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의 제왕? 난 '요로결석 폐인'일 뿐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 ②] 그 남자의 식생활

등록 2008.10.28 15:36수정 2008.11.04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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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온 '옥탑방 여자(이유하)'와 '반지하 남자(김귀현)'가 있습니다. 푸른 꿈을 품고 서울에 왔지만, 이들의 자취생활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밥 먹는 것부터 빨래하는 것까지, 자취경력 일천한 이들에겐 모든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생생한 자취 이야기를 기사로 만나보세요. 매주 1~2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샤워를 마치면 '올 누드'로 거실과 방을 누볐다. 새벽 케이블 TV의 낯 뜨거운 19금 방송을 보면서도, 리모컨 채널 전환 버튼에 손을 대고 있지 않아도 됐다. 

드디어 내 세상이 생긴 것이다. 작년 여름, 나는 20년이 훌쩍 넘는 경기도 생활을 청산하고, 당당히 서울에 입성했다. 서울에 직장을 잡으면서,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성북구 돈암동에 있는 '반지하 방'이 나의 보금자리다. "햇볕이 잘 든다"고 부동산 관계자는 강하게 말했다. '1층 같은 반지하'라는 말에 혹해서 계약했지만, 햇볕은 화장실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여름엔 '습식 사우나', 겨울엔 '냉동 창고'가 되었지만, 난 행복했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 앉아서 광명을 찾았다. 온몸을 감싸는 한 줄기 햇빛에 난 감사했다.

그간, '남자 혼자 자취 = 폐인의 지름길'의 등식이 성립되는 순간을 내 눈으로도 많이 목격했다. 난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라면 끓여 먹으며 목숨을 부지하고, 세탁하기 귀찮아 한 달째 같은 점퍼를 입으며 살고 싶진 않았다.

방과 부엌이 철저히 구분된 '분리형'이었기에 난 마음껏 음식을 해먹을 수 있었다. 좁지만 세탁기를 들여놓을 공간도 있어, 빨래도 할 수 있었다. 칙칙한 자취생이 아닌 멋들어진 자취생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난 '반지하의 제왕'을 꿈꾸며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집에서 요리하기... 별 거 아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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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한 줄기 빛 매일 아침 난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 김귀현


그러나 나의 달콤할 것만 같았던 '자취방 허니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선 인간다운 생활의 3대 요소인 '의식주', 그중 가장 중요하다는 '식'생활이 '반지하의 제왕 프로젝트'에 딴죽을 걸었다.

물론 제대로 음식을 해본 적은 없지만, 의욕만은 넘쳤다. '럭셔리한' 식생활을 위해 세계적인 주방 용품 업체인 'X팔'에서 프라이팬과 냄비도 구입했다.

근처 재래시장에서 장도 봤다. 양파 한 망에 1000원, 오이 3개에 1000원, 감자 뭉텅이에 2000원, 고기 반 근에 3000원…,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의 가격이었다. 보통 회사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면 최하 5000원을 써야 하는데, 시장에선 이것저것 사고도 1만원이 채 들지 않았다.

나의 첫 요리 도전 과제는 '카레', 인터넷에서 조리법을 내려받아 그대로 따라했더니, 얼추 동네 분식집에서 나오는 것만큼의 모양은 갖췄다. 맛도 그 정도면 먹을 만했다. 가끔 뭉쳐있는 카레 가루를 씹어야 했지만.

식재료 구입, 요리, 먹기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다 먹고 난 후, '쓰나미'보다 빠르게 엄습해오는 '3대 악재'가 나의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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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라이스 카레는 생각보다 만들기 쉽다. ⓒ 김귀현


[악재 1 : 세균 번식] 냉장고에 놔둔 오이도 썩는다

맛있게 카레를 먹은 난 후, 첫 번째 악재가 찾아왔다. '내일 또 먹어야지' 하며 가스레인지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던 카레가 상해 버린 것이다.

족히 3회분은 되어 보이는 노란 카레 위에 하얀 눈이 내렸다. 냄새는 맡을 수도 없었다. 여름인데다 습기 많은 반지하라 부패가 더 빨리 진행됐나 보다. 난 슬픔을 억누르며 그 카레를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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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안 냉장고에 넣은 음식도 썩을 수 있다는 것을 20대 후반에야 알았다. 거의 세 달째 방치해둔 맨 위 칸의 김치, 뭔가 번식하고 있을 것 같아 뚜껑조차 열기 무섭다. ⓒ 김귀현


'부패'의 악재는 이어졌다. 나는 냉장고에 놔두면, 모든 음식이 며칠 동안은 싱싱함을 유지할 거라 생각했다. 냉장고에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카레 상(喪)'을 치르고 일주일 후, 거울을 보니 자취생활에 절어 푸석해진 내 얼굴이 보였다. 문득 지난 주, 먹다 남은 오이가 생각났다. 얼마 전 지하철에서 산 1000원짜리 오이 슬라이스(아주 얇게 썰 수 있어서, 오이 한 개로 4인 가족 얼굴에 붙일 수 있다는…)를 준비하고, 일주일 만에 오이를 만나러 냉장고 문을 열었다.

"반갑다 오이야"하며 손을 내밀었다. 손을 갖다 대자, 오이엔 큰 구멍이 뚫렸다. 오이는 이미 임종을 준비하고 있었다. 믿고 냉장고에 맡겼는데, '시간의 힘'을 보태니 그렇게 힘없이 썩고 말았다. 오이는 운명했다. 미안하다 오이야.  

오이와 함께 냉장고에 넣어놨던 감자, 양파? '줄초상'이었다.

[악재 2 : 음식물 쓰레기]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게    

카레의 슬픔이 가시지도 않을 무렵, 다른 채소 친구들도 가시는 길 편안하게 모셔야 했다. 이어지는 '대참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경황이 없었다. 문득 힘들 때 내 형제처럼 도와준다는 '상조' 광고가 생각났다.

일단은 쓰레기봉투에 담으려 했다. 근데, 일반 쓰레기봉투엔 '음식물 쓰레기를 넣으면 과태료 내야 한다'고 크게 쓰여 있었다. 인터넷을 뒤져봤다.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곧바로 슈퍼로 달려갔다.

근데 이게 웬 일, 떡볶이 1인분이면 꽉 찰 만한 조그만 봉투값이 5L짜리 일반쓰레기봉투와 별 차이가 없었다. 일단 3L짜리 한 묶음을 샀다. 그리고 우리 운명하신 채소들을 잘 담아서 좋은 곳으로 보내드렸다.

이래저래 집에서 음식을 하니 감자 껍질, 양파 '꼬다리', 먹다 남은 음식 등 쓰레기가 많이 나왔다. 그 봉투를 얼마 가지 않아 다 써버렸다. 집에서 곰곰 생각해 보니 분했다. 음식물쓰레기봉투 가격은 너무 비쌌다.

집에서 음식을 하려 해도, 음식물 쓰레기 생각에 쉽게 단념하게 됐다. 이렇게 나의 '집에서 음식하기' 계획은 점점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꼼수'가 하나 생겼다. 음식물 쓰레기를 잘게 썰어, 우리 집에서 가장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는 것이다. 바로 '화장실 변기'. (아직까지 막히지는 않았다 -.-)

[악재 3 : 피폐해지는 정신 세계] 결국 폐인 모드 돌입, 결과는 '응급실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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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5개입 라면 5개면 일주일이 든든했다. 몸에 좋은 올리브유까지 함유되어 있다. ⓒ 김귀현


무엇보다 나의 '요리 의욕'을 막은 건 '외로움'이었다. 처음엔 혼자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하고, 즐겁게 먹곤 했지만, 몇 번 해보니 혼자 할 짓이 못됐다.

맛있어도, 맛이 없어도, 그저 혼자만의 생각에 머물러야 했다. 결국 밥을 먹으며 "아, 이번 건 정말 맛있다, 그치?"라며 대답 없는 밥상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점점 요리 횟수는 줄어만 갔다. "왜 퇴근 안 해?"라 선배들이 물으면, "일이 좀 남아 있어서"라고 했지만, 사실은 배가 고파서였다. 당직 서는 선배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함이었다.

주말에 약속이 없으면 그날은 정말 밥 먹는 게 괴로웠다. 하루는 3끼를 모두 라면으로 먹은 적도 있다.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을 때쯤엔 "역시 라면 만든 사람은 천재야"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피폐한 식생활 결과는 몸으로 나타났다. 지난 9월, 출근하는 버스에서 배와 허리가 너무 아파 그만 쓰러져 버린 것이다. 난생 처음 응급실에 실려 갔다. 병명은 '요로결석'. 나트륨이 많이 함유된 인스턴트식품을 자주 먹어서 생긴 병이란다.

혹자는 이야기한다. '요로결석의 아픔은 산모의 고통'이라고. 정말 아팠다. 데굴데굴 구를 정도였으니…. 결국 이렇게 '반지하의 제왕'을 꿈꿨던 나는 딱 1년 만에,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 '반지하의 폐인'이 되고 말았다.

병을 치료한 후 라면 등 인스턴트식품은 끊었지만, 요리는 엄두가 안 난다. 무한 번식하는 세균과 처치 곤란 음식물 쓰레기는 둘째 치고, '처절한 외로움'은 어떻게 달랠 것인가.

오늘도 난 퇴근을 미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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