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학병 탈출 1호, 게이오대학 김준엽

[김갑수 역사팩션 143] 3부작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27 20:45수정 2008.10.28 10:32
0
원고료로 응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7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일본군은 침략 전쟁을 일으킨 그 날을 마치 경축일처럼 기념했다. 장준하의 내무반에도 천황이 하사했다는 술과 담배가 지급되었다. 일석점호 때까지 마음 놓고 마셔도 좋다는 지침이 하달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무반 분위기는 평소와 다르게 방만해져 있었다.

내무반 침상 여기저기에 빈 술병이 나뒹굴기 시작했다. 실내는 담배연기로 자욱해지고 있었다.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는 장준하였다. 그래서 긴장과 흥분을 감추기가 더 어려웠다. 그는 기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까부터 지나친 긴장감으로 손끝과 발가락이 저렸다. 하지만 평소처럼 태연해야 하는 일이었다. 극도로 침착하지 않으면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준하는 세 동지들과 눈을 맞추었다. 김영록 윤경빈 홍석훈, 함께 탈출을 모의한 세 동지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역력했다. 장준하는 그들에게 차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들 역시 어색하게나마 미소로 응답했다. 그들은 술잔을 들고 있었지만 마시지는 않고 있었다.

네 젊은이는 목숨을 건 탈출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장준하는 어금니에 힘을 주며 마음을 진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갈수록 긴장감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두 손으로 세수하듯이 얼굴을 문질러 보았다. 다시 세 동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탈영을 제의하고 주도한 것이 자신임을 새삼 생각했다.

'나에게는 저들 세 사람의 생명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다.' 장준하는 자신의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오늘이 있게 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은 사투에 가까웠다.

장준하, 오직 오늘을 위해 견뎌낸 준비과정

그는 동경에서 귀국하자마자 김희숙과 혼례를 치렀다. 그는 새댁 아내를 아버지의 사택에 머무르게 했다. 그러자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이제 아버지와 동생 걱정을 덜게 된 것이었다. 아울러 김희숙의 정신대 징발 위험도 없어졌다.


그는 자신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 군대에 오래 머무를 의사가 없었다. 기회를 보아 탈출한 후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에 가서 독립군이 되고 싶었다. 그것은 먼 옛날 유년 장준하가 지녔던 꿈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중국에 배치를 받아야 했다.

최전선인 동남아시아로 배속을 받으면 탈영은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 배속 받는 것도 문제였다. 목숨이야 안전하겠지만 독립군에 합류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은 중국 대륙의 서단, 양자강의 끝에 위치하는 도시였다. 그러므로 압록강에서 줄잡아 1만 리 이상의 거리였다.

그는 일본을 떠나기 전, 임주호의 말을 듣고 학병 탈출과 광복군 합류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일본이 조선 학생까지 징집하는 것은 그만큼 전세가 몰리고 있다는 증거가 되네. 조선인 학생은 민족정신이 강하다는 것을 저들은 알고 있거든. 상황이 어지간만 했어도 저들은 조선 학생을 전장에 내보내지는 않았을 걸세. 따라서 최전선인 동남아시아로는 안 보낼 거야. 중국에 있는 일군 병력을 빼서 전선으로 보내고 그 빈자리에 조선인 학병을 채우려 하겠지. 이것은 내 의견이 아니고 우리 부친이 일본군 퇴역 장성에게 들은 얘기라네. 그러니 자네는 십중팔구 중국으로 간다고 보면 될 거야."

장준하는 중국으로 배치되기를 절실히 원했다. 그것은 잠시라도 일본 군복을 입은 치욕을 말끔히 씻는 일이었다. 다행히 그는 국내 훈련 때 자신이 소속한 42부대가 중국 강소성 북부 서주로 배치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조선 학병 중에는 안전한 국내에 남기를 희망하는 이가 많았지만, 장준하는 그 소문이 사실이기를 빌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는 심한 동상에 걸렸다. 42부대에는 기마중대가 있었다. 장준하의 내무반에서 그들의 마구간을 청소했다.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말똥을 치우고 말발굽을 닦아내던 신병 장준하는 왼손 엄지가 아리고 부풀기 시작했다. 물론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기도 했다.

밤마다 신음하는 그를 불침번들은 그지없이 안타까워했다. 통증은 손가락에 머물지 않고 등골까지 전달되어 왔다. 그는 성경을 꺼내 읽으며 고통을 참았다. 일본 군인을 택하고 임무에 충실했던 자신에게 조국이 내리는 벌은 아닐까 생각하며 그는 아픔을 견뎠다.

일주일 정도를 참아내던 그는 어쩔 수가 없어 일군 의무관을 찾아갔다. 군의관은 부어터진 장준하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냐? 째서 고름을 빼야 하는데 마침 마취제가 떨어졌구나. 아프면 꽥꽥 돼지처럼 소리를 지르려무나."
"참아 보지요."

'싸악-' 장준하는 손가락 살에 메스 날이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고름이 들어 있다는 손가락에서는 빨간 피만 나왔다. 그러자 군의관은 다른 쪽을 갈랐다. 하얀 고름이 뿜어져 나온 것은 네 번째 부위를 갈랐을 때였다. 군의관은 난자된 손가락에 머큐로크롬을 처바르더니 붕대를 친친 돌려 감았다.

"내가 내· 외· 정형외과 의사 10년 하는 동안 너 같은 독종은 처음 봤다."

장준하가 소리 한 번 안 지른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장준하는 일본군 군의관에 맞서 조선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다. 그는 속으로 '왜놈에게 엄살 피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손가락에 감은 붕대 때문에 난처한 상황이 빚어졌다. 200명의 훈련병 중 40명이 탈락하고 장준하를 포함한 160명의 서주행이 확정되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연대장에게 신상 검열을 받게 되었다. 연대장은 참모와 함께 훈련병 사이를 누비다가 장준하의 붕대를 보게 되었다.

"부상병이구나. 몸이 아픈데 구태여 험한 곳에 가서야 되겠느냐?"

헉! 장준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연대장은 지휘관으로서 아량을 보이고 싶었던지 참모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남아도 할 일은 있고, 또 치료 후에 갈 수도 있으니 이 병사는 이번에 빼지."

이때 장준하가 끼어들어 큰 소리로 말했다.

"종기 하나로 낙오돼서야 어디 군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서 싸우고 싶습니다."

연대장은 장준하를 순수하고 투지가 높은 병사로 본 듯싶었다.

"군인 정신이 충만해 있구나. 뜻대로 해라. 그래도 많이 아프면 안 가도 된다."
"가겠습니다."
"좋다. 가려무나."

하마터면 막판에서 좌절될 뻔했던 중국행이었다.

로마서 구절이 편지에 쓰여 있거든...

훈련소에 면회 온 아내에게 장준하는 속삭였다.

"내 편지에 로마서 성경 구절이 쓰여 있거든 내가 일군을 탈출한 것으로 아시오."

그는 서서히 백짓장으로 변하는 아내의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장준하는 하루라도 빨리 일본 군인이라는 치욕을 떨어버리고 싶었다. 그는 입대하던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땀이 흘렀다. 철없는 조선 학생들 대부분은, 무운장구(武運長久)라고 써진 띠(다스키 멜빵)를 엇갈려 매고 일장기(히노마루) 바탕에 온통 서명을 받아 머리에 두르고 기차역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수많은 배웅객들이 만장을 들고 뒤따랐다. 역에는 학병의 장도를 축원하는 플래카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장준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실 그는 지방 관리나 유지들이 집으로 축하 메시지와 함께 띠나 만장을 보내왔을 때, 설마 이런 것을 두르고 나가는 조선 학생이 있으랴 싶었다. 그는 그런 선물을 받는 자신이 모멸스러워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그것들을 남김없이 태워 버렸다.

장준하가 지금 소속된 일군 부대의 이름은 쓰카다였다. 쓰카다 부대는 조선 학도병의 탈출 사고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명예로 삼는 부대였다. 쓰카다 신병교육대에서는 300여명의 학도병 간부후보생이 훈련을 받은 후, 다시 자대 배치를 받았다고 했다. 다만 인근 파견지에서 단 한 건의 탈출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탈출자는 게이오대학 학생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는 김준엽이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평양전쟁과 중경임시정부 그리고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이 펼쳐집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태평양전쟁과 중경임시정부 그리고 제국주의에 도전한 인간들의 매혹적인 삶이 펼쳐집니다.
#장준하 #김준엽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2. 2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3. 3 "총선 지면 대통령 퇴진" 김대중, 지니까 말 달라졌다
  4. 4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5. 5 '파란 점퍼' 바꿔 입은 정치인들의 '처참한' 성적표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