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난 핑계를 대고 있네

[옥탑방 여자와 반지하 남자의 자취방 이야기 ③] 그 여자의 의생활

등록 2008.11.04 14:34수정 2008.11.04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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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등지고, 서울에 온 '옥탑방 여자(이유하)'와 '반지하 남자(김귀현)'가 있습니다. 푸른 꿈을 품고 서울에 왔지만, 이들의 자취생활은 험난하기만 합니다. 밥 먹는 것부터 빨래하는 것까지, 자취경력 일천한 이들에겐 모든 일이 힘겹기만 합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생생한 자취 이야기를 기사로 만나보세요. 매주 1~2회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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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이 반을 차지하는 나의 건조대. 옥상이 있지만, 방에서 옷을 말리는 것이 더 편할 때가 많다. ⓒ 이유하


머리를 말리며 옷장 커튼을 펼친다. 매일 아침 그 앞에서 5분 정도를 머뭇거린다. '오늘은 뭐 입지?' 모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고민은 꽤나 구체적이다. 구두를 신자니 돌아다닐 일이 많을 것 같고, 치마를 입자니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아침 바람이 매섭다. 그렇다고 청바지에 티셔츠 걸치고 가자니 뭔가 맘에 안 드는 거다. 몇 안 되는 옷을 뒤적거리다가 결국 시간에 쫓겨서 마음을 정하곤 재빨리 팔과 다리를 밀어 넣는다.

그런데 어라! 단 하나뿐인 검정색 레깅스가 없다. 어제 밤에 빨지 않고 세숫대야에 던져둔 나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레깅스가 생각난다. '아, 그걸 빨아 놨어야 했는데…', 이미 대야 속에서 반쯤 축축해진 레깅스를 보니 아침부터 마음이 눅눅해진다. 맨 다리로 가기엔 너무 추운 날씨라 하는 수 없이 옷을 다시 갈아입는다.

[옥탑방 복음 1장: 모든 것엔 시기가 있다] 오늘도 빨래에게 핑계를 대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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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옷장 모습이다. 행거 앞에 파란 천으로 커튼을 쳐서, 옷들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다. 사실 저 천 뒤에는 옷 외에도 선풍기, 이불, 청소기 등 각종 물건들이 숨겨져 있다. ⓒ 이유하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기 마련이다. 배고픈 건 칼 같이 아는 배꼽시계는 밥 먹을 시간만 되면 따르릉 하고 울고, 사랑에도 시기적절한 타이밍이 필요하다. 더군다나 지금 줄줄이 떨어지고 있는 주식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혼자 살다보니 사소하게 생각했던 빨래에도 시기가 있더란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빨래하기 좋은 날은, 씻고 보니 수건이 없어서 방 한구석에서 처절하게 널브러져 있는 수건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다. 오늘 같이 옷 입을 때 자꾸만 뭔가가 부족한 경우도 물론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저분하게 다닌다는 건 아니다. 여자라면 공감하겠지만, 의외로 손빨래를 해야 할 것들이 많기 때문에 세탁기를 돌릴 일이 없다는 것이 그럴싸한 핑계다.

속옷이나 스타킹을 비롯해서 면이 아닌 소재의 옷들은  손빨래를 해줘야 한다. 결국 남은 건 세탁기를 돌리기에 멋쩍은 만큼의 빨래라는 건데, "환경오염이 심각하게 대두되는 이 시점에서 그 만큼의 빨래를 돌리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두 번째 핑계거리다.

거기에 하루는 피곤해서, 하루는 잠이 와서, 하루는 술 먹고 늦게 들어와서라는 갖가지 핑계를 더하면 방치한 빨래수도 점점 늘어난다. 늘 아침이 되면 "오늘은 꼭!"이라고 다짐을 하게 된다.

알뜰한 살림꾼(?)인 나는 얼마 전에 빨래판과 목욕 의자를 구매했다. 가게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한 번 사면 평생 사용한다"는 그 빨래판은 여러모로 유용했다. 오돌토돌한 표면은 조금만 문질러도 때가 쏙쏙 빠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별로 더럽지도 않은 갖가지 옷들을 죄다 꺼내서 빨아 버렸다. 잘한 일인지, 아닌지 뭔가 아리송해지는 순간이다. 

[옥탑방 복음 2장: 세탁기를 사랑하라] 터질 때까지 돌리고 돌리고~

맨 처음에 옥탑방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하게 '무(無)'인 그 곳을 채우느라 고생을 꽤나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가전제품들은 전부 중고가게에서 구입했는데 그 중 9만원을 주고 산 촌스러운 초록색의 세탁기는 딱 9만원어치만 일을 한다. 멀쩡하게 작동을 하긴 하는데, 세탁의 후반부로 가서 탈수에 이를 즈음에는 거의 하늘이 갈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거대한 소음이 뿜어내면서 자기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기특(?)한 놈이다.

처음엔 저러다 세탁기가 부러지는 게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 옆에서 지켜봤지만 (파편이 튈까봐 소심하게 떨어져서 보긴 했다) 이젠 담담해졌다. 그래도 워낙 세탁기를 가끔씩 돌리는 터라 순간 깜짝 깜짝 놀라긴 한다.

따지고 보면 원룸의 중고 가전제품들은 돌고 도는 셈이다. 그래서 중고 가게에 가 보면 5kg짜리 세탁기가 10kg짜리 세탁기와 가격이 동일하거나 오히려 비싼 경우가 많다. 사실 10kg 이상의 커다란 세탁기를 쓰는 건 가정집일 텐데, 결혼을 하면 대개 새 것을 사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에 반해 우리 같이 원룸 생활을 하는 소시민(?)들은 자꾸만 중고로 눈길을 돌리기 때문이다.

덜컹거리는 세탁기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놈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옷을 돌리고 돌렸을까?" 요즈음은 세탁기에서 은나노도 나오고 다이아몬드도 박혀 있다지만, 나에겐 기능에 충실한 이 애물단지가 제일 어울리는 것만 같다. 

[옥탑방 복음 3장: 항상 방심하지 말라] 이건 빤 것도 아니고, 안 빤 것도 아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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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한 쪽에는 늘 이렇게 빨래들이 뭉쳐져 있다. ⓒ 이유하

세탁기도 있고 빨랫감도 있는데, 늘 마지막을 장식하는 건 나의 허술함이다. 나의 자취생활에 방점을 찍은 사건들은 시시때때로 일어난다. 그 중 하나가 세탁기를 돌릴 때 세제 넣는 것을 깜빡하는 일이다.

돌리기 전이나 최소한 빨래 초반부에 알게 되면 다행인데, 탈수까지 시키고 꺼냈는데 그때서야 생각이 나는 건 뭐람(아예 생각이 나지 말던가!).

이건 빤 것도 아니고, 안 빤 것도 아니고 모호해진다. 햇볕에 아무리 말려도 보송할 것 같지 않은 빨래더미를 보면 한숨만 나온다. 대부분의 경우엔 그냥 눈 딱 감고 말려버리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옥탑의 가장 큰 장점을 십분 활용하지도 못한다는 점이다. 날씨 좋은 오후에는 거의 3시간 만에 뽀송뽀송하게 마르는 널찍한 옥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빨래를 하게 되는 시간은 저녁 해도 없고, 이슬까지 맺히는 바로 그 시간이다.

결국 햇볕이고 옥상이고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하긴, 날씨 좋은 오후에는 코끝에 바람을 잔뜩 머금고 배고픈 강아지마냥 거리를 쏘다니니까 빨래를 할 새가 없는 건 어쩜 당연한 일이다.

그나저나 나는 이상하게도 빨래를 하고 있으면 오만가지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늘 처음은 몸을 움직이면서 일하는 것에 대한 경의(?)에서 시작해서, 나의 과거를 잠시 떠올리다가 불안정한 미래를 생각하다가 마지막은 엄마다. 식구가 많은 우리 집은 매일 돌려도 세탁기가 빵빵하게 빨랫감이 밀려 있었고, 늘 건조대가 모자랐다. 난 늘 빨래를 널면서 엄마를 생각한다.

이 모든 글이 빨래를 널면서 스쳐지나가는 '잡다한' 생각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중요한 건 긍정적인 내 마음은 빨래를 떠올리면 신선한 비누냄새가 함께 떠오르고, 그 비누냄새를 맡다 보면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갑자기 다시 코끝에 비누 냄새가 아른거린다. 그래,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지. 벌여놓은 일상을 추스를 줄도 알면서 살아야지. 오늘도 계획만은 풍족해서 흐뭇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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