 죽음의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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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희덕 민주노동당 의원이 20일 국회에서 열린 환노위 국정감사에서 국정원과 경찰청에 대한 노동부의 국정감사 결과 보고와 관련, 이영희 노동부 장관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있다. ⓒ 남소연


결과는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공 업무 외에는 권한이 없는 국정원이 국회와 언론 등에 전방위적인 사찰과 개입을 하게 된 것이다. 국정원은 행안부와 노동부 등에 대한 국회의 국정감사 결과를 실시간으로 보고 받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정치사찰의 성격이 짙은 행태이다. 게다가 국정감사는 국정원 소관을 벗어난 일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난 8월 11일 KBS 사장 문제를 논의하는 정권 실세들의 비밀모임에 김회선 국정원 제2차장이 참석한 사실이다. 김회선 제2차장은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출신인데 청와대에서 의도적으로 국정원에 발탁한 인물이다.

당시 청와대에서는, "김회선 2차장의 기용은 정보 분야의 기준과 원칙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는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압수 수색과 관련하여 민주노동당 의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내에 친북 좌익 세력 척결 없이는 선진국을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 인물이다.

청와대는 정보 분야의 기준과 원칙을 확립하기 위해 김회선 차장을 기용했다고 했다. 국정원에는 1, 2, 3차장이 있다. 1차장은 해외업무, 2차장은 국내업무, 3차장은 대북업무를 관장한다. 여기서 제2차장이 관할하는 국내업무란 국가보안업무를 가리킨다. 국가보안업무를 담당해야 할 제2차장이 국정감사를 사찰하고 언론장악을 기도하는 일에 가담했는데 이것이 바로 청와대가 말한 '정보 분야의 기준과 원칙'이라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건지 대답해야 한다.

지난 3월에는 김용철 변호사가 떡값 검사 명단을 폭로하겠다고 하자, 국정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 명단을 공개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때 사제단은, "특히 (당시) 김성호 국정원장 내정자의 이름을 공개할 경우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7월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한겨레신문>를 상대로 낸 BBK 민사소송과 관련하여 국정원에서 재판장에게 전화를 걸어 재판 진행 상황을 물은 일도 있었다.

현행 국정원법 3조는 국정원의 직무 범위를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 정보'로 한정하여 규정하고 있다. 쉽게 말해 국가보안법과 관련된 사안이 아니면 국내 사안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국정원은 국회와 언론은 물론 심지어는 종교단체와 사법부에까지 구체적인 개입을 확대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다.

국민 지지 잃은 정부와 비밀경찰의 합작은 파쇼로 치달아

이명박 대통령은 틈만 나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는데, 그가 법과 원칙을 중시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법을 어기고 방송 장악 기도에 일조한 김회선 제2차장을 비롯하여 관련 국정원 사람들을 사법적으로 조치해야 하는 것 아닌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해 법과 원칙을 '촛불'에다만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 번 보여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 사태에 대하여 유구무언하고 있다. 기껏해야 실정법을 잘 모르는 것처럼 보이는 나경원 의원 같은 이가 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밥 한 번 먹은 것이 뭐가 어떠냐?"고 말하는 정도였다.

작년 한나라당 경선정국에서 한나라당은 국정원을 격렬하게 비난한 적이 있다. 국정원이 이명박 후보의 재산 뒷조사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회는 이상업 국정원 제2차장 등 관련자를 고발하기로 결정하면서, "국정원의 최종 지휘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은 직접 국민 앞에 사죄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성토했다.

이어 나경원 당시 대변인도, "법조문 어디에도 국정원이 부패척결 운운하며 야당 대선 후보의 뒷조사를 할 권한은 없다. 이것은 정치적 악용을 위한 정치사찰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말을 한 나경원 의원이 불과 1년 남짓 되어 국정원 제2차장과 만나 KBS 사태를 숙의하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면 바쁜 국회의원인데다 멀쩡히 가정까지 있는 사람들이 뭐 하러 호텔에 갔다는 말인지 듣는 사람이 어리둥절해진다. 

이런 정황에 이미 국정원은 직무 범위를 확대하고 권한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국정원은 국민의 휴대전화를 감청하는 일, 국정원 관할에 대테러센터를 설치하는 일 등을 비밀보호법과 테러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정기국회에서 법안 통과를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법이 구비되지 않았을 때에도 무소불위의 사찰과 개입을 불법으로 자행한 국정원이 만약 법의 뒷받침까지 받게 될 경우 차후 어떤 끔직한 일이 벌어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런 모든 일들은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 단순히 국정원의 과욕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이루어진다는 판단을 내리게 한다. 이것은 실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런 일은 이명박 정부가 그동안 실정을 거듭한 끝에 이제 비밀경찰의 힘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정도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의혹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역사상 국민의 지지를 잃은 정권과 비밀경찰이 합작했을 경우 파쇼로 치닫지 않은 예가 없었다. 유달리 대한민국에는 비밀경찰로 인한 피해를 악몽처럼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그 가족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경제가 어려운 것은 참을 수 있어도 또 다시 비밀경찰에 공포를 느껴야 하는 삶은 참을 수 없다.   

최근 국정원은 원훈을 새로 바꿨다고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정보는 국력이다'라는 구호는 양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그들은 거창하게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라고 원훈을 새로 정했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이 보이고 있는 행태는 원훈에 있는 자유·진리·무명·헌신 중 그 어떤 단어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덧붙이는 글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제국과 인간>을 연재 중입니다.
#국정원 #비밀경찰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김회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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