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뒤늦게 춤바람 났어요

나이 들어 춤에 푹 빠진 친구의 멋진 춤 공연을 보고왔지요

등록 2008.10.30 17:02수정 2008.10.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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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마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부부 ⓒ 이승철


“내일 내 춤 공연 있는데 좀 와주지 않을래? 우리 애들은 모두 바빠서 올 수 없다는데….”
“뭐? 춤 공연이라고? 혹시 너 춤바람 난 거 아냐?”


모두들 깜짝 놀라는 표정입니다. 갑자기 춤이라니, 그것도 공연이라니 놀랄 수밖에요. 회갑을 훌쩍 넘긴 나이에 춤이라니 친구들이 황당한 표정을 짓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냐! 아냐! 춤바람이라니, 춤바람은 무슨… 마누라랑 함께 하는 공연인데, 춤바람은 무슨 언감생심….”

친구가 두 손을 마구 흔들어댑니다. 춤바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연은 이랬습니다. 2년 전 30여 년 오랜 직장생활에서 물러나 백수가 된 친구는 허허로운 마음도 달래고 시간도 보낼 겸 아내와 같이 마을 동사무소에서 하는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답니다.

그것이 스포츠 댄싱이라는 춤이었습니다. 차차차도 배우고 지르박도 배우고, 그러다가 최근에 배운 것이 자이브라는 춤이랍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관할 구청에서 각 동 대항 발표회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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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인 친구부부와 댄싱팀 ⓒ 이승철


친구 부부도 거주지 동 대표로 자이브 춤을 추게 되었다는 것이 친구의 설명이었지요. 그러니 친구들이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꽃다발은 쑥스럽고 그냥 몰려가서 박수 응원이라도 해주자고 의견을 모은 것입니다.


29일 오후 친구들과 함께 찾은 서울 동대문구청 대강당은 와글와글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각 동을 대표하여 발표에 참여한 팀이 20개 팀이나 되었습니다. 관객이라야 대부분 참가팀들과 그 가족, 친지들 정도였지만 관할 동과 구청 관계자들까지 모여들었으니 대강당을 가득 메우고 시끌벅적할 수밖에 없었지요.

발표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나이든 여성들이었습니다. 노년에 접어들어 무료함도 달래고, 젊었을 때 해보지 못한 취미도 살리며, 펼쳐보지 못했던 '끼'를 발산해보려는 마음들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참가 종목은 오히려 팀 수에 비해 그리 다양하지 못했습니다. 스포츠 댄스와 가요, 국악 춤과 민요, 그리고 모듬북 공연, 하모니카 연주와 요가 정도였으니까요. 그렇지만 참가자들의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왜 안 그러겠습니까? 평생을 평범하게 살아온 소시민들이 모처럼 많은 관중들이 바라보는 무대 위에 서게 됐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무대 의상들은 상당히 다양했지요. 특히 어느 벨리댄스 팀의 의상은 서늘한 날씨와는 상관없이 화려한(?) 모습이었습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치마에 윗몸에는 브래지어만 착용했으니 추울 것 같았지만 전혀 춥지 않답니다. 모처럼의 공연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 때문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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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를 손에 들고 춤추며 민요를 부르는 친구부인(정면 오른쪽) ⓒ 이승철


그러나 가장 선호도가 높은 색상은 빨강이었습니다. 빨간색 옷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나이든 사람들이라 강렬하고 화려한 빨간색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게 친구들의 분석이었지요. 공연이 끝날 때마다 며느리와 딸, 손자손녀들이 꽃다발을 바쳤습니다.

많은 팀들의 공연을 거쳐 드디어 친구가 등장할 순서가 되었습니다. 나는 카메라로, 다른 친구는 캠코더로 정성껏 촬영에 들어갔습니다. 공연은 처음부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다른 댄싱 팀들은 대부분 여성들끼리 짝을 지어 나왔는데 이 팀은 모두 남녀가 짝을 지어 나왔기 때문입니다.

춤이라는 것이 동성들끼리 짝을 이루어 추면 아무래도 격이 떨어지잖아요? 긴장감도 떨어지고 멋이나 시각적으로도 쳐지게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친구부부가 소속된 팀은 완벽하게 남녀가 짝을 이루어 나왔으니 박수갈채가 터질 수밖에요.

연습을 많이 했는지 춤도 정말 멋지게 소화하더군요. 경쾌한 음악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는 춤꾼들의 모습은 나이든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지요. 정말 멋진 직업 춤꾼들 뺨치는 수준이었으니까요. 공연이 끝나자 더욱 열화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이! 친구, 그런데 조금 전 공연할 때 보니까 부인이랑 춤출 때보다 다른 여성이랑 춤출 때 더 신나고 즐거운 표정이던데 어찌 된 거야?”
“아니 산에 오를 때는 그 무겁던 몸이 춤출 때는 물 찬 제비 같던 걸 하하하.”
“에이, 이 사람아! 그럴 리가 있나? 허허허. 하긴 어쩌면 그게 당연한 것 아냐? 허허허허.”

공연을 마치고 복도로 나온 친구를 다른 친구들이 놀리자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여간 만족한 표정이 아니었지요. 민요와 소고춤에도 참가한 친구 부인은 남편 친구들을 대하기가 많이 쑥스러운 표정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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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리댄싱팀의 시원하고 화려한(?)한 복장 ⓒ 이승철


우리들이 웃고 떠들며 담소하고 있을 때 중년 신사 하나가 복도에 서있는 사람들과 악수공세를 펴며 다가왔습니다. 그는 구청장이라고 했습니다. 역시 선출직이라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을 알리고 호감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겠지요.

“구청장님이라고 하셨나요, 청량리 1동 댄싱 팀이 제일 잘하던데요.”
함께한 친구들이 슬쩍 공연에 참가한 친구를 응원합니다. 친구가 참가한 댄싱 팀이 청량리1동 팀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구청장은 슬쩍 웃음을 흘리며 지나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 우리들과 악수를 한 것은 아무 소득이 없는 건데. 우리들 중 동대문구에 사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
역시 나이든 친구들이라 생각이 대부분 정치적입니다. 구청장의 악수인사를 정치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순서는 모듬북 연주였습니다. 열 사람의 고수들이 크고 작은 20개의 북을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는데 이날 공연의 마지막 순서로 손색없는 멋진 연주였지요. 국악을 좋아하는 내 취향 때문인지 몰라도 이날의 어떤 공연보다 두드러지게 멋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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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무용 민요팀 ⓒ 이승철


“춤 계속 해, 늘그막에 어쩌면 춤으로 대성할 자질을 가진 것 같아.”
공연을 함께한 댄싱 팀들과 함께 해야 하는 친구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서던 다른 친구가 또 농담을 던졌습니다.

“어, 그거 좋지, 반가운 말이야. 어때? 같이 해보지 않을래?”
역시 웃음으로 받아주는 친구의 표정이 해맑았습니다. 그런데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어! 친구들 고마워! 친구들이 많이 와서 응원해 준 덕분에 우리 팀이 최우수상 먹었어, 하하하하.'
나이 들어 뒤늦게 춤바람 난 친구(서진석·63)의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승철 #춤바람 #스포츠 댄싱 #서진석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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